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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자리싸움, 눈싸움' 코미디 휴전회담

 

  이번 주 팟캐스트는 아주 먼 이야기 아닙니다. 지금부터 62년 전 이야기입니다. 7월27일은 3년 넘게 끌었던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휴전협정 발효로 끝난 날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무려 2년 전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이미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을 벌여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담은 지지부진했습니다. 그 사이 코미디 같은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회담장에서 자리싸움은 물론 2시간이 넘는 눈싸움까지 벌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유치한 싸움이었지만 좋게 말해 심리전이라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19개국 젊은이들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번 주 팟캐스트 주제는 ‘눈싸움, 자리싸움, 유치찬란한 휴전회담’ 이야기입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흔적의 역사> 블로그에 게재된 기사와 함께 팟캐스트를 들어주십시요. 

 

 “회담장에 입장한 유엔군측 연락장교단은 공산군측보다 먼저 남쪽을 향하고 자리에 앉았다. 공산측은 적지않은 동요를 일으켰다. 마주앉은 공산군측 연락장교단이 보드카와 맥주, 과일 캔디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유엔군측 연락장교단이 이를 거절했다.”
 1951년 7월8일, 1년을 훌쩍 넘긴 한국전쟁의 휴전을 위해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처음으로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본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었다.  

 

  1951년 7월10일 지프에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측 대표단. 백기를 단 것은 합의사항이었다. 하지만 공산측은 유엔군측을 항복사절로 선전했다. /눈빛출판사 제공


 ■“남면의 자리를 확보하라”
 회담장소는 개성 북쪽의 광문동에 자리잡은 민가였다. 전쟁 전에는 다방으로도 활용된 바 있었다. 회담에 임하는 양측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유엔군측은 회담장에 먼저 들어가 남쪽을 향한 테이블을 선점했다. 유엔군측 1승.
 동양에서 남쪽을 향해 앉는다는 것, 즉 ‘남면(南面)’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황제, 즉 천자가 제후를 거느리고 앉을 때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순(舜)임금이 우(禹)를 후계자로 삼은 지 70년 만에 붕어했다. 그런데 우는 제위를 순임금의 아들(상균)에게 양보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제후들이 모두 우에게 달려왔다. 그제서야 우는 천자에 즉위하고 남면(南面)하여 천하 신민의 알현을 받았다.”(<사기> ‘하본기’)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천자의 자리를 고사하다가 수락하면서, 남쪽을 향해 앉았다는 것이다. 또 있다. 
 “주나라 성왕 7년(기원전 1035년), (성왕의 삼촌인) 주공은 어린 성왕이 성장하자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북쪽을 향해(北面)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주공이 섭정했을 때는 남쪽을 향하고(南面) 병풍을 둘러 제후를 접견했다.”(<사기> ‘주본기’· ‘노주공세가’ 등)
 주공은 은(상)을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재위 기원전 1046~1043)의 동생이다. 창업의 스트레스 탓일까. 무왕은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3년 만에 죽었다. 무왕의 아들인 성왕이 즉위했다. 성왕은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 아이였으므로. 삼촌인 주공이 정권을 대행했다. 그랬던 주공이 7년의 섭정을 마치고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천자나 왕이 ‘남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주역(周易)>·‘설쾌(說卦)’는 “성인은 남면(南面)하고 천하의 정사를 들어, 해가 뜰 때까지 다스린다.(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고 했다. <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은 “임금이 남쪽을 향함은 양(陽)에 답하는 뜻이고, 신하가 북쪽을 향함은 임금에 답하는 것”이라고 했다.
 1573년 유희춘은 <서경> ‘우공편’을 강독하면서 선조임금에게 아룄다.
 ‘만물은 햇볕을 받아서 무성하게 됩니다. 임금이 남면(南面)하는 까닭도 햇볕을 받기 때문입니다.”(<선조실록>)
 한마디로 ‘남면’은 천자나 왕이 제후나 신하를 거느릴 때의 위치를 뜻하는 것이다.
 당연히 전쟁에서 이긴 승자가 남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동양의 관습을 유엔군 측 연락장교들이 어떻게 알고 외교전에 써먹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유엔군의 잽싼 ‘남면’ 작전에 허를 찔린 공산군 측은 슬쩍 ‘더듬수’를 둔다. 다과를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유엔군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음식을 권하는 것은 승자가 패자에게 주는 자비이고, 위로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특히 천자나 제후가 주는 ‘하사품’이라는 인상이 짙었기에 거절한 것이다. 유엔군측 2승.  

