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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역대 최강의 '복지왕'은 세종 혹은 숙종?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다.(民惟邦本 食爲民天)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굷주림을 면치 못한다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 임금이 ‘억장이 무너진다’면서 “부덕한 과인 때문에 한많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과인이 장차 관원을 파견, 감사에 나설 것인즉….”<세종실록>)
 과연 최고의 성군(聖君)다운 조치라고 여길 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종 뿐이 아니었다. 조선을 46년 간이나 다스린 숙종은 어땠을까. 1698년(숙종 24년) 1월, 굶주림에 얼어죽은 시신이 40~50구가 쌓였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이 장탄식하면서 내린 비망기를 보자.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백제 시대 목간. 구황기에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백제시대판 ‘환곡(還穀) 문서’였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임금들
 “임금은 만백성의 부모다, 한사람이 굶주려도 마치 자기가 굶주리는 것 같고…. 하물며 굶어죽는 시신이 날마다 거리에 쌓이는데 구제하지 못하니…. 그 뼈아픈 심정이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실록>을 보면 숙종 재위 시대에 잇단 재해에 인심이 흉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95~1703년 사이에 지독한 흉년과 전염병 창궐, 그리고 엄청난 대홍수가 잇따랐다.(<숙종실록>) 그러자 숙종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뇌하고 있다.
 “아! 우리 백성들의 목숨이 다 끊어지게 되었다. 밤을 지새우며 노심초사하지만 뾰족한 계책이 없구나. 개탄스럽다.”
 숙종은 1696년, 노숙자 무료급식소와 비슷한 설죽소(設粥所·빈민들을 위한 관립 무료 급식소)에 비밀리에 별감을 수시로 보내 배급상황을 점검하고 개탄했다.
 “과인이 설죽소에 별감을 몰래 보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죽을 가져오게 했는데…. 첫번째 보냈을 때는 제법 죽의 양이 넉넉하고 쌀알도 많았다네. 평소에도 그런가 하고 다시 가져오게 했네. 그랬더니 양이나 질 모두 형편 없었네. 이래 가지고서야 굶주린 백성들이 살 수가 있겠는가.”
 이 뿐인가. 1714년(숙종 40년), 숙종은 진휼미를 실은 선박이 무사히 제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기쁜 나머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1000리 남녘 바다 잘 건너기 어렵고, 거센 바람 곡식 운반 또한 쉽지 않도다. 선박 모두 무사함을 알려왔으니, 하늘도 환과(鰥寡·과부와 홀아비, 여기서는 불쌍한 백성들을 뜻함)를 구제하는 하늘의 뜻이 분명하도다.”
 이런 숙종을 두고 국학자 최익한(1897~?)은 “백성을 구휼하는 선정이 두드러졌으며, 화평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밖에도 임금의 구휼활동은 가없었다.
 개인금고인 내탕고의 은(銀)과 쌀을 하사해서 구휼비용에 보충하고(선조·숙종), 제문을 지어 굶어죽은 백성을 제사 지내도록 하고(숙종), 걸식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죽을 나눠주고(영조), 쌀을 내려주고(정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 친필본. 보고서 2책에 토지·군·환곡 제도의 문란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거론했다.

■구휼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것
 ‘기근(饑饉)’이란 무엇인가. <이아(爾雅·중국에서 가장 오랜 자서)>는 “곡물이 익지않음을 ‘기(飢)’, 채소가 익지 않음을 ‘근(饉)’”이라 했다.
 동양의 지도자는 바로 ‘백성들이 먹고 살 곡식과 채소’가 없으면 스스로의 책임이라 여기고 자책했다. 즉 가뭄이나 홍수 등 흉황(凶荒)을 잘 다스리면 인정(仁政)이 되고 성군 혹은 현군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폭정이 되고, 폭군 혹은 혼군(昏君)이 된 것이다.
 그랬으니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구휼은 하루빨리 시행해야 할 급선무였다.
 예컨대 태종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구휼이니, 왕명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처리한 뒤에 나중에 보고하라”고 당부했다.(<태종실록> 1416년)
 즉 ‘선지원 후보고’의 복지정책이다. 이 ‘선조치 후보고’의 모범사례로는 전한시대의 급암(汲암)과 후한시대 한소(韓韶)를 들 수 있다.
 급암은 하내(河內·황허 이북 땅)에서 화재가 발생, 1000가구가 피해를 입자 황명을 받고 급파됐다. 화재는 단순 실화(失火)로 판명됐다.
 급암은 무리없이 사태를 수습했다. 문제는 급암이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생겼다. 하남(河南)을 지나칠 때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었다.
 “하남의 빈민들 가운데 1만여 가구가 수해와 한해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부자 간에도 식량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급암은 무제가 준 부절(符節·황제가 사신 혹은 파견관리에게 주는 신표)을 보여 하남의 곡창을 열어 빈민들을 구제했다. 황명으로 하남의 곡창(곡식창고)를 연 것이었다. 사실 급암의 행위는 황명을 사칭한 대역죄였다. 급암의 임무는 화재로 발생한 이재민을 구휼하는 것이지,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빈민을 구제하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급암은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면서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신은 칙령을 변조했습니다. 신을 처벌해주십시요.”
 그러나 무제는 백성을 먼저 구한 것을 “매우 현명한 처사”라며 용서해준 뒤 되레 영전시켰다.(<사기> ‘급정열전’)
 또 한사람의 ‘선지원 후보고’의 사례가 한소였다. 한소는 영(영)이라는 고을의 장으로 일할 때 흉년을 만났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그러자 한소는 상관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채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만일 이것으로 죄를 받는다 해도 괜찮다. 내 한 몸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린다면 웃음을 머금고 땅속에 들어가겠노라.(含笑入地)”(<후한서> ‘한소열전’)

