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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부여의 남진 혹은 신라의 간접지배?

ㆍ4세기 국내산 갑주 대거 출토 ‘임나일본부설’ 허구를 밝히다

흥분한 조합원이 휘두른 호미는 조합과 부산시의 창구역을 맡은 박유성의 귀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쳤다.


“모골이 송연했어요. 주민들도 흥분할 만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 대한 애착이 어지간하잖아요. 새 연립주택을 지으면 집값이 올라갈 것이 뻔했는데, 문화재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박유성씨)

주술적 의미로 나무에 달아 흔들었던 칠두령.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은 부산시의 대안마련으로 극적인 타협점을 찾는다. 현장의 토지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집을 지을 수 없게 된 조합원들에게 다른 곳(연산동·구서동 등)에 집을 우선 마련해주는 방안을 찾은 것이다.

“지금 보면 배울 점이 많아요. 부산시가 발빠르게 시민들의 재산권도 보장해주고 문화유산도 지키는 윈윈 전략을 폈잖아요.”(조유전 선생)

조유전 선생은 문화유산 보존의 의지없이 시간만 끌다가 이제는 보상비용만 수조원에 이르게 된 풍납토성의 악몽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어쨌든 걸림돌은 없어졌고, 발굴은 1980년 10월23일부터 순조롭게 이뤄졌다.

기병전투때 말의 얼굴을 보호하는 데 쓰인 실전용 말머리가리개(마면주).


처녀분의 감동

역시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인 11호분과 22호분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처녀분을 발굴한다는 것은 웬만한 고고학자들도 평생 얻기 힘든 일생일대의 복(福)이다.

“11호·22호분의 덮개돌이 노출되었어요. 한 개에 3t이나 되는 덮개돌이 4장씩 무덤을 덮고 있었는데, 각각의 덮개돌 사이 틈새는 작은 돌들이 메우고 있었고, 다시 그 위에 진흙이 발라져 있었어요. 완전한 밀봉상태였습니다.”(정징원 전 부산대 교수)

부산대 학생(4학년) 신분으로 발굴에 참여했던 전옥년(부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당시의 감격이 되살아났는지 소녀의 하이톤으로 회고한다.

“(22호분의) 작은 돌 하나를 들어내니 틈 사이로 무덤의 내부가 보였습니다. 손전등으로 비춰보았습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먼지 때문에 약간은 뿌였던 공간…. 바싹 다가서 눈을 크게 떠보니 바닥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흙먼지에 덮인 뭔가 철도레일 같은 것이 쫙 깔려있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 그 때의 그 감동이란….”
 

전사의 머리를 보호한 투구.

 


당시 급보를 받고 한걸음에 뛰어간 문화재관리국 조유전 학예연구관의 추억.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일천한 발굴경험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쓱싹 졸속으로 해치운 그 부끄러운 발굴사. 이번만큼은 그런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손전등으로 22호분을 보았는데, 무슨 관장식 같은 유물이 관의 머리맡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1980년 12월4일, 드디어 덮개돌을 들어냈다. 무덤 내부의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철도레일처럼 보였던 것은 다름아닌 철정(鐵鋌), 즉 덩이쇠였어요. 목관을 놓기 위해 바닥에 깔아놓은….”(정징원 전 부산대 교수)

또한 당시 조유전 학예관이 관 장식이 아닌가 판단했던 것은 7개의 방울이 달린 가지방울, 즉 칠두령(七頭鈴)이었다.  

4세기대 제작된 판갑. 복천동 고분의 상징 유물이다.

 


“아마도 나무에 꽂아 흔들었을 것인데, 당대 주술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조유전 선생)

11호분에서 확인된 금동관은 한강 이남에서 출토된 금동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형태로 여겨졌다. 완전한 신라형식의 금동관, 즉 출(出)자형이었던 1호분 금동관(1969년 동아대박물관 발굴)과 달리 11호분 금동관은 나뭇가지 장식이었다.