 

1951년7월8일 휴전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을 벌였던 개성의 광문동 민가. 양측은 첫 대면부터 팽팽한 심리전을 벌였다. /눈빛출판사 제공 

 ■‘마치 항복사절처럼…’
 이같은 유치찬란한 자존심 싸움은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 이틀 뒤(7월10일) 역사적인 본회담이 전쟁 전 고급요정이었던 개성 내봉장에서 열렸다.
 유엔군 대표단은 각자 작은 손거울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회담장이 적진인 개성이었기에 안전보장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여차하면 손거울로 유엔군 전투기에 신호를 보낼 참이었다. 공산군측의 심리전은 유엔군측을 자극했다. 유엔군 대표가 탈 지프는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더러운 것들이었다, 어떤 지프에는 유리창에 총알자국과 핏자국이 남아있기도 했다. 유엔군측 대표단의 차에는 커다란 백기가 걸려 있었다. 이는 유엔군측의 안전보장을 위한,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그런데 막상 백기 걸린 유엔군 행렬은 마치 ‘항복사절’ 같았다. 공산측은 대표단의 행렬이 판문점에 도착하자 기다리게 했다. 잠시 후 깔끔한 제복을 입은 북한군 장병을 태운 트럭 3대가 유엔군 대표단 행렬을 개성으로 인도했다. 트럭은 개성 시내를 천천히 돌았다. 트럭 위에서 ‘만세’의 몸짓을 하는 북한군과, 백기를 게양한 채 그 뒤를 따라는 유엔군 지프의 행렬….
 여기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공산측 카메라맨의 모습…. 이는 ‘항복 회담’에 임하는 유엔군 측의 모습이었다. 반면 공산측은 포로들을 이끌고 개선장군처럼 시내를 퍼레이드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 분명했다. 유엔군 측은 ‘뭔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1951년 7월10일 1차 휴전회담이 열린 개성시내. 앞의 건물은 1차회담 장소인 내봉장이다. /눈빛출판사 제공


 ■“먼저 발언하라”
 마침내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측 대표들은 예비회담 때처럼 북쪽의 테이블에 앉아 ‘남면’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산측은 두 번 다시 속지 않았다. 아주 정중한 태도로 유엔군 대표단을 남쪽 테이블, 즉 북면(北面)의 자리로 안내했다. 어쩔 수 없이 유엔군측이 북면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공산측의 2연승이었다.
 그런데 3번째 심리전이 이어졌다. 정식회담은 서로 기립한 채 신임장을 교환한 뒤 자리에 앉음으로써 개막되는 것이었다.
 유엔군 대표단장인 터너 C 조이 중장은 여기서 작전을 쓴다. 터너는 공산측에게 유엔측의 신임장을 넘겨 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공산측 수석대표인 남일 중장이 공산측 신임장을 내밀자 터너는 머뭇거렸다. 남일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터너 중장을 바라보았다. 터너 중장은 공산측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기다려 신임장을 받았다. 남일은 터너가 머뭇거리다 신임장을 받자 무심코 자리에 앉았다. 터너의 이상한 행동에 시선을 빼앗겨 집중력을 잃은 것이다.
 그 때였다. 신임장을 받느라 자리에 서있던 터너 중장이 잽싸게 개회사를 읽어 내려갔다. 유엔군측은 ‘승자가 먼저 발언한다’는 중국의 관습에 따라 발언순서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꼼수를 부린 것이다. 터너 중장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한방 먹였다’고 여겼다. 유엔군 1승2패.

