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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400년 만에 현현한 허준 선생의 체취

 “‘陽平○ ○聖功臣 ○浚.”

 1991년 7월 어느 날, 민통선 이북에서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서지학자 이양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양천 허씨’의 족보에서 시선을 잡아끈 허준 선생의 무덤 위치, 즉 ‘파주 장단 하포 광암동 동남’이라는 구절에 ‘꽂혀’ 10년 가까이 찾아 헤매던 때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허준 선생’의 묘임을 입증하는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두동간 난 비석이었다.(지금의 소재지는 경기 파주시 진돔면 하포리)

 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란 수식이 붙었을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민통선 이북에서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 지금은 민간인들이 선생의 묘를 친견할 수 있다.  

  ■허준의 현현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런 말이 퍼지자… 명망 진신(縉紳)들이 보신에만 뜻을 품고… 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이 17인, 환관 수십인, ‘어의 허준’, 액정원 4~5인, 사복원 3인 등만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명철보신한 사대부와 달리 허준은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이다. 선생이 호성공신(扈聖功臣)과 함께 양평군의 작위가 내려진 것이다.

 불후의 명작인 <동의보감>을 쓴 허준 선생이 이렇듯 극적으로 현현한 것이다.

출생연도와 출생지, 그리고 유배지와 사망지까지 모두 논쟁의 대상이었던 허준 선생…, 아마도 서자(庶子)였던 한계 때문에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인물이었기 탓이겠지.

 아니 민통선 이북에 있었던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 때문이리라.

 허준 선생은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과 그의 소실인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서자였다는 뜻이다. 어머니 김씨는 당대의 명관인 김안국(1478~1543)·김정국(1485~1541)의 사촌이자 서녀였다. 그러니까 김안국·김정국은 허준의 5촌 내종인 사이였다.

 허준은 어렸을 때부터 의학 신동이었다. 역대 의학자들의 전기인 <의림촬요>는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렸을때부터 학문을 좋아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선생은 이 천재성을 바탕으로 ‘독학으로’ 의학공부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아직 관직에 나서지 않았던 허준이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시켜 주었다(1569년)는 내용이 나온다.

 유희춘(1513~1577)은 그런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천거했다. 당시 31~33세 정도였던 허준은 내의원 첨정(종 4품)으로 일하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보건북지부 서기관(과장급)과 이사관(국장급) 정도 될까. 서자 출신으로서는 그것도 파격적인 출세였다. 

‘陽平○ ○聖功臣 ○浚'라고 새긴 명문 비석이 발견됨으로써 동의보감의 저자이자 의성이라 추앙받는 허준선생의 묘소임이 입증됐다.허쥰묘

 ■세자의 마마를 고치다

 하지만 임금의 주치의로서의 허준은 ‘아직’이었다. 그는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음으로서 대박출세의 길을 겼는다.

 즉 1590년(선조 23년) 세자와 공주, 옹주 등의 두창(마마)를 성공적으로 치료한 것이다.

 사실 홋날 광해군이 된 세자가 두창에 걸리자 선뜻 나서는 의사가 없었다.

 우는 아이도 ‘호환 마마’를 말하면 뚝 그친다는 말이 있듯, 두창은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자랑(?)’하는 악명높은 질병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두창(마마)을 평생에 한번쯤은 반드시 겪여야 할 질병으로 여겼고, 약을 쓰기보다는 무속의 힘으로 치료하려 했다.

 예컨대 태종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두창을 앓아 위독해지자 태종 임금은 점쟁이들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태종실록> 1418년 1월26일)

 이 때 ‘길하다’는 점좨가 나왔지만 성녕대군은 속수무책으로 죽고 말았다.

 어의들은 이 때 “창진(두창)이 발생하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려있다”고 약 한 번 제대로 쓰지 않았다. 광해군이 두창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조임금은 “세자에게 약을 쓰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미 왕자 두 명을 두창으로 잃었던 터라 임금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문책이 두려웠던 의원들은 입을 닫고 말았다.

이 대 허준이 나섰다.

 “왕자가 또 이 병(두창)에 걸렸는데, 모두들 약을 써서 문책을 당할까 가만히 있어서 (왕자의) 병이 악화됐지만 (중략) 신이 약을 세 번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언해두창집요>)

 실패했다면 문책이 두려웠던 상황. 그러나 허준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처방을 내려 왕자(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것이다. 이 때 허준이 쓴 두창약이 저미고(猪尾膏)였다고 한다. 즉 작은 돼지꼬리의 끝을 찔러 피를 낸 뒤 용뇌(龍腦) 1돈과 말아서 팥알만큼 잘라 만든 것이다. 허준은 이 공로로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다.

 

 ■임금의 병도 쾌도난마로 고치다 

 속수무책인 병은 없다고 생각한 허준의 ‘승부수’는 임금에게도 적용됐다.

