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중국어(한어·漢語)는 꼭 나하추(納哈出) 같구나!”(명 태조)
 명 태조 주원장을 알현한 목은 이색(1328~1396)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하추는 명나라로 항복한 원나라 장수였다. 황제가 ‘네 중국어 발음이 오랑캐 같다“며 면전에서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랬으니 본토 중국어가 얼마나 서툴렀을까. 천하의 이색이 나하추와 같은 반열에 선 것이었다. 이색이 망신 당한 사연인즉은 이렇다.  

김홍도가 그린 <연행도> 중 제9폭 ‘조공’. 조공을 하러 북경에 간 연행사들과 그 일행이 거리를 지나고 있다. 오른쪽 하단의 인물들이 조선 사신들이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목은 이색의 굴욕사건
 이색은 원나라 과거에서 급제한 아버지(이곡) 덕분에 10살 때부터 ‘중국어 교육’을 받았다. 중국 원어민 강사가 이색의 교육을 맡았다.
 요즘으로 치면 ‘조기영어교육’이었다. 아버지는 “사나이는 모름지기 황제의 도읍에서 벼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 유학의 신봉자라고 할까. 그는 20살 때는 북경유학을 떠나 국자감 생원에 입학했다. 이어 원나라 한림원(황제조칙이나 외교문서, 역사편찬 등을 맡던 기관)에서 일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열성에 힘입어 중국어 조기교육를 했고, 4년 간이나 중국본토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대 ‘중국어의 종결자’였던 것이다.
 그러던 고려 창왕 1년(1388년), 이색은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난다. 명나라와 국교를 수립하고, 창왕이 직접 명나라 조정에 입조하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한 사절단이었다. 그런데 사건은 이색이 명 태조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색의 명망을 듣고 있던 명나라 황제 태조가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원나라에서 한림원 학사까지 지냈다지. 그렇다면 응당 한어(중국어)를 알겠지.”
 순간 이색의 얼굴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리곤 한어로 대답한다는 말이….
 “왕(창왕)이 ‘친히 입조’(친조·親朝)하려 합니다.”
 황제가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이색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외교를 관장하는 명나라 예부가 알아차리고 황제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색이 오랫동안 입조하지 않아 중국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폐하!”
 자초지종을 들은 황제가 웃으면서 “어쩐지 꼭 나하추 같구나”라며 농으로 받아넘겼다. 외국어 조기교육에다 유학도 모자라 현지근무까지 했던 중국어 전문가였는데….  귀국 후에도 대망신을 당한 이색을 둘러싼 참새들의 입방앗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색은 공연히 황제 핑계를 댔다.
 “‘이걸 묻겠지’ 하고 생각하면 황제는 묻지 않았네. 또 황제가 물었던 것은 모두가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었네.”
 한마디로 이색은 예상질문과 답변만을 뽑아 달달 외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만 황제가 예상과 다른 질문을 하자 그만 당황하고 말았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색의 ‘실수’를 안주삼아 한껏 놀려댔다.
 “그러게, 하긴 큰 성인(이색)의 도량을 우리네 같은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나?”
 대학자인 이색의 실수담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너무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과연 이것이 청사에 길이 남을 이야기인가. 중국말이 서툴러 일어난 해프닝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는 느낌은 든다. 사실 북방(연경·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이색과 중국 중부 안후이성(安徽省) 출신인 황제가 서로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고려말부터 역관(譯官)들의 외국어 학습용으로 간행한 중국어 학습서였던 <노걸대>.  /서울대 규장각  제공