 

 ■의자싸움, 깃발싸움
 터너가 ‘승자의 미소’를 흘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공산측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싸늘한 표정으로 유엔군측을 쏘아보는 남일의 얼굴이 아주 높아보였다. 남일 뿐이 아니었다. 작은 키의 공산측 대표들이 유엔군 측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특히 남일은 등을 한껏 곧추 세운 뒤 조이 중장을 내려다 보았다. 공산측이 유엔군 대표단 자리에 4인치(10㎝ 정도)나 낮은 의자를 놓았던 것이다.
 유엔군 대표단이 “무슨 짓이냐. 의자를 빨리 바꾸라”고 항의했다. 공산측은 “알았다”며 ‘쿨’하게 의자를 바꿨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공산측 사진기자가 ‘남면(南面)의 높은 의자에 앉아 패자를 깔보는’ 사진을 충분히 찍은 뒤였다. 공산측 3승1패.                
 오후 회담에서도 신경전이 이어졌다.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 대표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엔군측이 오전 회담 때 테이블 위에 작은 탁상용 유엔기를 놓아두었는데, 공산측이 어느새 탁상용 북한기를 놓아둔 것이다. 문제는 북한군 기가 유엔기보다 2~3인치나 더 큰 깃발이었다. 받침대와 깃대, 그리고 기의 끝장식이 조금씩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공산측 4승1패.  

 

 ■‘버럭은 금물이다.’
 공산측의 의도는 뻔했다. 휴전회담을 유엔군의 항복회담으로 전락시키려 한 것이다. 여기에 상대방의 화를 한껏 돋움으로써 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뜻이 분명했다. 사실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회담 개막에 앞서 회담장을 향하는 대표단에게 신신당부한 바 있다.          
 “(공산측의) 장황한 선전적인 연설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의무적으로 참고 견뎌야 한다. 현명한 방법은 모두 못들은 체 하는 일이다.~상대방에게 물러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동양인에게 지극히 중요하다.”
 인내심을 가지라는 것과, 상대방을 막다른 골목에 몰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회담이 개막되고, 공산측의 다양한 심리전이 계속되자 유엔군측이 흔들렸다. 실제로 유엔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알레이 버크 해군소장이 ‘울컥’해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버크는 ‘31노트 버크’라는 별명의 소유자였다. 2차대전 당시 버크가 구축함장이었을 때 그 함정의 최대속력이 30노크였다. 그런데 버크 함장은 ‘31노트로 돌격’이라고 호령했다,
 때문에 호전적이고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한 버크에게 ‘31노트 버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불같은 성격의 버크에게 공산측의 ’약올리기 전법’이 통한 것이다. 그러나 옆에 있던 조이 중장(대표단장)은 버크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귓속말로 한마디 했다.
 “인내해야 한다. 건드리는 것에 무시해라.”
 이렇게 아이들 싸움처럼 유치한, 그러나 결코 질 수는 없었던 힘겨루기로 시작된 휴전회담은 금방 난관에 봉착했다.  

 

 회담장에 나온 공산측 대표단. 유엔군의 애간장을 어지간히 녹였다.정 가운데가 공산측 수석대표인 남일이다.

 ■역사논쟁으로 비화
 공산측의 요구는 분명했다. 전쟁 이전, 즉 38도선 분단 상태의 원상회복을 주장했다. 38도선을 양측의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38도선은 전쟁 이전에 이미 모든 국가가 알고 있는 경계선이다. 이 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공산측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유엔군 측을 자극했다.
 “전쟁은 여행이 아니며, 부대는 관광객이 아니다. 휴전이 성립되고도 그 자리에 부대를 그냥 둔다? 그 의도는 뻔하지 않는가. 조선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라고 그 부대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유엔군 측은 공산측의 이런 주장을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했다. 공산측이 이미 38도선을 4번이나 횡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38도선은 군사분계선으로서 적합치 않다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오히려 휴전회담 당시(1951년 7월)의 전선보다 30~50㎞ 북쪽에 군사분계선을 설치한 군사지도를 공산측에 제시했다.
 “지금 유엔군 측은 육상에서는 한정된 지상진지를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공군은 전 한반도의 제공권을, 해군은 전 연안의 제해권을 갖고 있다. 만약 이 순간 휴전한다면 유엔군은 도리어 공군과 해군력을 제한받게 된다. 그러나 공산측은 (휴전 덕분에 유엔군의 압도적인 공군·해군력을 피하게 되므로) 좀 더 자유롭게 육상의 전투력을 증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공산측은 지상에서 마땅히 더 양보해야 한다.”
 즉 유엔군은 육·해·공군을 통합한 군사력의 우세로 협상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유엔군측은 “미국이 일본을 패전시킬 때 단 한 사람의 미군도 일본 본토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예를 들었다. 물론 공산측은 가소로운 제안이라며 일축했다.
 “미군이 일본을 패망시켰다고 하지만, 일본을 굴복시킨 것은 조선인의 투쟁과 중국인의 인민전쟁, 그리고 소련의 저항이었다. 소련이 가담하기까지 미국은 3년이나 패전을 거듭하지 않았는가. 어찌 역사를 부인할까?”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7월의 전선. 당시 공산측은 전쟁 이전의 분단선인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엔군측은 당시의 전선 보다도 훨씬 북쪽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회담은 공전할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전사편찬위


