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신이 벼슬에 오를 때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습니다. 게다가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흔합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합니다.”

세종 15년(1433)이었다.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의 페해를 조목조목 논한다. 하지만 세종은 난색을 표한다.

“엄금 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

이조판서가 “추상같은 금주령을 내리면 근절시킬 수 있다”고 재차 고했다. 그러자 세종이 마지못해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냐. 술을 금하기는 정말 어렵다. 하나 정 그리해야 한다면 주고(酒誥·술을 경계하는 글)를 지어 신하들에게 내려주지.”

역시 성군이시다. ‘쐬주 한 잔의 유혹’을 어느 누가 막는다는 말이냐. 6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대한민국 성인 1인당 마신 소주가 1년 평균 84병에 이를 정도라니 말이다.  

 

<사진1> 소줏고리에서 소주를 내리는 장면. 처음 증류된 소주는 70~80도의 도수를 나타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주에 빠져 신세망친 고려 장군


소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국인을 대표하는 술인 소주는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 
소주를 처음 만든 이들은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었다고 한다. 이 증류주는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라는 명칭으로 전승되고 있단다. 1258년 몽골 정벌군이 압바스조를 공략할 때 이 술의 제조법을 배워갔다고 한다.

몽골군은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에 양조장을 만들었다. 원정군이 이곳에서 만든 소주를 가죽 술통에 넣어 휴대용으로 마신 것이다. 왜 지금까지 안동소주가 유명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고려인들은 ‘물처럼 맑고. 맛은 매우 진하고 강렬한’(<본초강목(本草綱目)>) 소주에 단번에 매혹됐다. 예컨대 1376년 경상도원수 겸 도체찰사인 김진은 부하 장수들과 함께 기생들을 모아 밤낮으로 소주를 마셔댔다.
오죽했으면 장병들이 소주에 빠진 김진 일당을 ‘소주도(燒酒徒·소주의 무리)’라 하며 손가락질 했을까. 이듬해 왜구가 침입해서 합포영(창원지역)을 불사르고 유린했다. 하지만 김진의 군사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희가 뭐하러 갑니까. 저들 소주도라는 인간들을 시켜 적을 무찌르라 하시든가요.”

김진은 결국 혼자 줄행랑을 쳤고, 그 죄로 평민으로 강등됐다.  

 

<사진 2>소줏고리에서 소주를 뽑아내는 원리를 그린 자료. /경향신문 자료

■선물용으로 사랑받은 소주


소주는 고려의 뒤를 이은 신생국 조선까지도 취하게 만들었다. 임금은 종친과 신하들에게 소주를 즐겨 하사했다.
예컨대 태종은 2차 왕자의 난에서 패한 뒤 귀양을 갔던 넷째형 방간에게 소주 10명과 안주를 하사했다.(1417) 세종은 세자의 자리를 내놓은 뒤 멋대로 살았던 형(양녕대군)에게 향온과 소주를 내려주었다.(1433) 왕위를 동생들에게 내준 형들에게 소주 한 잔 대접한 것이다.
소주를 약으로도 썼다. 예컨대 황보인 등 대신들은 1552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단종에게 소주를 권했다. 부왕(문종)의 장례를 치르면서 허해지고,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해주려 한 것이다. 

“주상께서 나이가 어리셔서 혈기가 정하지 못하니 타락(우유)를 드시옵소서. 또 여름 달이라 천기가 지고 무더우니 소주를 조금 드소서.”

1471년 대신 홍윤성은 “이질을 치료하기 위해 소주를 마긴다”고 해서 임금(성종)의 허락을 얻었다.   
조선소주는 외교무대에서도 크게 사랑받았다. 예컨대 1429년(세종 11년) 명나라 사신 여창성은 중국황제에게 ‘바칠’ 진헌물목을 쓰면서 ‘소주 10병을 올리라’고 요청했다. 또 성종은 명나라 황제에게 홍소주와 백소주 각각 10병씩을 특별히 보냈다.(1480년)
또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대마도주에게 보낼 하사품 목록에서 소주는 빠지지 않았다. 1435년(세종 17년) 대마도주 종정성이 사신을 보내 간청했다.     

“제가 농사에 실패했습니다. 기근이 쌓여 매우 곤란한 상황입니다. 쌀과 소주를 청구합니다.”

웃기는 일이다. 농사가 실패하고 기근에 시달린다면 쌀만 달라고 하면 될 일인데, 무슨 소주인가. 대마도주가 얼마나 조선의 소주를 좋아했는지 기근 핑계를 대고 소주를 청한 것이다. 세종은 못이기는 척 소주 20병을 내려주었다.

 

■소주 먹고 죽은 이성계의 장남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의아한 장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소주를 마시고 죽는 사례와 소주를 이용해서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들이다. 얼마나 소주가 독했으면 그랬을까.
기록에 나온 첫번째 희생자는 다름아닌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이방우)였다.

“태조 4년(1393), 술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에 날마다 마셔댔다. 그는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뿐이 아니다. 태종 4년(1404년) 경상도 경차관 김단은 고을 수령이 권한 소주를 과음한 뒤에 급사했다. 중중 10년(1515) 제주 목사 성수재는 너무 소주를 좋아해서 병을 얻어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중종실록>의 사관이 안타까워 한다.

