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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공자왈' 판결의 두 얼굴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얼마 전 서울고법 형사 6부 김상환 부장판사가 국정원의 대선개입의혹 사건 항소심에서 매우 흥미로운 판결문을 썼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유명한 ‘자왈(子曰·공자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즉 <논어> ‘위정’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 즉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김 판사는 이어 “이단(異端)에 대한 공격과 강요가 결국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라고 했다.

세상을 등진채 밭을 갈고 있는 은자에게 길을 묻는 공자와 제자들을 그린 그림. 공자는 끊임없이 세상에서 쓰임받기를 원했다. 도가는 그런 공자에게 세상의 미련을 끊으리고 했다.

 ■어느 판결
 그런데 말이다.
 김상환 판사가 인용한 ‘공자님 말씀’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견강부회되었던 논쟁의 ‘자왈(子曰)’이다.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공(攻)’자를 공격이나 비판의 의미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전공하고 힘쓴다는 뜻으로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전하기 때문이다. 또 ‘이(已)’자를 ‘…일 뿐이다’의 의미로 볼 지, 아니면 ‘그치다(已)’의 뜻으로 볼 지도 논쟁적이다.  
 그러니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먼저 김상환 판사의 인용대로 ‘이단을 공격하면(攻) 해로울 뿐(已)’이라는 해석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이단을 공격하면(攻) 해로움이 그친다(已)’고도 할 수 있으며, ‘이단을 전공(攻)하면 해로울 뿐(已)’이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공자님의 말씀을 두고 이 무슨 헷갈리는 해석이란 말인가.

 

 ■攻은 공격인가, 전공인가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김상환 판사가 인용한 ‘공자님 말씀’의 해석은 고금의 역사에서는 ‘소수 의견’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다수 의견’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주자의 주석(주자의 <논어집주>)을 따른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이자 주자학을 집대성란 주자(1130~1200)의 주석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쉽게 토를 달을 수 있었을까. 주자는 우선 북송의 학자 범조우(1041~1098)의 ‘공(攻)은 전공한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맞다고 찬성했다.
 즉 <주례> ‘고공기’에 “나무 다루기를 전공하는 공인과 쇠다루기를 전공하는 공인이 있다.(有攻木之工 攻金之工)”는 구절이 있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공(攻)이 바로 ‘전공’, 혹은 ‘전념’의 뜻이라는 것이다.
 주자는 이어 “이단(異端)은 성인의 도(道)가 아닌 양주와 묵적 같은 것”이라 했다. 양주(기원전 395~335)와 묵적(기원전 480~390)이 누구인가. 양주는 개인주의(이기주의), 묵적은 겸애주의(이타주의)를 주장한 제자백가였다.
 맹자는 이를 두고 “양주는 부모를 업신여기고(無父), 묵적은 임금을 도외시한다(無君)”면서 “양주·묵적을 배격해야 성인이 되는 것”이라 한 바 있다.

송시열, ‘주자명언(朱子名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일직(一直)이란 글자일 따름이다’이라는 내용이다. |셩균관대 박물관 소장

 ■이단의 실체는
 주자는 바로 “이렇게 무부·무군의 지경에 이르게 한 양주·묵적을 ‘전적으로 연구하고 정밀히 알고자’(攻)하는 것은 극심한 해(害)가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자는 이어 정자(程子)의 ‘불교는 양주·묵적보다 더 이치에 가깝기 때문에 그 해가 더욱 극심하다’고 주장도 받아들였다. 즉 도교는 물론이고, 이치와 더욱 가까워 세상을 미혹시키는 불교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극력 배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주자의 주장은 맹자를 존숭하고 도·불교를 배척한 당나라 시대 유학자인 한유(韓愈·768~824)의 입장과 궤를 함께 한다.
 한유은 당나라 말기에 불교와 도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불·도교를 이단으로 규정, 맹비난한 유학자이다.
 “노(자)·불(교)을 막지 못하면 유가의 도가 전해지지도, 행해지지도 못한다. 그들의 거처를 민간의 집으로 만들고, 노·불의 책은 불태워 없애야 한다.”