■통·번역은 사대(事大)를 위한 것
 이 뿐이 아니다. 외교무대에서 통역을 잘못해서 많은 외교적인 문제가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많다.
 “지난 번 중국사신이 왔을 때 ‘덕음이 매우 밝다(德音孔昭)’는 말을 통역이 잘못 전해 곤경에 빠졌는데….”(<중종실록>)
 “사신 접견 때 통역이 자세히 말을 전하지 못해 중국 사신들의 기색이 매우 불쾌해졌으니….”(<경종실록>)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해 제대로 된 통역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1597년, 선조임금은 도원수인 권율 장군을 맞아 적의 형세에 관해 논의하면서 땅이 꺼져라 한탄한다. 
 “정탐의 중요성을 더 말해 무엇하랴. 심지어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에 통역(通譯)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혼선을 일으키는데 이러고서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외국어의 중요성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조선이 외국어, 특히 중국어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와의 돈독한 사대외교를 위해 통·번역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사대(事大)를 하는데 있어 역학(통·번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나 우리 사신이 명나라에 갔을 때 통역이 잘못되어 조롱과 비웃음을 받게 됩니다.”(<세종실록>)
 사대, 즉 중국을 섬기기 위한 외교라? 하기야 지금도 미국 일변도의 외교가 어쩌고, 사대주의 외교가 어쩌고 하는 논란이 있지 않는가. 당시 역성혁명으로 새왕조를 연 조선으로서는 정치·군사·경제·문화 대국으로 등장한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원어민교사, 합숙훈련, 심지어 매질까지
 조선 초기의 임금들이 외국어 교육에 쏟는 열의는 요즘 강남 아줌마들의 극성에 견줄 만 했다. 우선 외국인 교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예컨대 위구르 출신의 귀화인 설장수를 사역원(번역·통역 및 외국어 교육기관) 제조(원장)로 임용했다. 설장수(1341~1399)는 한어와 몽골어, 조선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소학(小學)>을 중국어로 해석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저술했다. 이로써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등에만 의존하던 중국어 회화교육에 크게 이바지 했다. 심지어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온 명나라 사람 서사영과 장현 등을 사역원의 중국어 훈도(교관)로 쓴 일도 있었다. (<세종실록>)
 조정이 택한 가장 효과적인 외국어 교육이 있었다. 바로 요즘의 ‘영어마을식’ 교육이었다. 즉 사역원 내에서 중국말만 쓰게 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는 교육이었다.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인 신개가 읍소한다.  
 “중국말을 10년이나 배워도 중국현지에 두어 달 다여온 사람만도 못합니다. 이는 사역원에서는 마지못해 한어(중국말)을 한다해도 평상시에는 늘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룻동안 한어는 국어의 1/10도 못합니다.”(<세종실록>)     
 신개는 폭탄선언을 한다.
 “사역원 내에서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또한 초범은 부과(附過·잘못한 일을 적어두는 처벌), 재범은 차지(次知·주인을 대신해 처벌받는 하인) 1명…, 5범 이상은 형조에 이첩…. 하도록 하소서.”
 요즘의 외국어 교육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처벌을 내리고 가차없이 매질을 가했다니….  

 ■“중국말 공부는 어려워”
 그렇지만 역시 외국어 교육은 힘들었다. 특히 나이가 들어 중국말을 배워야 했던 사대부들은 곤욕을 치렀다.
 예컨대 세종 16년(1434), 집현전 부제학 설순이 상소문을 올렸다.
 “중국어란 배우기가 매우 힘듭니다. 어려서부터 배워도 어려운데 신석견 등은 나이가 아미 지나고 혀가 굳어서 오랫동안 배운다 해도 힘들 것입니다. ~사람의 소질이란 다른 것인데….”
 무슨 일이었을까. 세종은 명나라 학문과 명나라 말을 배운다는 취지 아래 신석견 등 몇몇 사대부들을 중국유학생 후보로 선발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유학이 여의치 않자 유학 대상자들에게 “일단 사역원에서 가서 중국말을 배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국유학을 꿈꿨던 이들은 졸지에 국내에서 중국어를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현장학습이 아닌 경험이 중국어 교육은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어학소질도 없었던 것 같다. 설순은 중국어 공부에 쩔쩔 매는 신석견 등을 안타깝게 어겨 상소를 올린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영의정 황희·좌의정 맹사성과 협의한 뒤 허락하지 않았다.
 “오경과 사서를 중국말로 읽는다면 국가에 도움이 된다. 지금처럼 순전히 중국말로 공부하도록 하라.”
 하지만 사대부들의 심중에는 단순 통역을 폄훼하는 풍조가 가시지 않았다.
 1544년(중종 39년), 홍언필이 ‘역관(통역)들은 무식하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낸다.
 “역관(譯官)들은 무식하기 일쑤라 매매(買賣) 등의 일만 압니다. 중국 사신의 언어는 대부분 문자(文字)에서 나온 것입니다. 역관들이 전하는 것은 겨우 그 지엽이고 본뜻은 결코 통역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통역은 단순히 말만 전할 뿐, 역시 문자의 본뜻을 모르면 제대로 된 의사전달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리 있는 말이기는 하다. 일상회화에 능하다고 외교무대에서 통역을 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연행사들이 북경 조양문 입성을 눈앞에 둔 조선사신들의 연행도.  /숭실대박물관 제공

