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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판다 외교와 코끼리 외교

 ‘판다외교가 재개됐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국빈 방문하면서 판다 한 쌍을 도입하기로 햇다.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때 체결한 양해각서에 따라 기증된 따오기에 이어 두번째 동물외교이다.
 중국이 이른바 ‘판다외교’를 펼친 예는 많다.
 1941년 12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한쌍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반일전선 구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보낸 미국 정부를 향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석구너한 이후에도 판다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톡톡해 해냈다. 예컨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방문 때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연회장 플래카드 위에 걸린 한 점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닉슨 대통령에게 말을 건냈다고 한다. 대나무 잎을 뜯어먹고 있는 판다 그림이었다.

 1994년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해 중국측이 임대해준 판다 밍밍과 리리 부부. 1998년 외환위기 때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선물이 아니라 임대
 “저 두 마리를 당신에게 선물로 보내겠습니다.”
 총리의 약속대로 판다 암컷 링링(娘娘)과 수컷 싱싱(星星)은 ‘중미 수교의 특사’로 미국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보내졌다. 링링과 싱싱은 역사적인 중미 수교의 상징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링링과 싱싱은 그다지 행복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세를 남기지도 못했고, 부인 링링은 1992년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혼자 남은 싱싱 마저 1999년 11월 고령에 따른 심장질환 합병증으로 안락사되고 말았다. 판다의 평균수명(15살)보다 13년 정도 더 장수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을 뿐이다. 대나무 죽순만 먹고 사는 판다는 중국의 고지대에서만 1500~1600마리 정도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멸종 위기 희귀종이다.
 1983년부터는 판다외교의 형태가 바뀌었다. 워싱턴 조약 발효로 희귀동물을 다른 나라에 팔거나 기증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을 받고 장기임대하는 형식으로 판다외교가 변화한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판다외교’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누누이 강조하듯 아무런 조건없는 ‘선물’이 아니라 ‘유상 임대’ 형식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판다 50여 마리를 미국·일본·벨기에 등에 임대형태로 선물한 바 있다.      
 사실 한국을 향한 판다외교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4년 중국이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 ‘밍밍(明明)’과 ‘리리(莉莉)’를 임대 형태로 선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판다를 임대하고 관리하는 문제는 보통 일이 아니다. 판다 전용 축사를 세우고, 중국인 전용 사육사를 둬야 한다. 초기비용만 100억원이 훨씬 더 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판다 한 쌍을 들어오는데 필요한 공식 임대료만 1년에 100만 달러씩 꼬박꼬박 내야 한다. 이 비용은 ‘판다 연구비’라는 이름으로 중국 정부 산하 야생동물보호 관련 협회에 지급돼 멸종 위기의 희귀동물인 판다의 번식을 연구하는 데 쓰인다.
 당시 에버랜드로 임대된 ‘밍밍과 리리’는 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중국에 반환되고 말았다.

 

 ■코끼리 유배사건
 동물 외교의 예는 옛 문헌에도 심심찮게 나온다. 예컨대 1413년(태종 13년), 진풍경이 일어난다.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되지만….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병조판서 유정현이 이른바 ‘코끼리의 유배’를 진언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그런데 코끼리가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참극을 벌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자극을 받은 코끼리가 그만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관리 비용’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던 코끼리였다.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댔기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해진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그런데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처럼 먹지않습니다. 그러기에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상소문을 받아본 태종 임금조차 ‘울컥’했다.
 “불쌍하구나. 코끼리를 풀어주어라.”
 임금의 명에 따라 코끼리는 유배지에서 풀려 육지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코끼리의 운명은 기구했다.
 한번도 너무 많이 먹어치우는 바람에 관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에컨대 6년 뒤인 1420년(세종 2년) 전라도 관찰사는 “너무 많은 먹이를 축내 백성들이 괴롭다”면서 이른바 ‘순번 사육’을 제안한다. 전라도 뿐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도 문제의 코끼리를 교대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상왕(태종)은 잔라관찰사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를 떠돌며 사육 당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떠돌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스트레스를 받은 코끼리가 또 사고를 쳤다. 1421년(세종 3년), 충청도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던 사육사가 그만 코끼리에 채여 사망하고 만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다.
 “코끼리는 나라에 유익한 동물이 아닙니다.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은 됩니다.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 먹는데, 1년으로 치면 쌀 48섬, 콩 24섬입니다. 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 도리어 해만 끼칠 뿐입니다. 다시 바다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소서.”
 상소를 들은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두라”고 명한 뒤 신신당부한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1972년 중 미 수교 때 화합의상징으로 보냈던 판다 한 쌍. 그 중 암컷인 링링은 1992년 죽었고 수컷 싱싱만이 살았지만 1999년 심장합병증으로 안락사했다.  