 

 ■시험 예상문제
 하지만 이 ‘공자님의 말씀’을 두고 고금을 통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꽤나 있었다. 수군거림도 많았다.
 공자가 ‘전공하면~’이라는 단서를 단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속출한 것이다.
 ‘이단을 전공하면(攻) 해로울 뿐(已)’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전공하지 않고 그냥 대충 공부하면 괜찮다는 것이 아닐까. 이 대목은 유학자들도 쉽게 풀 수 없는 의문점이었던 같다.
 예를들어 조선 후기의 문인인 윤기(1741~1826)는 임금 주관으로 치를 예정인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대비하려고 3가지 예상문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예상문제 가운데 공자님의 ‘공호이단 사해야이’가 있었다.    
 “주자는 왜 ‘이단을 전공하면 안될 뿐’이라 해석해놓고는, 다시 ‘전공해서도 안되고, 대충 알아도 안된다’고 했을까. 왜 말이 다를까.”(윤기의 <무명자집>) 
 윤기는 주자가 <논어집주>에서는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놓고, <주자어류>에서는 “이단을 전공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대략 이해하는 것도 안 된다.(不惟說不可專治 便略去理會他)고 달리 말한 것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윤기는 이런 문제가 만약 출제되면 어떤 논리로 답안을 작성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윤기 같은 유학자도 그 심오한 뜻을 알기 어려웠던 알쏭달쏭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단은 멀리해야 한다
 한말 유학자 유중교(1832~1893)는 나름 이렇게 풀이했다.(<성재집> ‘왕복잡고(往復雜稿)’)
 즉 공자가 ‘이단’을 외친 춘추시대에는 이단이 막 시작할 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익을 좇아 해로운 줄 모르고 전공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을 바라고 이단을 전공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익하고, 해가 될 뿐”이라는 의미에서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외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공자께서 “전공한 후에야 해가 된다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랬다가 훗날 불가와 도가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정자와 주자 등이 적극 나서서 이단척결을 외쳤다는 것이다.
 정자(程子·정호·1032~1085)는 “마땅히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자처럼 멀리해야 한다.”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정자의 경우 평생 <장자(莊子)>와 <열자(列子)>를 아예 보지 않았을까.
 이에 주자는 더 나아가 ‘이단은 전공해서도 대략 이해만 해서도 절대 안된다’고 못박아버린 것이다.
 공자 말씀에 절대 움직일 수 없는 토를 단 것이다.

우암 송시열 영정.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단을 백안시하고 척결하고자 했다.|청주박물관 소장

 ■이단은 초전박살내야 한다
 조선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보라.
 그는 종질(5촌)이 윤휴(1617~1680)의 주석서인 ‘중용주’를 책상에 둔 것을 보고 앙앙불락했다고 한다.
 “그 따위 윤휴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너는 이전부터 내가 윤휴를 배척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감히 이런 글을 책상 위에 두느냐.”(<송자대전> 권84)
 그러면서 우암은 윤휴의 책을 땅에 던지고 꾸짖으며 눈앞에 스치지도 못하게 했단다.
 왜 그랬을까. 윤휴는 “천하의 학설은 한사람의 것이 아니며 주자의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다. 주자학을 벗어나 독자 학문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인물이다. 송시열은 바로 주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윤휴는 결국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사사된다.(1680·숙종 6년)
 송시열은 바로 그런 윤휴의 주석(‘중용주’)을 책상에 둔 것만으로도 ‘불경죄’를 저지른 것으로 백안시한 것이다.
 결국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라는 뜻을 ‘전공한 후에야 해가 된다’고 해석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대략이나마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크게 해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단은 초전박살돼야 하며, 소통도 필요없고 논란 및 논쟁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씨를 말려야 한다는 소리다. 무시무시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양주·묵적·노장·불가에 천주교까지
 어디 송시열 뿐인가. 1489년(성종 20년) 성종 임금이 화를 벌컥 냈다. 
 어느 과거응시생이 향시(鄕試)에서 ‘부처에게 제사를 지내 화(禍)를 물리칠 것’을 건의하는 답안지를 작성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성종 임금은 예의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하면서 “그 자를 추국해서 변방으로 내쫓으라”는 명을 내린다.
 “부처의 해를 알지 못하느냐. 유생이라는 자가 요·순의 도를 올리지 않고 불가의 법을 올리니 이 무슨 망발이냐.”(<성종일록> 성종행장)
 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1741∼1826)의 시문집인 <무명자집>을 보라. ‘이단’, 즉 천주교를 반박하는 대목이 있다. 먼저 윤기는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하면서 역대의 이단을 줄줄이 뀄다.
 “이단의 설은 많았다. 양주는 의(義), 묵적은 인(仁)에 가까웠다. 노장은 청정(淸淨)·무위(無爲), 불가는 적멸(寂滅)·돈오(頓悟)를 주장했다. 특히 불교는 천하의 도리에 더 가까웠다. 때문에 한·당 이래로 재주 많고 지혜 명민한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정자와 주자가 불가를 극력 논파해서 유가를 세운 것이다.”
 윤기는 이 대목에서 “(부모형제를 무시하고) 오로지 천주만을 섬기는 천주교는 이단 중에서도 이치에 어긋나기 짝이 없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천주학 책을 태워 버리고 천주학에 쏠린 마음을 씻어내야 하며 서양 오랑캐의 사설(邪說)에 현혹되어 유도(儒道)의 죄인이 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렇게 주자를 중심으로 후대 유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공자님의 말씀’은 ‘이단 공격’을 위한 경전 말씀이 되었다.