“11호분 금동관 장식을 보면 삼엽형(三葉型) 문양 장식이 붙어있는데 이것은 고구려 지안(集安)에서 나온 금동관식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11호 금동관이 광개토대왕 남정(400년) 이후 고구려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이한상 대전대 교수)

또 11호와 22호에서 순장(殉葬)의 흔적이 보였다. 각각 3개체분의 유골이 확인됐는데, 순장자는 여성과 30대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유물들은 ‘주연을 빛내기 위한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11호분에서 찰갑(札甲·작은 철판을 가죽끈으로 연결해서 만든 갑옷)은 물론 투구와 목가리개, 어깨가리개, 정강이가리개, 팔가리개 등 갑주(甲胄·갑옷과 투구)가 세트로 확인되자 학계는 경악했다. 또 11호분에 딸린 부곽인 10호분에서 종장판갑(세로로 긴 철판을 구부려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서 만든 갑옷)과 말의 얼굴을 가린 마면주(馬面胄)가 현현했다.

먼저 마면주는 얼굴덮개부와 챙, 볼가리개로 구성됐다. 분명한 실전용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출토된 것이어서 관심을 모았다.

우리 고대사의 공백기로 여겨진 가야사를 구명하고, 신라·고구려·백제·왜와 가야와의 관계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발굴 일주일 만에 복천동은 긴급히 사적(273호)으로 지정되었다.

“당시만 해도 사적 가지정이란 전례없는 일이었거든. 이후 부산시가 보존을 위해 연립주택 부지를 사들이느라 애를 먹었지.”(조유전 선생)

처녀분인 22호분에서 확인된 철정, 즉 덩이쇠. 금괴와 같은 맥락이다. 철제품을 만들기 위한 소재로 쓰였고, 화폐로 유통되기도 했다. 무덤에 묻을 때는 관의 밑바닥에 깔아놓았는데, 이는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다. 복천박물관 제공

 


쏟아진 갑주와 임나일본부설의 폐기

이후 공원화 사업을 위한 사전 발굴 및 학술조사가 이어졌다. 정리하면 1969년 첫 발굴 이후 복천동에서는 190기의 유구가 조사됐다.

그 결과 토기 3000여점, 철기를 포함한 금속류 3000여점, 유리를 비롯한 장신구 4000여점 등 출토유물이 1만여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엇보다 복천동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잠깐 언급했듯 1980년 그 뜨거웠던 발굴 이후 계속 쏟아진 철제 갑주와 마구류이다.

“지난해에도 4세기대 철제판갑이 두 점 출토되었는데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종장판갑의 반 이상(57%)이 이 복천동 고분에서 나왔습니다.”(이현주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종장판갑은 33점인데, 복천동에서만 22점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찰갑(8점)과 투구(27점), 경갑(목가리개·8점) 등을 합하면 65점에 이른다. 복천동을 가히 갑주박물관, 혹은 갑주 백화점으로 일컬을 만하다.

특히 종장판갑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4세기대 당대 가야 사람들이 제작한 순수 국내산이라는 것이다. 이 종장판갑이 발굴되자 일본인들이 그토록 끈질기게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의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

“그때까지는 갑옷, 특히 판갑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밖에 없다고 했고, 그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의 불씨를 지피는 역할을 했는데, 복천동에서 4세기대 판갑이 나오면서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도리어 한반도제 판갑이 일본으로 수출된 것이라는 거지.”(정징원 교수)

철판을 구부려 상반신만 갑옷으로 가리는 판갑은 주로 보병들이 착용했다. 하지만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을 전후로 갑옷이 획기적인 변화의 길을 걷는데, 바로 기병용 찰갑이 등장한 것이다. 길이 3~4㎝, 너비 2~3㎝의 철판을 끈으로 이은 찰갑(札甲)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말 위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보호장구였다. 자연히 기병이 타고 다니는 말에게도 마면주(투구)와 말갑옷을 입혔다.

