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

창비 정신과 백낙청

1966년 1월15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잡지가 창간됐다.

이름조차 생소한 <창작과 비평>(창비)이었다. 한자를 대폭 줄여 순 한글체를 표방하면서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가로짜기 편집까지 도입했다.

파격의 잡지를 펴낸 이는 28살의 서울대 전임강사 백낙청이었다. 편집실은 백낙청의 집이었고, 2000부를 찍어낸 제작비는 9만원이었다.

당시 사립대 등록금이 3만원 정도였으니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백낙청은 창간사 대신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실었다.
그는 ‘서구처럼 중산층이 발달한 적이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순수문학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며, 한국의 순수주의는 권위주의와 비생산성, 족벌주의, 관권 등 조선 양반계급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꼬집었다.

순수문학의 허위와 추상을 비판하고 현실참여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장 폴 샤트트르가 1945년 펴낸 잡지 <현대>의 창간사와 궤를 같이 한다.

샤르트르는 ‘작가는 어떤 수단을 써도 시대에서 도피할 수 없는 이상 그 시대를 꽉 껴앉기를 바란다’면서 ‘시대만이 작가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했다.

창비는 창간호부터 문학중심의 계간지가 아니라 교양과 시사에도 관심을 두고 출발했다. 순수문학 작품의 발표공간에 머물던 다른 잡지들과는 뚜렷한 변별성을 보였다.

특히 그때까지 문단권력의 온상이라 비판받은 신인 등용의 추천제를 거부하고 편집동인들이 투고작을 직접 심사하는 방식도 채택했다. 문단의 백안시가 극심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정보기관도 가만 있는데 오히려 문단 내부에서 기관원들 보란듯이 창비를 좌경이라 몰아붙였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말 창비사가 재정난에 빠졌을 때는 매일같이 어음만 챙기며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쨌든 암울했던 시절 당대의 대학생들은 창비 덕분에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등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시선을 넓혀갔다.
백낙청 교수가 창비의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50년 만이다. 이후의 창비가 어떤 모습일까. 우려하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 신경숙 표절 논란을 둘러싼 창비와 백 교수의 대응이 개운치않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백 교수는 퇴임식에서 “시류에 흔들이지 않고 기본을 지켜낸 것이 창비정신”이었다고 자부했다.

그래, 이 참에 28살 청년 백낙청의 창간 권두논문을 인용해본다.

“그 출발이야 누가 하든지 막막한 느낌이 앞서기 쉬울 것이다. 먼 길을 어찌 다 가며 도중의 괴로움을 나눠줄 사람은 몇니아 될까. 오직 뜻잇는 이를 불러 모으고 새로운 재능을 찾음으로써 견딜 수 있을 것이요. 견디는 가운데 기약된 땅에 다가서리라 믿는다.”

이것이 창비정신인 것이며, 초심일 것이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