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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구마모토성에 서린 조선의 한

 

최근 규수지방을 강타한 지진으로 40여명이 사망하는 가하면 구마모토성(熊本城) 일부도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나 규슈 지방과, 특히 이 구마모토 지역, 그것도 이 구마모토성이 우리 역사와 친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규수지방은 옛날 백제인들이 이주 혹은 망명해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곳입니다. 지금도 직역하면 ‘백제(くだら) 없다(なぃ)’는 ‘구다라 나이(くだら なぃ)’는 ‘쓸모없다’ ‘재미없다’ ‘시시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백제없다’는 말이 ‘시시하다, 쓸모없다, 재미없다’는 뜻이면 ‘백제있다’는 말은 얼마나 근사하고 멋지고 재미있다는 뜻이었을까요. 일본열도에 도착한 백제인들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비단 백제인들 뿐이겠습니까. 일본의 3대성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에는 조선의 역사가 듬뿍 담겨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에서 당한 뼈저린 경험을 이 성을 쌓는데 백분 활용했답니다. 1597년 12월~1598년 1월 사이 울산성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가토 기요마사가 그토록 참담한 경험을 겪어야 했으며, 그 기억을 잊지않고 구마모토 성을 쌓는데 반면교사로 삼았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78회 주제는 ‘지진 속 구마모토에 서린 조선의 역사’입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악귀 기요마사’란 악명을 떨쳤다. 그렇게 잔인했던 가토에게 평생 트라우마를 안겨준 전투가 있었다.
바로 울산성 전투였다. 이 울산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한 것이다. 내막을 들춰보자. 사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명나라군 참전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장기전 체제로 돌입한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에 나서는 한편 전라~경상도에 이르기까지 30여 곳에서 왜성을 쌓기 시작한다.

 

■울산성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그 가운데 경상도 울주군 서생포 왜성이 최대 규모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 왜성에 1만여 군사를 이끌고 주둔했다. 그곳은 1594년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와 4차례 회담을 벌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다시 침략한 가토는 조·명 연합군의 기세에 눌려 남쪽으로 후퇴한다. 위기감을 느낀 가토는 울산(학성공원 일대)에 새로운 왜성을 쌓는다. 바로 울산성(왜성)이다. 기존의 병영성과 울산 읍성을 헐어낸 돌로 불과 40여 일 만에 성을 완성했다. 얼마나 급히 쌓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토의 걱정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1597년 12월22일 이곳에 성을 쌓고 주둔하고 있던 가토군(1만6000여명)은 4만7000명 군사로 무장한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포위된다. 이때 조·명 연합군은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1만명과 양호·마귀가 이끄는 명나라군 3만8000명이었다. 조·명 연합군이 필살의 봉쇄작전으로 왜군의 숨통을 조였다. 연합군의 화포공격, 혹한의 추위, 굶주림, 부족한 식수가 왜병을 괴롭혔다. 견디다못해 성밖을 탈출해서 피가 섞인 우물물을 마신 병사들도 조·명 연합군의 매복에 걸려 모조리 피살됐다.
성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용케 물을 마신 병사의 오줌을 받아먹는 일은 오히려 호사였다. 목이 타들어가자 군대의 재산인 군마들까지 모조리 죽인 뒤 말의 피를 받아 마셨고, 성벽의 흙까지 싹싹 긁어 배를 채우는 참극이 빚어졌다. 절망에 빠진 가토 기요마사는 “여기서 할복할 수밖에 없다”는 유서까지 썼다. 포기 직전에 도착한 지원군 덕분에 가토는 겨우 사지에서 벗어났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성을 탈환할 수 있었던 조·명 연합군은 눈물을 머금고 경주로 퇴각했다. 이듬해(1598년) 1월4일까지 13일간 이어진 전투로 조·명 연합군 역시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가토군 역시 궤멸에 가까운 인명손실을 입었다.
그 해(1598년) 9월 울산성에서는 2차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도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의 처절한 방어작전에 성벽을 넘지 못한채 퇴각했다. 그 해 1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소식에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을 불지르고 역시 일본을 돌아갔다. 1~2차 울산성 전투의 결과는 사실상 무승부라 할 수 있다. 조·명 연합군과 가토군 모두 각각 1만5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채 승부를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쭐이 난 가토
가토 기요마사가 얼마나 울산성에서 고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몇가지 전설이 남아있다. 단적인 예로 규슈의 아소(阿蘇)지방에 남아있는 이야기 한편을 소개하자면….
“이 지방에 장선방(張善坊)이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어느날 아소산에서 수도하고 있던 장선방에게 갑옷을 한 가토 기요마사가 나타나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아소산의 산신이시어! 지금 제 군대는 조선의 울산에서 명나라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이 소리를 들은 장선방은 즉시 부적을 종이에 그리고 그것을 다시 가위로 잘게 자른 뒤 ‘가토 공이여! 결코 비관하지 마시라. 곧 구원하겠노라.’라고 소리치면서 조선을 향해 그 종이를 입에 넣어 불었다. 그러자 안개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수백만 군사가 나타나 조선으로 건너갔다. 깜짝 놀란 조선과 명나라군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가토 기요마사는 전세를 가다듬어….”
이밖에도 일본군이 고전하던 울산성 하늘 위로 새까만 구름이 몰려왔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가마우지 새떼였다는 전설도 있다. 가마우지를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조선·명나라 군은 일본에서 몰려온 가마우지가 춤을 추며 울산성에 내려앉자 일본에서 지원군이 물려온 줄 알고 전의를 잃었다는 것이다.   
 