선조는 어렸을 때부터 장병치례가 심했다. 여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까지 겪으면서 ‘멘탈’에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던 것 같다.

 이런 증세는 승하할 때까지 계속됐다. 허준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대충 처방하던 다른 어의와 달리 더욱 강한 약을 처방함으로써 ‘죽음을 두려워 않고’ 죽어가는 임금을 살리려 했다.

다른 문관과 의관들의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보통의 약으로는 회복할 가능성이 없자 극약처방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렸다.

 “성후의 미령하심이 봄부터 겨울까지 계속되니 약을 쓰는 것이 긴요하고도 중대합니다. 그런데 양평군 허준은 수의(首醫)로서 자기 소견을 고집하여 경솔하게 독한 약을 썼으니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평군 허준은 수어의로서 약을 의논함에 있어 마땅함을 잃어 너무 찬 약재를 함부로 써서 성후가 오래도록 평복하지 못하였으니…”(<선조실록> 1607년 11월13일)

 앞서도 인용했듯 허준만큼 임금을 보필한 이는 없었다. 이는 주치의로서 임금만을 바라보고 임금의 병만을 고치려 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어떤 정치적인 계산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가웠다. 앞서 인용했듯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잘 보필했다는 공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선조의 병세가 호전되던 1606년 보국숭록대부(정 1품)로 올라가자 질시가 극에 달했다.

 “허준이 약간의 노고가 있다고 하지만 어찌 적격자가 아닌 사람에게 ‘보국숭록대부’라는 자리를 주어 후세의 웃음을 사려 하십니까. 의관이 ‘숭록(崇祿)’이 된 자는 전례 없는 일이고, 그마저 외람된 일인데, 여기에 ‘보국(輔國)’은 또 웬말입니까.”(<선조실록> 1606년 1월3일조)

 선조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그럴 수 없다’고 버티다가 그만 3일만에 취소하고 말았다. 그만큼 집요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허준을 믿었던 선조가 1608년 2월1일 승하하자 허준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수어의 허준의 약처방 때문에 임금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악평을 들은 허준은 “밍령된 처방으로 임금이 승하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쓴 것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원래 허준 편이었다. 왕자 시절 허준의 처방으로 두창에서 회복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허준은 정치싸움의 희생양이 됐다. 당시 내의원의 의학 책임자는 허준이었다. 하지만 내의원 약방의 도제조(최고 책임자)는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이었다. 유영경은 선조 말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다가 광해군 즉위와 함께 대북파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이 와중에서 대북파는 유영경 탄핵을 위해 허준을 먼저 ‘망령되게 약을 썼다’고 한묶음으로 공격한 것이다. 

불후의 의학서 <동의보감>. 동의보감의 가장 큰 덕목은 백성을 향한 가없는 마음씨이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다

 그러나 광해군은 허준을 끝까지 비호하려 했다. 빗발치는 탄핵 상소에도 “허준의 의술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라 변호했다. 광해군은 허준을 남해 먼바다가 아니라 선왕(선조)와의 추억이 깃든 의주로 보냈다.

 대간들은 “허준을 위리안치(圍籬安置·출입을 제한하는 형벌)시키라”고 아우성 쳤다. 그러나 광해군은 1년 8개월만인 1609년 허준을 방면한다.

 “허준은 호성공신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병이 많다. 그렇지만 내의원에 노련한 의사가 없구나. 귀양살이가 길었으니 이제 그의 징계를 풀어줌이 마땅하다.”(<광해군 일기> 1609년 11월22일>)

 허준의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동의보감>을 비롯한 수많은 의학서를 저술한 것이다.

 그는 약 7종의 의학서를 저술했는데 <동의보감>을 비롯해, <천도방론맥결집성>과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등이다.

 이가운데 벽역신방은 동아시아 3국을 통틀어 성홍열과 유사질환을 구분해낸 최초의 성과를 담은 의학서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르고 정확한 홍역연구서로 꼽힌다.

 그러나 가장 혁혁한 성과는 역시 <동의보감>의 저술이다.

 선조는 1596년(선조 29년)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는 명을 허준에게 내린다.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병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쉽게 치료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알맞고 믿을 만한 의서를 편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허준은 1610년까지 무려 14년간 집필에 전념,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86종의 의서를 참고한 이 책은 25책으로 구성돼있고, 1212종의 약에 대한 자료와 4497종의 처방을 수록했다. 모두 86종의 국내외 외서를 정리했기에 임상의에게는 더없는 필독서가 됐고, 조선의학의 수준을 중국과 일본에 알렸다. 특히 백성들에게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이 땅에서 나는 637개 향약(鄕藥)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잇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동의보감>을 저술한 참뜻이 아니겠는가.

 어떤가. 지금 이 순간 여름휴가를 맞았다면 이 고즈넉한 허준 선생의 자취를 밟아보는 것은 어떨까. 시끌벅작한 휴가지 말고…. 한번 권해보고 싶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