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히로히토는 '항복연설' 하지 않았다

 <히로히토의 이른바 종전조서 전문>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고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토록 했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의 유범(遺範)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락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 조정의 많은 관리)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중서(일본신민)의 봉공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개세 역시 우리게에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했으며 그 참해 미치는 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 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億兆)의 적자(赤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에 순직했으며 비명에 스러진 자 및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을 입고 재화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갱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게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고모리 요이치의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1945년 8월15일 정오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목소리가 ‘치직’거리는 라디오 잡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종결에 관한 조서’였다. 800자 분량의 ‘조서’ 내용을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녹음사태가 워낙 좋지 않았고, 일왕의 목소리도 떨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왕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궁정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서’는 이후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딘다.(堪へ難きヲ堪ヘ忍ヒ難キヲ忍ヒ)’는 구절만 줄기차게 인용됐다. ‘시운(時運)을 잘못 만나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끝내니 일본국민은 어떤 어려움도 견디자’는 것이었다.  

히로히토의 방송을 듣는 일본국민들. 히로히토는 절대 패전이니 항복이니 하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원자폭탄 때문이었다.'

  최근 일본 궁내청이 종전 70주년을 맞아 디지털로 복원한 일왕의 ‘육성방송’을 공개했다. 다시 들어도 기가 찬다.
 패전이라는 말도, 항복이라는 말은 전혀 없었다. 식민지 침략을 두고도 책임회피로만 일관했다.
 ‘제국(일본)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하게 바라는 뜻에서 미·영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며, ‘다른 나라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한 행위도 짐(일왕)의 뜻도 아니었다’고 했다. 전쟁종결의 이유는 ‘적(미국)이 원자폭탄을 터뜨려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했기 때문’이라 했다.
 이러한 연합군의 비인간적 행위에도 교전을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일본)의 멸망을 초래할 뿐 아니라 인류의 문명도 깨질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일왕 스스로 일본인의 구세주일 뿐 아니라 연합군의 살육에 반대하는 인류문명의 수호자이자 평화주의자임을 천명한 것이다. 물론 원자폭탄을 사용한 미국의 행태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하지만 7월26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한 포츠담 선언 전후의 히로히토 행보 역시 반인륜적이다.

일본 국내청이 복원한 일왕의 종전조서 방송.  

 

 ■'3종 신기만 보전하면 된다'

   즉 히로히토는 일본 왕실이 대대로 간직해온 ‘3종의 신기(神器)’를 미군의 폭격에서 보호하는 방법을 찾느라 골몰한다. ‘3종 신기’란 무엇인가.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록된 일본신화를 보면 일본의 조상신 가운데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이 있다. 그런데 이 아마테라스가 왕실에 전해준 신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3종의 신기’다. 즉 이세(伊勢) 신궁의 위패로 모신 야타노카가미(八咫鏡·거울)과 아쓰다(熱田) 신궁의 구사나기노쓰루키(草치劍·칼), 그리고 현재는 행방을 모르는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尺瓊勾玉·굽은 옥)를 일컫는다.
 그런데 연합군이 야나토카가미, 즉 거울을 모신 이세신궁을 폭격한 7월25일 히로히토는 측근인 기도 고이치(木戶幸一)를 불러 ‘3종의 신기’를 어찌 무사히 보전할 것인지 의견을 구한다. 그러자 기도가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3종의 신기를 수호하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를 완수하지 못하면 황통 2600년의 상징을 잃게 되며, 결국 황실도 국체도 수호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종의 신기’를 수호할 수 없게 될 때 어려움을 견디고 강화하는 것이 긴급한 임무라고 믿습니다.”(기도 고이치의 <목호일기·木戶日記>에서)
 6일 후엔 7월31일 히로히토는 “3종의 신기는 결국 내 가까이 옮기는 것이 좋겠다. 여러번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신슈(信州)로 옮길 각오로 생각하면 어떻겠느냐”고 조바심을 낸다. 신슈 쪽이란 마쓰시로(松代) 대본영을 가리킨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은 미군의 공습을 피하려고 나가노(長野) 마쓰시로에 대규모 지하방공호를 팠다.
 어떻든 이 중차대한 시기에 히로히토는 황실과 국체를 지키기 위해 ‘3종의 신기’를 보전하는 일에만 혈안이 돼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민의 안녕은 안중에도 없이 ‘3종 신기’ 타령으로 10일 이상 소비한 결과는 어땠을까. 끔찍했다. 히로시마(8월6일)과 나가사기(9일)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33만명이 희생됐다.  

일왕은 종전 직전 일본왕실에 전해내려오는 이른바 3종의 신기에만 온 신경을 썼다.


 ■백성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른바 ‘종전조서’의 초안에 이 ‘3종의 신기’를 또 언급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내용인가.
 두번째 원폭이 터진 8월9일 심야어전회의가 열려 마침내 종전이 결정된다. 이 때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를 비롯한 3명이 포츠담 선언의 수락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육군대신 등은 ‘본토결전’, ‘일억옥쇄’를 주장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한 것이다. 양측의 주장은 3대3으로 팽팽했다. 결국 일왕이 “도고 외무대신의 의견과 같다”고 선언함으로써 종전이 결정됐다. 당시 이른바 첫번째 어전회의에서 종전을 결정한 뒤의 분위기를 내각 서기관장인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는 이렇게 표현했다.
 “건국 2600년 일본이 처음으로 패배한 날입니다, 일본의 천황폐하가 처음으로 우셨던 날입니다.”(사코미즈의 <종전의 진상>에서)
 남은 것은 종전조서의 작성이었다. 사코미즈가 한학자인 가와다 미즈호(川田瑞穗)와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의 도움을 받아 초안을 작성했다.
 그런데 여기서 히로히토의 ‘3종 신기 집착증’이 발휘된다. 초안에 ‘짐은~너희 신민의 적성(赤誠)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신기(神器)를 받들어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그러자 ‘미국 점령군이 이 신기(神器)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될 것이냐’, ‘쓸데없는 호기심만 낳을 뿐이다’, ‘미군이 황실의 힘을 약화시키려 신기에 대해 캐물으면 어떻게 하냐’는 반론이 거셌다. 결국 이 구절은 논란 끝에 빠졌다.
 마지막까지 백성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이 ‘신기 3종세트’ 타령만 한 것이다. 

 ■면죄부 연설

  초안에서 ‘전세가 날로 불리해졌다’는 내용도 ‘전국(戰局)은 호전되지 않았다’고 수정됐다. 모든 전쟁에서 승승장구 중이라는 대본영의 발표가 새빨간 거짓이 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현 상황은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전쟁 국면이 호전되지 않았을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나미 육군대신의 강변이었는데, 전쟁 후 지금까지도 ‘패전’이 아닌 ‘종전’이라는 궤변이 통하고 있다. 히로히토는 또 조서에서 ‘제국신민으로서 전장에서 죽은 자와 직무상 순직한 자를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고 언급했다. 이 또한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히로히토는 바로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모실 영령’의 자격을 말한 것이다. 70년 전의 일왕 방송연설을 '항복연설'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그저 변명연설이자 자기합리와, 아니면 면죄부 연설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고모리 요이치, <1945년 8월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송태욱 옮김, 뿌리와 이파리, 2003

 허버트 빅스, <근대 일본의 형성 히로히토 평전>, 삼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