“성수재는 일찍 무과에 장원급제한 자못 청렴하고 유능해서 임금이 크게 쓰려고 했다. 하지만 소주를 너무 좋아해서….”

1526년에는 이세렴이라는 이가 소주를 폭음하는 바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술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단순사건’이라 치부할 수 있다.    
 

 

<사진3> 전국 12웅의 하나인 중산국에서 출토된 술. 2300년전의 술이 온전하게 나왔다. 중산국은 동이계가 세운 나라이다


■최초의 폭탄주(?) 남편 살해에 사용?


1536년(중종 31년)의 일이다. 오여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황간현(충북 영동) 사람이었다.
재상인 이항의 매부였기 때문에 매부의 세력을 믿고 방자한 짓을 일삼은 자였다. 그런 오여정이 그만 넘지 못할 선을 넘고 말았다. 아버지(오찬)의 첩인 돌지라는 여인과 정을 통한 것이었다. 점점 대담해지는 간통행각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간통사실을 들킨 남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아비를 죽인 뒤 경상도 지방으로 도주한 것이다.
내연 남녀는 변복을 하고 생선을 팔며 살다가 포도관에게 검거되고 말았다. 윤리와 관련된 강상죄였기에 오여정과 돌지는 극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은 <중종실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런데 실록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돌지가 남편을 죽였을 때 소주와 백화주를 사용한 것(用燒酒及白華酒)이 이미 그의 공초에 드러났습니다. 일에 참여한 것은 단연코 의심할 것 없습니다.”(<중종실록>)

오여정이 철쭉을 담가 만든 백화주와 소주를 아버지에게 먹였다는 것이다. 철쭉은 그레이아노톡신이라는 독성분이 들어있어 먹으면 안된다. 독성성분이 든 백화주에다 소주를 함께 마시게 했다? 실록이 더는 설명하지 않았기에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주와 백화주를 함께 사용해서 남편을 죽였다면 혹 ‘소주+백화주’ 폭탄주가 아니었을까.

 

■바람 핀 부인 때문에 폭음한 뒤 사망한 남편

중종 29년(1534년) 소주를 폭음하고 사망한 ‘남효문 사건’도 당대 조선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이었다.
<중종실록>을 보자. 영산(창녕 영산면) 현감인 남효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조카뻘되는 남순필이라는 자를 수양아들로 삼았다. 그런데 괴상야릇한 일이 생겼다. 남효문의 아내와 수양아들이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남녀가 몰래 동침하며 간통한다는 소문이 퍼졌는 데도 정작 남효문만 몰랐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수양아들의 언간(한글편지)을 남효문에게 잘못 건네주었다. 물론 실수였다.
편지내용을 본 남효문은 놀라 자빠졌다. 편지가 얼마나 음란하고 더러운 말로 가득 찼는지….

“기가 찬 남효문은 그 편지를 가지고 늙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아내를 불러 추궁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거짓말을 하지 못해 더듬거렸습니다. 전모를 밝힌 남효문은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어머니와 붙잡고 통곡하다가 어머니와 함께 소주를 폭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남효문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미는 아직 생존해 있으니 그의 말을 듣는다면 그 추한 실상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사건은 왜곡돼 있었다. 남효문의 첩이 정처를 모함하려고 거짓편지를 꾸며 일으킨 사단이었다. 하지만 남효문은 그 거짓편지를 철썩같이 믿고 노모와 소주를 마시며 한탄한 것이다. 그러다 죽어버린 것이다.             
 

 

<사진4>상나라에서 확인된 술잔. 동이족의 일파가 세운 상나라는 술을 사랑했다. 청동기로 만든 술잔과 술병 등을 무덤에 넣을 정도였다.

■소주 먹이고 남편 때려죽인 간통녀

내연의 남자와 짜고 남편에게 소주를 먹여 취하게 한 뒤 몽둥이로 때려 죽인 여인의 사연도 실록에 실려있다. 사건을 심리한 형조가 임금에게 고한다.

“성종 22년(1491년) 소은금이라는 여인이 간통남 강위량과 더불어 남편 초동에게 소주를 잔뜩 마시게 했습니다. 남녀는 만취한 남편을 몽둥이로 때려 죽였습니다. 소은금은 능지처사, 강위량은 참대시(겨울에 사형시키는 형벌)에 해당됩니다.”

이 때 우의정 이극배와 우찬성 어세겸 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변론했다.

“남편이 단 한 그릇의 소주를 마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5~6차례 구타당하면서도 소리도 지르지 못한 게 이상합니다. 함께 있었던 사람이 5~6명 이라는데 몰랐다는게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임금이 판결을 내렸다.

“저 계집은 남편을 죽이려고 소주를 준비해서 억지로 먹인 게 틀림없다. 마침 한밤 중이었던데다 너무 취한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한채 횡사했을 것이다. 형조의 의견대로 둘을 극형에 처하라.”

