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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1273년 전 나 당 바둑대결-한 중 반상대결의 효시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혁者乎 爲之猶賢乎已)”(<논어> ‘양화’)

 
■“노느니 바둑이라도 두어라”

 
먹고 노느니 바둑·장기로 마음을 다잡으라는 말이다. 기원전 5세기를 풍미했던 공자님 ‘말씀’이다. 바둑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기야 <박물지> 등 중국문헌은 “이미 요(堯)임금이 바둑으로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고 기록했으니…. 바둑은 이후 다양한 이름을 얻었다.

‘난가(爛柯)의 전설’(“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지 모른다”)에 등장하는 ‘신선놀음’은 바로 바둑을 뜻한다. 또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 해서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뜻의 ‘좌은(坐隱)’, ‘근심을 잊는다’해서 망우(忘憂), 흑돌과 백돌을 의미하는 ‘오로(烏鷺·까마귀와 해오라기)’ 등으로 일컬어졌다.
 
바둑은 ‘동이’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도 극성기를 이뤘다. <북사>와 <주서>, <수서> 등은 일제히 “고구려와 백제인들이 바둑을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신선놀음에 나라를 잃고…

 
오죽했으면 바둑 때문에 한성백제 500년 사직이 멸망의 길로 접어 들었을까. 백제 개로왕은 “바둑을 가르쳐 준다”며 접근
한 고구려의 국수(國手) 도림(道林)에게 흠뻑 빠졌다. “내가 왜 그대를 이렇게 늦게 만났느냐”고 한탄할 정도였다. 도림이 마각을 드러냈다. 개로왕에게 “성곽과 궁실을 크게 쌓으라”고 속삭인 것이다.
 

왕은 도림의 참언을 그대로 믿었다. 대대적인 토목공사에 국고가 텅 비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결국 한성백제는 475년 장수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신라에서는 효성왕(재위 737~742)에 바둑이 성행한 것 같다. 효성왕이 태자시절,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함께 궁정(宮庭)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다. 그러면서 약속했다.

“내 잊지 않으마. 혹여 나중에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을 까맣게 잊었다. 신충이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다. 노래가 삽시간에 퍼졌다. 그때서야 왕은 신충을 기억해냈다.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자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다.

 
■1277년 전 ‘지도기’

 
738년, 역시 효성왕 때의 일이다.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두 가지를 당부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중국과 비길만 하다는구나. 그들에게 대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해라.”

또 하나의 당부가 있었다. “당의 바둑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전한다.

“(현종은) 신라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以國人善碁)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楊季膺)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서 나왔다.(國高혁 皆出其下) 이때 왕(효성왕)이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보물·약품 등을 하사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효성왕조’)
 
당시 당나라의 바둑은 최절정기에 이르렀다. 궁정에 기대소(棋待詔)라 하는 전문기사제도를 둘 정도였다. 지금의 19줄 바둑이 당나라 때 이미 유행했다는 설도 있다. 그랬으니 현종은 ‘바둑을 잘 둔다’는 신라사람들에게 선진바둑의 실력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자세한 승패의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 국수(國手) 양계응에 맞서 신라 고수들이 돌아가며 도전하는 흥미진진한 반상대결을 벌였을 것이다. 어떻든 반상의 나·당 전쟁으로 서라벌이 들썩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신라고수들은 연전연패했다. 2006년 경주 분황사에서 15줄짜리 바둑판이 발견됐다. 혹 15줄 바둑에 익숙했던 신라의 고수들이 19줄 바둑으로 무장한 당나라 양계응에게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닌가. 어떻든 효성왕은 신라 기사(棋士)들을 ‘지도’한 당나라 사절에게 상을 내렸다.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한·중간 바둑 교류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꼭 1277년 흐른 지금은 어떨까.

 
한·중이 맞붙은 세계대회 타이틀전(아시안게임 포함)의 승패를 계산해봤다. 93승44패. 특히 1988년 후지쯔배부터 시작된 22차례의 국가대항전에서는 22승4패.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다. 최근에는 중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지만 1277년 전에 비한다면 상전벽해라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당시 신라인들이 보았던 당나라 양계응은 지금 중국인들이 보고있는 이창호 9단과 동격이었을 지 모른다.

 
어떻든 이창호 9단이 강조하는 ‘위기십결(圍棋十訣·바둑 10계명) 중 첫번째를 되돌아본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즉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찌 바둑에서만 적용되는 말일까.

/문화·체육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