■명나라가 유학을 꺼린 까닭
 가장 좋은 외국어 교육은 역시 중국 유학이었다.
 1460년(세조 6년) 임금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의 자제들을 명나라에 유학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는 단칼에 조선의 요청을 거절했다. 명 황제의 칙서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까지 통사(통역)들이 그럭저럭 잘 통역해왔고,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꼭 (중국으로) 유학 와야 할 이유가 없다.”
 명나라가 우려한 것은 조선 유학생들을 통한 국가 기밀의 유출이었다. 명나라 유학을 일거에 거절 당했지만 현지교육의 필요성은 끈질기게 제기됐다.
 “중국에 자주 보내 중국인과 만나야 말을 익히는데 보탬이 됩니다. 젊은 문신들을 뽑아 북경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요동이라도 보내 배우게 해야 하는데….”(<중종실록>)
 북경은 어렵다하더라도 가까운 요동이라도 학생들을 보내자는 이야기였다.
 중국유학이 불가능해지자 차선책으로 등장한 것은 통역이나 학생들을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자주 보내는 것이었다. 중종 31년(1536). 통역관 주양우가 중국을 너무 자주 드나든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자 좌의정 김안로 등이 반론을 제기한다.
 “한어를 아무리 능숙하게 구사해도 중국에서 중국 사람과 대화할 적에는 틀리고 빗나가 서로 통하지 못합니다. 중국을 자주 드나들며 몸으로 부딪혀봐야 거의 통할 수 있습니다.”
 중종은 “(주양우를) 띄엄띄엄 보내면 중국어 학습이 늦어질 것”이라는 의견에 따라 주양우의 빈번한 중국방문을 허락했다.

 ■홀대받은 제2외국어
 사실 중국어만큼은 아니더라도 몽골어·왜어·여진어의 통역도 필요했다.
 원나라는 망했다. 하지만 북방으로부터 여전히 달달(달달)로 알려진 타타르의 위협이 잔존해 있었다. 조선개국과 함께 일본과도 정식으로 국교가 재개됐다.(1401) 변방의 여진족과도 부족단위로 교류해야 했다. 하지만 같은 외국어라도 중국어를 제외한 왜어·몽골어·여진어 등은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다. 역과 시험에서도 장원급제자는 늘 한어전공자에서 나왔다.
 왜학(일본학)의 경우를 보자.
 1421년(세종 3년) 예조가 임금에게 주청을 드린다.
 “왜학생도(倭學生徒)들이 비록 학업에는 매우 부지런합니다. 그러나 (졸업 후) 나갈 직업의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기피하는 부야입니다. 왜학(倭學)의 어음(語音)과 글씨 쓰는 것도 중국글과 다르니 만일 힘써 권장하지 아니하면 앞으로 폐절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일본어학과 학생들이 졸업 후 진로가 막막하다는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일본어학과 자체가 폐지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예조의 청은 이어진다.
 “지금부터 왜학생도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사역원(司譯院) 관직 중 한 자리를 윤번으로 제수하게 하도록 하소서. 또한 생도로써 자격이 완성된 자를 적당한 관직에 등용하게 하소서.”
 그러니까 왜학생도들만을 대상으로 관직을 할당하는 특전을 베풀라고 상소한 것이다. 역과 선발인원(19명) 가운데 한학이 절대다수인 13명에 이르렀고, 몽학·왜학·여진학이 각각 2명씩에 불과했으니 그럴만 했다. 

