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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475년 9월 한성백제 최후의 날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는 한편이 대하드라마 같다. 

 

전쟁과 냉전이 오가고, 스파이가 암약했으며, 간계와 반간계, 배신과 복수, 그리고 치열한 외교전까지 어우러진 숨막히는 108년의 동족상잔의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으니 말이다.

 

마치 남북한의 열·냉전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 숨막혔던 475년 9월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자.  

 

"(백제 망명인 출신의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이 말에서 내려 백제 개로왕에게 절했다. 그런 뒤 왕의 얼굴에 세번 침 뱉고 죄상을 따지고 아차성 밑으로 끌고가 왕의 목을 벴다.”

이것이 <삼국사기>가 전한 ‘한성백제 최후의 날’이다. 백제로서는 ‘아차성의 굴욕’이었다. 이로써 기원전 18년부터 시작된 백제의 한성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이날은 고구려-백제 간 벌어진 처절한 동족상잔(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계)이 고구려의 승리로 마무리된 날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한성백제 멸망 후 아차산에 크고 작은 보루들을 구축했다. 항공사진은 아차산 4보루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중간첩(백제)’에 ‘총공세’로 응수한 고구려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부터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주몽)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다.

 

즉 주몽이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한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못한 것이 있었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주몽은 북부여 시절 예(禮)씨라는 여인과 혼인했는데, 주몽이 탈출할 당시 부인 예씨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유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들이 찾아오자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니….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비류와 온조는 땅을 쳤다.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 대왕의 건국을 도왔는데…. 아아! 이제 나라가 유리에 속했으니 우린 혹(贅·군더더기) 같은 존재가 됐구나.”(<삼국사기>)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소서노)와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한다.(기원전 18년)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공을 막지못한채 한강 이남 도성에서 붙잡혀 아차성 밑까지 끌려와 참담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사진은 남아있는 아차산성의 흔적.

■실패로 끝난 백제의 외교전
해묵은 앙금은 369년 본격적인 확전의 양상으로 치닫는다.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명을 끌고 백제의 민가를 약탈했다. 백제왕(근초고왕)이 반격을 가해 고구려군 5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371년엔 백제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승리의 주역은 백제의 ‘이중간첩’이었던 사기(斯紀)였다.

사기는 백제에 있을 때 왕의 말발굽을 다치게 해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고국원왕이 이끄는 고구려 대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했을 때였다. 사기가 극비리에 백제진영을 찾아와 고구려군의 허실을 고했다.

“고구려군의 군사가 많다고 하지만 가짜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로지 붉은 깃발의 부대 뿐입니다.”(<삼국사기> ‘근구수왕조’)     

사기의 정보로 천군만마를 얻은 백제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결국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이번에는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만 수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백제침공에 나선다.

백제는 결국 남녀 생구(生口)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고 항복했다. 백제왕은 설상가상, “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노라”고 다짐한 뒤 58성 700촌을 내주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광개토대왕비문>) 

 

■스파이전에 녹아난 백제
권토중래를 노리던 백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는다. 초반에 비해 국력에 고구려에 비해 떨어지게 된 백제는 북위를 상대로 처절한 외교전을 벌인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 황제에게 보낸 장문의 외교문서를 보자.

“백제와 고구려의 근원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승냥이와 이리(시랑·豺狼)’, 그리고 ‘큰 뱀(장사·長蛇)’이 길을 막고. ‘추악한 무리(추류·醜流)’가 성해지고, ‘애송이(소수·小竪)’가….”

개로왕의 표현 중에 ‘시랑’과 ‘장사’, ‘추류’, ‘소수’ 등은 모두 고구려를 욕하는 표현들이다.

 

저주와 증오로 점철돼있다.

 

하기야 고구려도 백제를 ‘백잔(百殘·백제의 잔적)’이라 폄훼하고 있으니….

 

개로왕이 올린 외교문서는 요컨대 “고구려를 멸망시킬 절호의 시기”라며 “백제와 북위가 손잡을 때”라고 동맹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위는 끝내 백제의 동맹제의를 거부하고 만다. 고구려의 힘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로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북위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개로왕이 원망하여 조공을 중단하였다.”    