 

 ■이단은 농사와 병법 같은 것
 하지만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둘러싼 해석이 이같은 ‘이단 척결 몰이’라는 외곬수 논법만 있지 않았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의 유연한 해석을 보라.(다산의 <논어고금주>)  
 다산은 공자(기원전 551~479)의 시대에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양자와 묵자의 문호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즉 당시에는 오로지 공자의 가르침만이 일가를 이루기 시작했을 뿐, 유·불·선의 삼교가 정립됐던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산은 따라서 “공자가 이단을 전공하면 다만 해로울 뿐이라고 한 것은 가볍게 금한 것이지 큰 소리와 성난 말로 금한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마디로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이단은 요즘(조선 시대)처럼 죽기살기로 타도해야 할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번지(공자의 제자)가 농사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는 소인이라 여겼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군사의 진법에 대해 묻자 ‘군사의 일은 아직 배운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농사와 병법의 학문도 세상을 경영하는 데는 필요하지만 이 일만 전공해서는 신심과 성명의 학문에 ‘다소’ 해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그 폐단을 말한 것이다.”
 즉 다산은 공자가 말하는 ‘이단이란 병법과 농사 같은 것’이라 해석했다.
 일상생활에도 필요한 것이라 군자가 몰라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너무 그것에만 힘써 전공한다면 몸과 마음에도 좋지 않고 ‘천성과 천명’(유학)의 학문에도 ‘약간’ 해가 있을 것이라는 게 다산의 풀이였다.
 다산은 “이른바 ‘이단’이라는 것은 이와같은 것이 불과하다”고 했다.  

박세당의 짧은 편지. 박세당은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 구절을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라 해석했다.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이단은 타도대상이 아니다
 다산은 ‘이단’을 타도해야 할 원수로 보지 않은 것이다. 다산은 그러면서 주자의 일관되지 못한 설명을 지적했다.
 즉 주자가 왕상서(1119~1176)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는 것이다.
 “주자는 편지에 ‘지금 사설(邪說)의 해악을 미워해서 이것을 바르게 하려고 공격하면 스스로를 패배하게 만들 뿐’이라 썼다. 그런데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공호이단’의 공(攻)을 ‘전공한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편지글에서는 공을 ‘공격’이라 했다. 두 설은 다르다.”
 무슨 말인가. 주자는 <논어집주>에서는 공(攻)을 ‘전공한다’고 해석해놓고는 왕상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공격’의 의미로 썼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 대목에서 청나라 초기의 문인인 모기령(1623~1716)이 가졌던 의문점을 주석해놓았다.
 “공(攻)은 본래 공격한다고 할 때의 공인데, 주자가 <논어집주>를 내면서 어찌하여 전공한다는 의미의 ‘전치(專治)’로 해석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산은 공(攻)은 원래 ‘공격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 때문에 백성이 곤궁하다고?
 실학자 이익(1681~1763) 역시 유연한 주장을 편다.
 “이단 때문에 백성이 곤궁하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공자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는 했지만 엄중히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소도(적은 도)라도 볼만한 것이 있다고 했다.”(<성호사설> 14권 ‘인사문’)
 그는 “성군이 나오지 않고 승평한 정치가 이룩되지 못해 백성의 곤궁이 극도로 달했으니 그 원인을 보면 이단의 폐단만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세상이 말세가 되어 정사가 어지러운 데도 놀고 먹는 자가 있고 위력으로 토색질하는 자가 있어서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데 이것이 노자와 불가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고 꼬집었다. 