■가토가 얻은 교훈
어쨌든 가토 기요마사는 무승부로 끝난 이 전투로부터 큰 교훈을 얻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가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편에 선 덕분에 엄청난 상급을 받았다. 영지가 19만5000석에서 51만5000석으로 늘어난 것이다. 가토로서는 자신이 거주하는 성을 증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1607년 세운 성이 바로 구마모토(熊本)성이다. 가토는 일본의 전국시대 이후에 유행한 덴슈카쿠(天守閣·성 중심에 높게 솟은 망루)를 세웠고, 성 외곽에 덴슈카쿠에 필적할 5단 성루를 5기나 나란히 배치했다.
가토는 여기에 조선에서 잡아온 울산 백성들을 동원함으로써 울산성에서의 뼈저린 교훈을 새겼다. 우선 조선의 화포공격에 엉망이 된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성벽을 견고하게 증축했다. 또한 각 출입구를 미로식으로 구성했고, 해자도 넓게 팠다. 상대가 성내로 쉽게 진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무엇보다 성안에 우물을 120곳이나 팠다. 우물을 파지 않아 사람의 오줌과 말의 피를 받아 먹어야 했던 울산성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성 안의 모든 건물에 깔아놓은 ‘고구마 줄기’ 다다미 역시 울산의 아픈 기억을 반영한다. 보통은 짚을 깔지만 고구마 줄기를 깔아 넣은 것은 바로 유사시에 식량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성 안 곳곳에 은행나무를 심어놓었다. 이 역시 은행을 비상시 식량을 활용하려는 대비책의 일환이었다. 지금도 구마모토 성을 ‘은행나무성(긴난조·銀杏城)’이라 일컫는 이유이다. 가토는 이 성을 마무리 지은 뒤 “(심어놓은) 은행이 천수각(덴슈카쿠)만큼 자랐을 때 병란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했다.
그런데 은행나무가 그만큼 자랐던 1877년 가토의 예언처럼 병란이 일어난다. 이것이 세이난(西南) 전쟁이다. 세이난 전쟁은 일본 규슈의 사츠마번(현 가고시마현) 불평사족들이 일으킨 반정부 내란이다. 전쟁의 와중에 성 아래 마을들이 전소되고, 성 내부의 건물들도 상당수 불에 타는 등 크나큰 손실을 입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때 “세이쇼공(淸正公·가토 기요마사의 높임말)이 불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구마모토성에 주둔한 신정부군 4000명은 1만4000여명의 반정부군을 상대로 50여일이나 버텨냈다. 이 때문에 반정부군을 이끈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은 “관군한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공에게 진 것”이라고 한탄했다.
이번 규슈 지방을 강타한 일련의 강진으로 철벽이라는 구마모토 성내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13곳이 무너지거나 손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들린다.(사진) 가토 기요마사의 이야기 만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역사와, 전쟁 이후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한까지 서려있는 성이니만큼 더더욱 남의 일 같지 않다. 구마모토성은 ‘무샤가에시(武者返し·어떤 병사들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뜻)’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난공불락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런 철옹성도 지진이라는 자연 현상 앞에서는 저렇게 맥을 추지못한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글은 채현희의 ‘가토 기요마사와 울산성 전투에 관한 고찰(단국대 석사논문, 2010) 등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