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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억울한 여인을 죽인 세종의 잘못된 판결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대명률>·‘형률·범간조(犯奸條)’)

1637년 명나라가 제정한 <대명률>이다. 조선도 이 <대명률>에 따라 성범죄나 성희롱을 엄단했다. 보기에도 무시무시하다. 강간범은 교수형에 처하고 미수범이라도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받았다니…. 욕정을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성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1404년(태종 4년)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그들의 처남인 박질이 능지처사의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주인집 딸을 집단 성폭행한 죄였다. 피해자(내은이)는 손발이 묶인 채 밤새도록 반항했으나 그만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또 있다.

“11살 어린 아이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태조실록>1389년 윤 5월16일)

“철원 사람 정경이 처녀 연이를 강간하려 밤새도록 때렸으나 연이가 완강히 항거하다 죽었습니다. 청컨대 정경은 교수형에 처하고, 연이는 정문(旌門)을 세워 그 정절(貞節)을 표창하게 하소서.”(<세종실록> 1429년 11월 27일)  

 

조선시대에는 강간 미수범에게도 장 100대에 유배형 3000리의 중형이 내려졌다.

■성희롱으로 인정되어도 장 80대

이런 일도 있었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최한경이 장 80대의 엄벌을 받는다. 죄는 지금으로 치면 성희롱죄였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성균관 옆 냇가에서 옷을 홀랑 벗고 목욕을 하다가 여종 2명을 데리고 지나가던 앳된 부인을 갑자기 끌어안았다. 부인과 여종들이 완강히 반항했다.

최한경 등 3명은 여종들을 때려 쫒아낸 뒤 완력으로 여인을 눌러 옷을 벗기고 욕을 보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부인의 입자(笠子)를 빼앗아 도망쳤다. 큰일을 당할 뻔했던 여인은 사헌부에 최한경 일당 ‘강간미수죄’로 처벌해달라고 고소했다. 유생들은 단지 “희롱을 했을 뿐 강간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사헌부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뒤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처벌을 내렸다.

만약 강간미수죄가 인정됐다면 <대명률>에 따라 장 100대와 유배 1000리라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누가 봐도 강간미수죄였지만 최한경은 강간미수와 성희롱의 경계선에서 장 80대로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사족(士族)의 부녀를 강간하려 한 전직 공무원은 ‘강간미수’임에도 노비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군수를 지낸 황우형이 그 오명의 주인공이다.

황우형은 한밤중에 사족의 부녀인 반씨의 방에 들어가 강간을 하려다가 반씨의 어머니와 종이 막아서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성종은 ‘죄질이 좋지 않다’는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황우형의 적첩을 거두고 영원히 등용하지 않으며,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내린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 처벌 또한 부족했던 것일까. 황우형은 변방 중의 변방인 회령의 관노(官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성종실록> 1472년 4월13일)) 

 

■사면령에도 빠진 강간죄

강간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다.

국가의 경사 때 종종 행했던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되지 않았다. 예컨대 성종임금은 1471년 1월24일 20살의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를 의경왕으로 추서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중죄를 나열했다.

“24일 새벽녘 이전에서부터 모반(謀反)·대역 모반(大逆謀叛)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염魅)한 것과, 강간·강도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강간범은 교수형의 극형이 내려졌다.

■아들을 고발한 선조임금

임금의 아들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1600년(선조 33년) 7월 16일 선조 임금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지엄한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아들인 순화군 이보(1580~1607)를 법에 따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이보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다. 여러 차례 살인을 했고~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 할 뿐이었다.~오늘 빈전의 곁 여막(무덤을 지키려고 옆에 지어놓은 초가)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를 겁간했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대신들을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선조실록>)

 신하들이 “골육 사이의 정이 있으니 화를 참으시라”고 말렸지만 선조는 단호했다.

 “상중의 백주대낮에 궁인(宮人)을 겁간한 자식을 용서할 수는 없다.”

 결국 아버지 선조임금은 아들 순화군 이보를 유배형에 처함과 동시에 녹안(錄案)의 결정까지 내린다.(7월20일) 유배형은 강간죄, 녹안은 <경국대전> ‘금제조’의 조항, 즉 “사인(士人)으로서 패륜행위를 한 자는 녹안한다.”는 각각 따른 것이다. 녹안은 범죄사실을 기록하는 처벌이다. 한마디로 전과기록이므로 순화군으로서는 치욕적인 처벌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가중처벌을 내린 것이다.