아차산 4보루 모습. 발굴 후 복원해놓았다.

|박민규 기자

■배신자의 손에 목숨을 잃은…
고구려의 남침이 이어졌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극비리에 백제를 도모할 첩자를 구했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은밀히 손들고 나섰다.

도림은 371년 백제의 사기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죄를 짓고 백제에 투항했다.

 

백제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매우 좋아했다. 도림은 “왕께 바둑을 한 수 지도할까 한다”며 접근했다.

 

도림을 불러들여 시험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고,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이 마각을 드러냈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씀 해보시오.”
“이 나라(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성곽과 궁실이 수축·수리 되지 않았습니다. 또 선왕의 해골이 들판에 가매장돼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백성들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선왕은 비유왕을 지칭한다.

 

<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이 455년 9월 훙(薨·승하)했다”고만 기록돼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의 <삼국사기> 기사에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변에 의한 살해 가능성이 짙다. ‘흑룡’의 출현은 국가의 불길한 징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개로왕 즉위 후 14년간이나 <삼국사기> 기록이 공백인 것도 모종의 정변이 이어졌음을 반증해준다. 어쨌든 도림의 ‘세치혀’가 개로왕의 마음을 흔들었다.

“알았다. 내 그리 하겠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했다.

“이제 됐습니다.”

장수왕은 뛸 듯이 기뻤다. 장수왕은 백제 침공군을 편성할 때 백제에서 죄를 짓고 망명한 걸루와 만년에게 선봉장을 맡겼다.

 

■‘아무리 군주가 밉다 해도….’
475년 9월,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자 개로왕은 땅이 꺼지도록 후회한다.

“내가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그러면서 아들 문주에게 신신당부한다.

“난 당연히 죽어야겠지만, 너는 죽어서는 안된다. 난리를 피해 왕통을 잇도록 해라.”

문주(왕)가 고개를 떨구며 남쪽(웅진)으로 망명했다. 도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은 북성(풍납토성)을 7일만에 함락시켰다.

 

개로왕은 급히 남성(몽촌토성)으로 피했지만 걸루와 만년 등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붙잡혀 참담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한성백제의 최후’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평론을 달아놓았다.

“걸루(와 만년) 등은 스스로 죄를 지어 왕(개로왕)에게 문책당해 고구려로 망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적병(고구려)을 인도해서 전에 모시던 임금(개로왕)을 죽였으니 매우 의롭지 않다.” 

온달장군의 전설이 깃든 온달장군 주먹바위. 신라군의 화살에 맞은 온달장군이 주먹을 물끈 쥐고 죽었다는 전설이 잠겨있다.|박민규 기자

 

자취 감춘 한성백제
백제는 ‘아차산의 굴욕’ 이후 ‘웅진(475~538)→사비(538~660)시대’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고구려는 아차산 곳곳에 단단한 보루성을 구축한다. 지금까지 확인돼 사적으로 지정된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17곳에 이른다.

필자는 가장 잘 복원된 4보루에 서서 저 한강 너머 아파트 숲을 바라본다. 1600년 전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풍납토성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고보니 지호지간이다.

<삼국사기>에서 ‘북성’이라 지칭된 곳이다. 그 뒤엔 ‘남성’인 몽촌토성이 보인다. 아차성까지 끌려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개로왕의 후회섞인 한탄이 들리는 듯하다. 시조 온조왕이 도성을 조성하며 했다는 당부의 말이다.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궁실을 지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 간첩(도림)의 꼬임에 빠져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조성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스스로를 자책하며 외쳤을 것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또 하나, 고구려의 아차산 일대 점령기간은 ‘나제동맹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빼앗긴 551년까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고구려의 점령기간은 80년도 안된다. 그런데도 온통 고구려 판이다. 경기도 구리시는 아예 ‘고구려의 기상 구리시’라 자랑한다.

그러나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곳은 백제의 영역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에도 백제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혹 애써 찾지 않는 것은 아닐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