 ■2시간11분의 ‘기네스 기록감’ 눈싸움
 회담은 ‘역사인식’의 차이까지 드러냈다. 여름철 후텁지근한 무더위와 같은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8월10일, 재개된 제20차 회담에서는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유엔군 측의 수석대표인 조이 중장이 선수를 쳤다.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고려하는 토의는 이미 끝났다. 상의하지 않겠다. 생각하지도 않겠다.”
 조이 중장은 30분간이나 성명서를 낭독하면서 “앞으로는 현 전선에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문제 등의 토의만 계속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공산측의 회담전법은 ‘장광설’과 ‘침묵’이었다. 조이의 성명서가 끝나자, 공산측 수석대표인 남일 중장이 쓴 전법은 ‘침묵’이었다.
 남일은 입술을 꽉 깨물고, 팔짱을 끼었다. 다른 공산측 대표들도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유엔군측을 쏘아보았다.
 조이 수석대표를 비롯한 유엔군 대표들도 질세라 공산측과 눈싸움을 벌였다. 눈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회담장엔 살벌한 침묵이 흘렀다.
 그 ‘째려보기’는 무려 2시간 11분 동안 계속됐다. 그 사이 단 한 번의 움직임이 있었다. 북한군 소장 이상조가 한국어로 남일 수석대표에게 보여준 종이였다. 워낙 큰 글씨로 썼기 때문에 테이블 반대쪽에서도 무슨 말인지 보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심부름꾼(사자)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
 ‘상갓집 개’라. 원래 ‘상갓집 개’라는 말은 ‘불우했던 공자님’을 뜻했다. <사기> ‘공자세가’를 보자.
 공자가 정나라에 갔는데,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홀로 성문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제자인 자공을 찾아와 인상착의를 말했다. 
 “이마는 요임금 닮았고,~ 허리 이하는 우임금보다 3촌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와 같았습니다.”
 자공의 말을 들은 공자는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의 생김새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그런데 날 ‘상갓집 개’ 같다고 했다고? 정말 맞아! 맞아!(謂似喪家之狗 然哉 然哉)”
 중국을 성인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던 공자…. 하지만 춘추전국시대, 그 혼란기에 그 어떤 나라도 공자를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공자는 아무 곳에서도 기용되지 못한 자신을 ‘상갓집 개’라 한 정나라 사람의 비유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한번 ‘상갓집 개’를 상상해보라. 주인을 잃고 쫒겨나, 홀로 생활할 능력도. 기력도, 지혜도 터득하지 못한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개의 신세가 아닌가.
 공산측은 상대의 협상대표단을 ‘상갓집 개’라고 하며 슬슬 자극했던 것이다. 그것도 ‘째려보기’ 눈싸움의 와중에….
 공산측의 ‘눈싸움’ 전법에 당황한 것은 도리어 유엔군측이었다. 조이 중장의 술회.
 “장광설을 좋아하는 그들이 설마 그런 태도(눈싸움)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에게 오직 상대방의 얼굴만 지켜보며 여러 시간을 즐기는 풍습은 없다. 눈을 부릅뜨고 한 군데만 지켜본다는 것은 피곤한 노릇이다.”(조이의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수법>에서)
 조이 중장은 심호흡을 내쉰 뒤 피곤해진 눈을 부비면서 입을 열었다. 급기야 2시간 11분간의 눈터지는 싸움을 견디지 못한채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는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자. 휴전실현의 구체적인 협의에 나서자.”
 하지만 눈싸움에서 승리한 남일은 3단어의 한국말로 그 제안을 싹둑 잘라버린다.
 “안된다.”
 협상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8월22일 공산측이 “유엔군 공군이 개성의 중립지역을 폭격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입씨름 끝에 회담은 중단되고 만다.

