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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탕탕평평 평평탕탕'

 ‘홍재(弘齋)’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 ‘만기(萬機)’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자신의 저작물에 찍은 장서인(인장) 71종을 분석한 논문을 보라.(김영진·박철상·백승호의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백성을 대하는 임금의 자세가 절절이 묻어난다.

정조가 즐겨 사용한 장서인 가운데 '만기' 인장이 눈에 띈다. 정조의 만기친람은 유명했다. 심지어 "'깨알지시'를 내리지 말아달라" "건강 좀 챙기라"는 대신들의 부르짖음에 정조는 "보고서 보는게 취미인데 어떡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김영진 외의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에서 

   ■침실 이름이 '탕탕평평실'

 우선 ‘홍재’는 “뜻을 크게(弘) 가져라”는 증자의 가르침을 새긴 것이다. 

   "증자는 말했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의 실현을 임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무겁고, 죽은 뒤에야 그만 둘 수 있으니 얼마나 먼 길이겠는가."(<논어> ‘태백’)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임금은 세상을 크고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뜻에서 ‘홍재’ 인장을 애용한 것이다.

  ‘만천명월주인옹’은 무슨 뜻인가.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또 자신의 침전 이름을 ‘탕탕평평실’로까지 지은 정조였다. 그랬으니 ‘탕탕평평평평탕탕’ 인장도 즐겨 사용했으리라.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서경> ‘주서·홍범’)는 옛말에서 나왔다.
 정조는 ‘정구팔황 호월일가(庭衢八荒 胡越一家)’라는 글자까지 침전 벽에 걸었다.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음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것이다.  

정조의 장서인 가운데 '탕탕평평평평탕탕' 인장도 눈에 띈다. 정조는 '탕탕평평', '정구팔황' 등

인재를 골고루 등용한다는 방침을 새긴 글귀를 금과옥조로 삼았다. 

   ■만기친람의 주인공

  정조의 애용 장서인 가운데 ‘만기’ 인장이 눈에 띈다. ‘만기’란 무엇인가. 예로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다.(<서경> ‘고요모’) 만기친람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천명을 받은 몸이기로소니 하루에 만가지 일을 어떻게 하는가. 정조가 바로 만기친람의 주인공이었고, 시쳇말로 일중독증환자(워커홀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컨대 1781년(정조 5년) 규장각 제학 김종수는 정조에게 “작은 일까지 너무 세세하게 챙기시며 정작 큰 일을 소홀하기 쉽다”고 꼬집는다. 정조의 만기친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동의하지 않는다.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다. 그것이 과인이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 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인 것이다.”
 정사를 처리하고 책을 읽느라 밤을 꼴딱 지새우기 일쑤였다. 정조와 심환지가 나눈 편지를 보라.
 “(바빠서) 눈코 뜰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眼鼻莫開 苦事苦事·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1799년 1월20일)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하자 정조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그리고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만천명월주인옹’ 장서인.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불멸의 뉴스메이커

   업무 보고서를 좋아하고, 그것을 읽으면 아픈 것도 잊는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랬으니 ‘만기친람은 임금의 숙명’이라고 여겨 ‘만기’ 혹은 ‘일일이일만기’ 등의 인장을 즐겨 사용했을 것이다.
 정조의 장서인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이른바 ‘독서유삼도안도구도심도(讀書有三到 心到眼到口到)’라는 긴 단어의 인장이다. 무슨 뜻인가. 독서를 함에 있어 삼도(三到)가 있는데, 눈과 입과 마음을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소리다. 이것은 주자가 말한 ‘독서법’에 나오는 말이다.(<주자독서법> 권 1 ‘강령’)
 “내(주자)가 일찍이 독서에 삼도(三到·세가지 도달하는 법)가 있다고 했다. 심도(心到), 안도(眼到), 구도(口到)가 그것이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눈으로 봐도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과 눈을 집중하지 않으면 소리를 내어 읽어도 기억하기 어렵다. 세가지 가운데 ‘심도’가 가장 중요하다. 마음이 도달하면 눈과 입은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정조는 그가 사용한 도장까지 화제가 될만큼 불멸의 뉴스메이커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