1980년 학계를 놀라게 한 11호분 출토 갑주는 바로 삼실총과 쌍영총 벽화에서 보이는 찰갑 세트와 동일한 양식이다.

사실 갑옷은 복천동 이후 경주 사라리와 구정동 등 신라 영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이른바 가야고분에서 수장급 고분의 부장품으로 인기를 끌었을까.

“복천동을 이끌었던 이들은 전사집단의 지도자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정치 및 사회체계와 법의 권위가 구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역시 무력을 지닌 이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고, 또 그 사람들이 힘의 상징, 권력의 상징으로 갑주를 부장하지 않았을까요.”(이현주)

신라가 5세기 이후 금관과 금동관을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 부장했듯, 가야는 갑주를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한상 교수의 지적대로라면 신라가 금동관 및 금관을 고분에 부장한 것은 5세기 2·4분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신라 역시 완전한 국가체제를 이루기 전인 5세기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릅니다. 아직 경주 한복판에 대한 발굴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부여가 남진했다?

발굴에 대한 해석이 이어졌다. 복천동과 김해 대성동 고분을 발굴한 신경철 부산대 교수는 아주 재미있는 학설을 내놓았다. 즉, 김해 대성동과 부산 복천동 세력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구야국(狗邪國·대성동)과 독로국(瀆盧國·복천동)의 중심부였다는 것. 낙동강 양안을 대표하는 두 세력은 정치연합체를 이뤘는데, 구야국 우위의 종적 정치질서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 정치연합체, 즉 금관가야는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신 교수는 3세기말 북방문화·습속을 지닌 강력한 지배집단의 출현으로 이뤄졌다고 본다. 갑자기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은 도질토기가 출현하고, 사람과 말을 희생시키는 순장 풍속 등 북방유목민족 특유의 습속이 보인다는 것. 북방류의 철제갑주와 마구류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이처럼 금관가야를 이룬 신지배층의 출자를 부여(扶餘)로 보았다. 특히 ‘통전부여전(通典扶餘傳)’ 등 중국사서의 기록, 즉 “285년 북부여가 모용씨의 피습을 받아 왕(依慮)이 자살하고, 자손이 옥저로 달아났다”는 내용을 주목했다. 달아났다는 부여 주력집단의 행방이 묘연한데, 바로 이 집단이 해로를 통해 단숨에 김해지역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금관가야가 이렇듯 북방계 문물·습속을 배경으로 한 신지배세력을 계기로 기왕의 구야국과 독로국이 정치연합을 이뤄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금관가야를 이끈 김해 대성동 집단의 위상은 광개토대왕의 남정(400년) 등 고구려·신라의 가야진출로 몰락하고, 금관가야 영역은 신라화한 복천동 세력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문헌사학자들은 대체로 4세기를 전후하면 이 복천동 일대를 비롯한 부산·김해지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고 보고 있다. 김대환 영남대 박물관 연구원은 고고학적인 비판을 가한다.

즉, “복천동식 목곽묘는 김해 대성동보다는 경주식(신라)과 비슷하며, 순장의 양상도 경주식 부장형태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묘제뿐 아니라 장례의례, 철기생산, 분배 등 복천동 집단과 대성동 집단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복천동은 오히려 신라의 중심지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결국 복천동 고분 세력은 신라가 낙동강 하류역의 교역망 장악을 위해 집중적으로 키운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금동관과 대도(大刀) 등은 모두 4세기말~5세기를 전후한 신라의 간접지배에 따른 하사품이라는 것이다.

또하나, 순장은 부여만의 풍습이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유행했던 동이의 공통된 풍습이라는 점과, 부여를 북방유목민족의 범주에 넣는 것도 지적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복천동 고분을 해석하는 옛 신라와 옛 가야 지역의 학자간 시각차가 너무도 크다는 점이다. 신라와 가야의 다툼과 경쟁이 1500~1600년이 지난 지금 학계의 논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일까.(끝)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