 ■공작새 유배사건의 전말
 코끼리 뿐이랴. 외교선물로 바친 공작새가 유배를 떠나야 했던 사연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의 일이었다.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밀명에 따라 조선을 방문하고 있던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가 공작 1쌍과 조총, 그리고 창과 칼 몇 점을 바쳤다. 조선 조정은 생전 처음보는 조총은 환영했지만, 공작새 선물은 ‘계륵’이었다. 조정은 공작의 처리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허성 같은 이는 ‘공작은 돌려보냄이 옳다’면서 나름의 묘책을 냈다.
 “일본 사신에게 말씀하십시오. (성의는 가상하지만) 내(선조)가 원래 진금(珍禽)을 좋아하지도 않고 조선의 풍토에도 맞지 않으니 되돌려 보낸다’고…. 그러면 외교적인 결례는 범하지 않을 것인데….”
 선조는 “그 말이 맞지만, 저들이 공연한 의심을 하면 안될 것”이라고 고개를 내젓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궁여지책을 내놓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일본 사신(종의지) 일행이 떠난 뒤를 기다렸다가 공작을 제주도로 보내라.”
 그러나 예조는 “공작을 제주까지 수송하기는 어렵다”는 간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렇다면 공작을 ‘수목이 울창한 남양(고흥)의 외딴 섬’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공작새 유배사건’이다.

 

 ■동물외교를 마냥 환대할 수 없는 이유
 옛날 군주들이 외국의 ‘동물사절’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토종이 아닌 해외의 진귀한 짐승에 빠지면 뜻을 상하게 되고 나라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옛날 주나라 무왕의 고사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은(상)을 멸하고 새왕조(주나라)를 창조한 무왕에게 각국의 외교사절이 선물을 바쳤다. 그 가운데 서방의 소국인 서려(西旅)가 오(獒)라는 명견(名犬)을 바쳤다. 하지만 태보인 소공 석은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글을 지어 바친다.
 “개와 말은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잘못하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旅獒)’)
 진기한 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간언에 따라 무왕도 일절 진상동물을 받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들도 외국에서 보내온 진금기수(珍禽奇獸)를 100% 환영할 수 없었다.

 

 ■연산군의 반전매력
 예컨대 성종 임금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내가 바로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1478년·성종 9년)
 연산군도 그랬다. 1502년(연산군 8년) 일본이 암원숭이를 바쳤다. 그 때 연산군은 ‘주 무왕의 일화’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받지말라”는 명을 내린다.
 “일본이 예전에(세조 때의 뜻함) 앵무새를 바쳤는데 이 앵무새는 값만 비싸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지금 또 암원숭이를 바치고자 하는데 도로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점잖게 타이르라.”
 세조 때 일본이 바친 앵무새는 무려 명주 1000필의 값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받은 앵무새의 가격이 비싼만큼 조선도 일본에 그만큼의 하사품을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그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외교 결례이며 자칫하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면서 “암원숭이를 받아야 한다”고 간한다.
 “진상품을 받지 않으면 대국(조선)으로서 먼나라(일본) 사람들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성준) “요즘 대마도 왜인들의 원망이 많은데 만약 원한을 품고 돌아간다면….”(이극균) 
 백성들의 삶에 되레 해를 끼칠 뿐이라는 임금과, 외교적인 결례로 자칫 분쟁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간언하는 신하들…. 과연 폭군이라는 연산군 시대, 그것도 말년의 일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만부교 상상도.

  ■지금도 미스터리인 만부교사건
 ‘동물외교’는 그리 간단한 외교문제가 아니었다. ‘동물외교’에 잘못 대웅해서 온 나라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예도 있으니까…. 
 고려 태조 왕건 시기에 일어난 ‘만부교 사건’이 그것이다. 942년 10월, 신흥강국 거란이 태조 왕건에게 3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냈다.
 그러나 태조가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거란의 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에 귀양보내는 한편, 낙타 50필을 송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만든 것이다. 태조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거란은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 갑자기 옛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다. (거란의)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으면 안된다.”(<고려사절요>)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는 단교했으며, 고려는 결국 3차례에 걸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만부교 사건은 당대는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논란을 불어일으키는, ‘의아한’ 외교분쟁이다.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 1308~1313)도 이제현(1287~1367)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임금이 낙타를 수십마리 정도 키운다고 해서 그 피해가 과연 백성들에게 이를까. 그저 낙타를 돌려보내면 될 일을 태조께서는 왜 굶어죽였는지 모르겠구나.”
 당연히 생기는 궁금증이었으라. 이제현도 충선왕의 송곳질문을 듣고 대답이 매우 궁했던 것 같다.
 “후세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현의 말마따나 태조 왕건의 ‘숨은 뜻’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 외교사절 자격으로 온 낙타 50마리를 굶어죽임으로써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티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