 

■얼마나 독했기에…

물론 지금도 과음해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유난히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례가 눈에 띈다. 소주가 얼마나 독했기에 그런 것일까.
원래 전통적인 소주는 안동소주와 같은 증류식 소주였다. 원래 증류를 시작하면 처음엔 알코올 도수가 80~70% 정도인 독주
가 나온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10%까지 알코올 도수가 내려가게 되고 이것이 섞이면서 45%의 소주가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처음 소주를 만들 때(1924년)의 도수는 35도였다. 그러다 증류식이 아니라 희석식 소주가 나오면서 소주의 도수는 낮아지기 시작했다. 희석식은 양조주를 여러차례 가열해 여기서 나온 고농도의 에틸 알코올(주정)에 물과 첨가제를 넣은 방식을 사용한 방식이다. 이로써 30도(1965년)-25도(1973년)-23도(1998년)-20도(2006년)를 거쳐 지금엔 15.5도짜리 소주까지 출시됐다. 지금 소주를 마시는 사람의 기준에서는 최소한 45도에 이르는 조선시대 소주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소주 한 잔 할 줄 알아야 풍류객”

이렇게 독한 소주의 폐해를 설파하고 금주령을 내린 적도 많았다. 세종 15년(1433)에는 술을 경계하는 ‘금주령’의 교서를 각 지방 관아의 벽에 걸어두고 늘 금과옥조로 삼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말하자면 ‘금주하라’는 플래카드를 관아 벽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성종 22년(1491) 임금이 의정부에 지시했다.

"소주를 매우 숭상하는 풍습이 됐다. 소주를 지나치게 마시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이치가 있다. 앞으로는 늙거나 병이 들어 약으로 복용하는 것을 빼고는 마시지 말도록 해라.”

효종도 비슷했다. 1657년 임금은 사대부들의 못된 술버릇을 지적했다. 술꾼을 풍류를 아는 멋쟁이로 알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찌질이’로 폄훼하는 풍조를 비난한 것이다. 

“지금 이른바 이름난 벼슬아치라는 자들이 저마다 음주를 마치 높은 풍류인줄 안다. 심지어는 국사에 전념하는 사람을 도리어 잗단 무리라고 지목하며 폄훼한다.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한 잔 유혹에 사형 당할 뻔한 노비

하지만 술 끊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절로 ‘카~’ 소리가 나는 소주의 참맛을 잊을 수는 없었다. 신분이 노비였어도 그랬다.
성종 20년(1489) 전연사(典涓司)의 노비인 비라가 내의원의 홍소주를 훔쳐 마셨다는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성종 임금은 소주 한잔을 훔쳐먹은 죄 치고는 너무 중하다고 여겼는지, 감형처분을 내렸다.
한번은 1494년 6월 행호군(무관직 벼슬·재상에 해당) 경유공이 병든 첩이 요양간 집에서 집주인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 사헌부의 하급관리가 급습해서 술을 마시던 경유공과 그 첩, 그리고 집주인을 긴급체포했다. 금주령을 어겼다는 죄목이었다. 그러자 임금은 혀를 끌끌 찼다.

“아니 그래 병든 첩이 요양간 집에서 술 한잔 했기로서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무관이지만 또한 재상인데 그렇게 업신여긴단 말인가. 경유공 등을 체포한 관리를 국문하라.”

사헌부가 득달같이 항변했다.

“그 관리는 업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랬다고 죄를 다스린다면 사기가 크게 꺾일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래도 재상에게 너무 심했다”고 들어주지 않았다.


 
■쐬주 한 잔의 유혹

‘쐬주 한 잔의 유혹’, 과연 우리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영조 임금의 ‘딱한 변명’ 하나 들어보자. 1736년 임금이 야대(밤중에 베푸는 경연)를 끝내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그 때 조명겸이 임금에게 한마디 쓴소리를 던졌다. 

“가만히 여론을 들어보니 성상(임금)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바라건대 조심하시고 염려하시며 경계하소서.”

원! 신하들의 성화 때문에 임금이 되어서도 소주 한 잔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영조의 군색한 변명이다.

“아니다. 그저 목 마를 때 간혹 오미자차를 마신다. 아마도 남들이 그걸 소주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 

신하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질’에 그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다.
3300년 전의 갑골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무리한다. 

“畢酒才病, 不從王古(필이 과음 때문에 술병이 걸렸는데, 대왕의 분부를 받들 수 있을까요?)”

당시 정인(貞人·점을 치는 상나라 시대 관리)이 점을 치고 그 내용을 새겨넣은 갑골문이다. ‘필’은 상나라 시대에 중책을 맡은 신하였다. 정인은 술을 진탕 마신 뒤 술병이 단단히 걸린 필이라는 신하가 왕의 명령을 받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왕의 명령까지 이행할 수 없을 정도였을까.
상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였다. 술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동이족이 세운…. 오죽했으면 서주(西周)시대 청동솥인 ‘대우정(大盂鼎)’에 “상나라는 제후와 백관이 술에 절어 패망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을까.

술을 사랑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 동이족에게 ‘물처럼 맑고, 진하고 강렬한’ 소주는 견딜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카~’하고….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