 

 ■선지원 후보고
 조선 시대의 ‘급암’ 혹은 ‘한소’로 일컬어진 이가 바로 세종 연간의 인물인 ‘김숙자’이다.
 김숙자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생하자 왕명도 받들지 않고 군수물자(군량미)를 풀어 구휼에 나섰다. 이 역시 급암·한소의 예처럼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쓰러져도 문책이 두려워 왕명을 기다리던 다른 고을 수령이라면 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김숙자는 “백성에 마음을 두었는데, 어찌 법에 저촉될 것을 두려워 하겠느냐”며 예의 급암과 한소의 예를 들었다.
 “급암과 한소처럼 나도 만백성에게 마음을 둘 뿐이다. 어찌 법을 무서워하리오.”
 그런 뒤 군사까지 징발해서 빈민구제에 나서자 백성들이 감읍했다. 백성들은 추수 때가 되자 관의 독촉을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빌린 곡식을 앞다퉈 갚았다고 한다.(<해동잡록>)

 

 ■구휼제도의 비조
 사실 구휼제도의 비조(鼻祖)는 고구려 고국천왕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국천왕조’를 보자. 
 “194년(고국천왕 16년), 임금이 사냥 나갔다가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백성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날품팔이로 어머니를 공양해왔는데, 올해 흉년이 드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임금이 한탄했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닌가. 백성들을 이렇게 굶기다니….”
 고국천왕은 백성에게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러나 만약 측은지심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임시방편의 빈민구제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담당관청에 일러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구휼하라고 지시했다.
 “해마다 3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주어라. 백성의 가구수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대여’(賑貸有差)하라. 그리고 겨울 10월에 갚도록 하는 것을 정례(恒例)로 삼아라.”   
 이것이 바로 제도적인 빈민구제정책의 효시가 된 ‘진대법’이었다. 1회용 대책이 아닌…. 신라 문무왕의 빈민대책도 유명하다.
 “668년 고구려를 멸한 뒤 가난해서 남의 미곡을 빌린 자는 풍년 때 상환하도록(대곡환상·貸穀還償) 했다. 그러나 흉년피해가 심한 자는 이자와 원금을 모두 면제(자모구면법·子母俱免法)시켰다.”(<증보문헌비고>)
 고국천왕의 ‘진대법’과 문무왕의 ‘대곡환상 및 자모구면법’은 ‘사회복지정책의 신기원’이 됐다. 이후 고려와 조선은 ‘진대법’을 발전시킨 의창(義倉)·환곡(還穀)·사창(社倉)제도를 시행하는 등 빈민구제정책을 국정의 핵심 사안으로 삼았다. 그럴 만도 했다.

 

 ■백성을 깔본 죄
 군주의 복지마인드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었다. 백제 동성왕 이야기다.
 “499년(동성왕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비극이 생겼다. 도적이 들끓었다.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규제하자고 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구려로 도망가는 자가 2000명이 됐다.”(<삼국사기> ‘동성왕조’)
 복지마인드 부재가 백성들의 망명을 부추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501년, 동성왕은 신하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백성들을 팽개친 벌을 받은 것일까.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고려 국왕들의 대책도 만만치 않았다.
 1006년(목종 9년), 가을에 곡식이 익지않아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자 목종은 3년 전부터 미납된 공물과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 창고를 열어 진휼해주었다. 흉년이 극심했던 1298년(충렬왕 24년), 왕은 반찬을 줄이고 도토리를 먹었다. <동사강목>은 “충렬왕이 여러 도의 안렴사(지방순회장관)들을 불러 백성의 구휼문제를 거론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먹여 보냈다”고 기록했다.
 1348년(충목왕 4년), 서해 2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은 진제도감을 설치했다. 충목왕은 특히 음식 가짓수를 줄여 비용을 보충하고, 1만3000석을 백성들에게 풀었다.

 

 ■가렴주구의 온상 된 환곡제도
 그러나 고국천왕 때부터 구축한 복지시스템은 조선 후대에 들어오면서 되레 가렴주구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한 조선 환곡제도의 원칙은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걷고(春貸秋斂)’, ‘절반은 창고에 남겨두는(折半留庫)’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구제책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 창고에 둔 곡식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대책도 됐다.
 그러나 이 좋은 뜻이 크게 변질됐다. 가을에 10분의 1일 더 걷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황당하다. 창고에서 ‘쥐와 참새’ 때문에 줄어든 양을 10분의 1로 임의 계산해서 그것까지 백성들에게 내라고 한 것이다. 그런 계산이 해마다 이어지면 백성들의 이자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또 필요하지도 않는 곡식을 강제로 백성들에게 빌려준다는 것도 문제가 됐다. ‘절반은 창고에 남겨둔다’는 규정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니 이자 부담은 늘고, 봄에 묵은 쌀을 받아 가을에 새 쌀로 갚아야 하는 이중삼중의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그러니 ‘가을에 환곡을 거둬들이면 마을이 텅 빌 정도’(<성호사설>)였다. 영조 연간(1779년)에 환곡제의 폐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 병조참지 박효삼는 ‘환곡이 백성들을 죽인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환곡을 설치한 까닭은 빈민구제와 군량저축인데…. 곡식 환모(이자로 받는 곡식)이 점점 불어나니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해 달아납니다. 그 때는 이웃사람과 친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게 되는데…. 고을을 두루 수색하여 항아리에 간직한 곡식도 바닥내 버립니다. 그러니 굶주린 백성들이 ‘환곡이 우리를 죽이는구나’하고 울부짖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복지시스템을 갖췄다 해도, 결국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였던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