 ■복역자를 통역으로 발탁한 사연
 그랬으니 정작 필요한 때에 이들 제2외국어 전공자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어 1528년(중종 23년)엔 일본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조정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사역원 제조 정광필의 다급한 상소이다.
 “지금 (조선에서) 일본말을 할만한 자는 김석주와 신자강 두 사람뿐입니다. 하지만 김석주는 지금 죄를 짓고 충청도에서 노역형으로 복역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한사람 신자강의 일본어 솜씨로는 일본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랬다. 그렇다고 통역이 필요하다고 해서 죄인을 풀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 그렇다고 일본사신의 접대를 소홀히 해서 국가체면을 손상시킬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정광필이 고심 끝에 묘수를 짜냈다. 바로 죄인 김석주를 서울로 이감시키는 형식을 취한 뒤 일본사신의 방문기간 동안만 통역으로 쓰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편법이었다.
 중종은 평소 일본어 전문가를 키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일본어 통역 양성에 힘쓰지 않다가 급하니까 죄인까지 발탁해서 써야 하는가. 한번 그러면 죄인(김석주)은 ‘필요할 땐 언제든 국가가 나를 부를 것’이라고 교만한 마음이 생길 것 아닌가.”     
 한참을 고민한 중종이 결단을 내린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이번은 일본국왕의 사신이 방문하는 때이니 통역이 잘못되면 나라망신이다. 일단 서울 안에서 도역(노역형)을 치르게 하고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 부리도록 해라.”
 그러면서 향후 대책을 내놓는다.
 “앞으로 일본어 통역 뿐 아니라 중국말·여진말 통역도 힘써 장려하도록 하여라.”
 제2외국어 전공자들은 부전공으로 한어(중국어)를 배웠다. 예컨대 태종대의 통역 황기는 왜어(일본어) 전공자였지만, 한어까지 배웠다. 성종대의 황중은 여진어 전공자였지만, 한어까지 배워 2개국어에 능통했다. 
 “황중은 가계가 미천한데다 여진어를 통역하는 조그만 재주로~2품에 이르렀으니….”(<성종실록>)
 사헌부가 여진어 통역 출신으로 사역원 제조가 된 황중의 과거를 들추는 대목이다. 여진어 통역이 폄훼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설움을 받은 황중이 중국어를 뼈빠지게 배웠을 것이다.  

 ■이순신 가문의 외국어 교육
 조선의 통역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이변(李邊·1391~1473)이다. 이변은 이순신 장군의 현조(玄祖·5대조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그는 조선초기 아주 유명한 사대부 출신 통역이었다. <세종실록>은 그가 얼마나 어학공부에 빠졌고, 또 소질이 있었으며, 조·명 외교에서 얼마나 활약을 했는 지를 알 수 있다. 먼저 1434년(세종 16년)의 기록을 보면 첫번째 문장이 재미있다. “그 사람됨이 둔했고, 서른이 너머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보면 달라진다. 어학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중국어 마니아’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서른이 넘어 발견한 재능이었던 것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한어(중국어)를 배웠다. ‘공효(功效·공을 들인 보람)를 반드시 이루고야 말리라’라는 다짐구호를 써붙인 다음 밤을 새워 가며 강독(講讀)했다. 또 한어를 잘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질문하여 바로잡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집안 사람들과 서로 말할 때에도 언제나 한어를 썼다. 친구를 만나도 반드시 먼저 한어로 말을 한 다음에  우리 말로 했다. 덕분에 한어에 능통해졌다. 가히 지독한 어학공부였다. 1429년(세종 11년)의 기록을 더 보자. 예조판서 신상이 임금에게 고했다.
 “이변은 문과에 급제했지만 오히려 중국어를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역원의 학생들이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마땅히 이변을 통역의 선생(訓導)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변을 ‘어학공부의 모범사례’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대쪽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하다.
 “이변의 성질이 굳세고 곧아서 비록 편협한 데가 있지만, 의롭지 않은 일은 털끝만치도 안한다.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세종실록>)
 서른이 넘어 과거에 ‘늦깎이 급제’한 뒤에야 중국어에 심취했고, 그야말로 불철주야 공부해서 일가를 이룬 이변. 과연 이순신 장군 가문의 할아버지 다운 분이시다.                                                
 <문화체육에디터 겸스포츠경향 편집국장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170 관련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