 

 ■사문난적으로 파문당한 박세당
 그런데 다산 정약용(1762~1836)보다 140년 전의 인물인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주자의 설을 더더욱 의심했다. 그는 사서삼경을 주해한 <사변록>에서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이렇게 풀이했다.
 해석 가운데는 ‘이단을 공격(伐)하면 해가 그친다(已)’는 뜻도 있고, 주자의 말처럼 ‘이단을 전공(攻)하면 해가 될 뿐(已)’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이단을 공격하면 해가 그친다는 말이나, 이단을 전공하면 해가 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알 일이다. 그런 말을 성인인 공자님께서 하셨겠는가.”
 서계는 이어 “또 이단인줄 알면서 전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다른 해석을 가한다.
 “공자께서 일찍이 ‘사람이 어질지 못한 자를 너무 미워하면 어지럽다’고 하셨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공자님의 말씀이 맞는 듯 하다. 비록 이단이라도 너무 지나치게 공격하면 도리어 해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서계는 뒤가 캥겼는지 이 말미에 “그러나 감히 반드시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다.
 그렇지만 서계는 결국 ‘사문난적’의 죄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의 <사변록>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예컨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1641-1721)는 아우 권상유(1656~1724)에게 이렇게 말한다.(<한수재 선생문집> ‘제20권)
 “주자가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공’을 해석하면서 전공의 뜻을 취하고 공격의 뜻으로 보는 설들은 모두 버렸다. 그런데 박세당이 되레 그것을 ‘공격’의 뜻으로 보는 설을 탈취해서 자기 견해로 삼았다. 한번 웃을 일도 못된다.”
 권상하는 “만약 이단을 공격하는 것이 해가 된다면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거절한 것도 도에 해가 된다는 말이냐”며 서계 박세당을 조롱하고 있다. 

주자학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하고자 했던 윤휴. 그러나 그는 사문난적의 죄를 뒤집어 썼다.    

 ■공자의 참뜻은
 이 대목에서 이런 생각은 든다.
 2500년 전의 시대를 산 공자가 아무렴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반목과 불통의 메시지를 전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춘추시대를 살아간 공자는 아마도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는 어찌됐을까.
 후대의 유학자들이 시대상황을 반영한 스스로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공자님 말씀에 저마다의 해석을 붙이게 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후대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메시지는 전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의 몫이 되는 것이다.
 <중용> ‘서문’에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선(善)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이를 가려서 그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선을 택해 그것을 고집하라’는 뜻에서 유교의 이단관을 반영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다산 정약용이 정산 김기서에게 보낸 편지(<다산시문집> 제19권)을 보라.
 “군자의 학문에 ‘택선고집(擇善固執·선한 것을 골라 굳게 지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래 정(精)한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른 것을 선택했는데도 이를 굳게 지키는 것을 덕으로 여긴다면…. 이런 문제는 번개나 바람처럼 빨리 고치지 못할까 두려워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선(善)을 택한다는 것은 바로 극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용을 택한다는 것이다. 또 ‘굳게 지킨다’는 것은 ‘잘 받들어 가슴 속에 두어 잃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위백규의 독후감인 <독서차의> ‘중용편’이다.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다.
 그나저나 하나 두려운 것이 있다. 혹여 어떤 판사가 나타나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 다른 견해와 사상을 이단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