백마고지의 전투 이전과 이후. 엄청난 화력이 집중되어 고지가 변형될 정도였다.  

 

 ■‘코미디 휴전회담의 대가는 컸다’
 양측은 우여곡절 끝에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다. 8월23일 중단된 회담은 두 달 여 만인 10월25일 재개됐다. 판문점은 당시 문산~개성을 잇는 1번 국도 언저리에 자리잡은  ‘보잘 것 없는’ 주막거리였다. 행정구역상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경계에 있었다.
 협상은 역시 지루한 힘겨루기를 계속하면서 이후에도 1년 9개월을 더 끌었다. 판문점에서는 159회의 회담과 575회의 공식회의를 열었고, 1800만 단어를 주고받은 끝에 휴전협정에 서명했다.(1953년 7월27일)         
 그러나 지루한 휴전회담의 대가는 엄청났다. 회담이 시작된 1951년 7월부터 전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오르내리는 교착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한국전쟁 발발(1950년 6월25일)~휴전(1953년 7월27일)까지 전쟁의 전 기간(1127일) 가운데 무려 764일을 지금의 휴전선 근방에서 싸웠다.
 모두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국지적인 고지쟁탈전으로 전쟁 전 기간의 2/3를 소모한 것이다. 회담 기간 중 전선의 변화는 종심 20㎞ 정도에 불과했다. 전투는 소모적이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저 장병들에게 화약냄새를 맡게 하여 부대의 전투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의도로, 혹은 “네가 치니 나도 친다”는 보복의 양상으로 치렀다. 그 사이 양측의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예컨대 미군은 모두 6만여명이 휴전회담의 와중에서 희생됐다.
 휴전회담의 와중에서 벌어진 ‘피의 능선’ ‘백마고지’ ‘저격능선’ 전사를 쓴 이들이 한결같이 논평하는 대목이 있다.
 “백마고지 전투는 ‘지상전의 꽃’이라는 극찬을 들었지만 이 작은 고지 하나를 두고 그 많은 인명과 물자를 투입하면서까지 혈전을 벌여야 할 가치가 있는가? ~전과에 비해 전술적 가치가 너무 적다는 회의적인 견재를 보이는 이도 있다.”(<한국전쟁전투사-7.백마고지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4)        
 “보잘 것 없는 이 둥근 언덕 세 개(‘피의 능선’)을 차지하려고 4000명이 넘는 아군병사들이 목숨을 바쳤다.”(미국의 역사학자 페렌바크의 언급)  
 “저격능선이라는 적의 전초 하나를 탈취하려고 그렇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장기간 작전을 펼쳐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한국전쟁전투사-14.저격능선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8)
 이 희생 모두가 회담장에서 유치한 오기와 자존심 싸움에, 심지어는 눈싸움까지 벌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생긴 일들이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한국전쟁 휴전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9
 <지울 수 없는 이미지 -8·15해방부터 한국전쟁 종전까지>,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2004
 <그들이 본 한국전쟁 1, 항미원조-중국인민지원군>, 중국해방군화보사. 노동환 외 번역, 눈빛출판사, 2005
 <분단의 섬 민통선-비무장지대 역사기행>, 이기환, 책문, 2009
 <한국전쟁 하권>, 고지마 노보루, 김민성 옮김, 종로서적, 1981
 <판문점 700일-상 (누구를 위한 휴전인가)>, 이원복, 대림기획, 1989
 <한국전쟁전투사-7.백마고지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4
 <한국전쟁전투사-14.저격능선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8
 <한국전쟁전투사-16.양구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