 

 ■욕을 본 여성이 자살하면 ‘열녀’ 대접

 그런데 조선시대 강간사건을 살펴보면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이 있다.

 강간을 당하거나 성희롱을 당한 여인이 자살할 경우 ‘열녀’라고 칭송한다는 점이다.

1737년(영조 13년) 창녕에 살던 17살 소녀 문옥이가 팔촌인 문중갑과 나무를 함께 하다가 성희롱을 당했다.

 문옥이가 “같은 성씨끼리 무슨 짓이냐”며 꾸짖고 옷소매를 떨치고 돌아왔다. 하염없이 울던 문옥이는 몰래 독약을 구해 마시고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은 소녀에게 “정절을 지켰다”는 이유로 정려문을 세워주었다.(<영조실록> 1737년 9월23일)

 1787년(정조 11년) 시냇가에서 쑥을 캐던 유학자의 아내에게 이웃집 남자가 달려들었다.최진경게 에 살던 권만세라는 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손을 잡고 강간하려 했다. 이씨는 죽기를 각오하고 반항했다. 권만세는 도망가고 말았다.

치욕을 당했다고 여긴 이씨는 손도끼로 오른팔을 자르고 목을 베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가까스로 이씨를 막았다. 이 사실은 암행어사의 서계로 조정에 알려졌다. 이씨는 ‘열녀’의 이름을 얻었고, 정려문이 세워졌다.(<정조실록> 1787년 4월 2일)

 정절을 지키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 했던 여인에게 상을 내린다? 일견 좋은 일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좀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정이 나서 자살을 독려하는 꼴이 아닌가?

 

 ■세종대왕은 과연 성군인가?

 이쯤해서 세종의 잘못된 판결 하나를 소개한다. 억울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간 세종의 잘못…. 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1436년(세종 18년) 임복비라는 여인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자.

 복비는 일찍 이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첩인 소근의 집에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소근의 아들, 그러니까 서형(庶兄)인 어연이 짜고 복비를 강간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된 것이다. 복비의 숙부는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으나 나몰라라 했다. 숙부는 복비의 임신사실을 알고도, 복비를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 박아생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했다. 복비로서는 뱃속의 아이가 큰일이었다.

숙부에게 “나중에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지만 혼인은 일사천리로 성사됐다. 혼인을 마친 복비는 신랑 박아생을 따라 길을 떠났다. 아이를 낳을 날짜가 임박한 복비로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거짓으로 신랑에게 말했다.

 “몸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숙부의 집으로 돌아가서 치료한 뒤에 시집으로 가겠습니다.” “병이 심하다”는 신부의 말에 신랑은 “좋다”고 했지만, 숙부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냐. 죽이 되 든 밥이 되 든 시댁에서 치료해라.”

 더 이상 묘책을 찾을 수 없던 복비는 도망가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을 강간해서 아이를 임신시킨 어연과 함께…. 두 남녀는 곧 체포됐다. 복비는 신랑을 버리고 내연남과 도망갔다는 죄로 교수형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복비의 종이 글을 올려 어연이 복비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남김없이 고했다. 조정은 복비의 일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임금과 황희 정승 등은 “나중에 둘이 도망을 갔지만 처음엔 복비가 거절했으니 사형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세종 임금은 “복비를 변방의 관비로 보내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하지만 형조판서 정연 등은 “복비가 절개를 지키지 않았으니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결국 세종도 그의 말에 따랐다. 이로써 복비를 교수형에, 강간범인 어연은 참형에 각각 처했다. 그리고 어연의 어미도 강간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했다.(<세종실록> 1436년 8월22일) 조카딸의 사정을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하고, 시집까지 보내려 한 숙부는 변방의 군인으로 삼아 내쫒았다.

 이 사건을 보면 분노가 치솟는다. 강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임신까지 당하고, 거기에 억지결혼, 그리고 퇴로 없는 도피행각…. 그녀가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와 도피를 벌인 게 크나큰 죄라고? 그렇다면 그 아이까지 밴 그 기구한 여인이 대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여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극형을 결정한 세종대왕은 과연 만고의 성군이 맞는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