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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이성계의 불온한 대권출정식

지금부터 80여 년 전 금강산 월출봉에서 희한한 유물 세트가 발견됩니다. 태조 이성계와 두번째 부인 강씨의 이름을 새긴 사리장엄구였습니다. 즉 이성계가 불사리를 봉안한 의식이 1391년 5월 이곳 금강산에서 벌어졌음을 알린 유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의식에 1만 여 명의 지지자가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1391년 5월이면 조선이 개국하기 1년 2개월 전입니다. 이성계는 왜, 그것도 금강산에서 불사리를 모시는 성대한 의식을 치렀을까요. 더욱이 사리기를 보면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고 했답니다. 이성계가 기다린 미륵의 하생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또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조강지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때, 이성계는 왜 두번째 부인인 강씨만 데리고 금강산에 올랐을까요. 금강산에서 발견된 사리기에 그 엄청난 사연들이 숨어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03회는 ‘이성계의 불온한 대권출정식’입니다.(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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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게 뭐냐.”

1932년 10월6일 강원도 준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선 확보 공사 중이던 인부들의 눈에 돌 상자 하나가 걸렸다.

인부들이 확인하자 그 안에는 놀라운 유물이 숨어있었다. 사리를 잘 모셔두기 위해 마련한 이른바 사리장엄구였다.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유행한 라마불교의 탑 양식으로 만든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15.5㎝)와 팔각당형 사리기(19.8㎝)가 눈에 띄었다. 백자향로(12㎝)와 백자그릇, 청동사발, 은제숫가락 등도 보였다.

사리는 아마도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를 연좌형 대좌 위 원통형 은판 안에 놓고 라마탑형 용기를 뚜껑을 덮었을 것이다. 이 라마탑형 용기에는 4구의 불상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하지만 당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리를 넣은 이 용기는 은제 금도금으로 만든 팔각형 사리기의 품 안에 있었을 것이다.

1932년 10월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사리갖춤. 1391년 5월 이성계가 마련한 사리봉안 행사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성계 사리함의 정체
그런데 이 사리장엄구를 검토하던 전문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리를 넣은 원통형 은판의 표면을 비롯한 유물 곳곳에 명문, 즉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원통형 은반에 새겨진 글자는 이 사리장엄구를 묻은 이의 정체를 밝히고 있었다.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벽상 삼한 삼중대신 수문하시중 이성계(奮忠定難 匡復燮理 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물기씨(勿其氏)’

거두절미하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의 둘째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이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이성계 앞의 기나긴 수식어는 무엇인가. 공양왕이 1389년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성계에게 내린 작호다.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닌 신돈의 아들, 즉 신씨라는 것.

그래서 이성계가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씨인 공양왕을 세웠다는 것. 그래서 이성계를 ‘분충 정난 광복 섭리 좌명공신 화령군 개국충의백(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和寧郡開國忠義伯)’에 봉한다는 것이었다.

이성계에게는 식읍 1000호, 밭 200결, 노비 20구 등이었다. 이때 내린 공양왕의 교서를 보자.

“이성계는 명분을 바로잡고 다시 나라를 일으켜 왕실을 재건했다. 그 공은 태조(왕건)의 개국공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벽상(壁上)에 얼굴을 그리고,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봉하며, 자손에게 벼슬을 내리고, 10대 후손까지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사면토록 하라.”(<고려사절요> ‘공양왕’)

라마불교 탑 형식을 본뜬 사리기.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며”
명문은 팔각당형 사리기에도 보였다. 은판 표면에 “경오년(1390년·공양왕 2년) 3월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신다”는 내용과 함께 발원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강양군 부인 이씨, 낙안군 부인 김씨 등 상류층 여인네와 승려 월암, 홍영통, 황희석, 박자청의 이름이 보인다.

또 2개의 백자 사발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신미년(1391년 4월) 방산(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의 사기장 심룡이 그릇을 만들고 승려 신관이 함께 발원한다”는 것이 하나다.

‘금강산 비로봉 사리 안유기(安遊記)’로 시작하는 다른 하나의 명문은 좀 더 중요했다.

“신미년(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

■이성계에게 사리는 무엇인가
명문을 종합해보자. 우선 이 사리장엄구는 1390년(경오년) 3월과, 1391년(신미년) 4·5월에 제작되어 비로봉에 봉안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기 1~2년 전이다. 그런데 금강산 비로봉에 봉안됐던 사리장엄구가 어째서 월출봉에서 발견됐는지, 그리고 사리기 안의 사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왜 하필이면 그 시점에, 다른 곳도 아닌 금강산에 사리를 봉안했을까.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예컨대 조선을 건국한 뒤인 1396년(태조 5년) 태조는 아주 흥미로운 지시를 내린다.

“왜구의 창월 때문에 양산 통도사에서 개성 송림사로 옮겨두었던 부처님의 두골사리(頭骨舍利)와 보리수엽경 등을 가져오라”(<태조실록>)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사리신앙에 빠져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사리, 특히 진신사리는 부처님의 분신이자 영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 가운데 가장 세력이 약했던 신라의 경우 진신사리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평가했다.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두골과 어금니, 불사리 100여 과를 황룡사 9층탑과 태화사(울산), 통도사(양산) 등에 나눠 봉안한 다음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금강산인가. 금강산은 고려불교의 성지였다. 본래 금강산 명칭은 불교의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담무갈보갈이 1만200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금강산에서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1만2000명의 제자가 봉우리로 변해서 일만이천봉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바로 이 담무갈보살의 현신을 목격하고 예를 갖췄다는 설화가 등장한다.

바로 이 만남을 기념해서 금강산 정양사가 창건됐다. 그렇다면 이성계가 굳이 금강산을 찾아 사리를 봉안한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백자주발. 이성계가 1만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미륵의 하생'을 바라면서 사리봉안식을 펼쳤음을 알리고 있다.

■이성계는 미륵을 꿈꿨나
또 하나의 실마리는 이성계가 1만여명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렸다는 명문 내용이다.

미륵하생 신앙이란 무엇인가. 고려말 민중 사이에 유행한 신앙이다. 민중을 구원할 미륵불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후삼국시대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로 칭하며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미륵하생 신상은 민중이 도탄에 빠지는 말세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구세주의 출현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고려말에도 그랬다.

“1382년(우왕 8년) 고성 백성 이금이 ‘내가 미륵불’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내가 술법을 부리면 풀에 푸른 꽃이 나고, 나무에 곡식열매가 열리며. 한번 심으면 두 번 수확할 수 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이 없어질 것이다.’라 했다. 그 말을 믿고 백성들이 다투어 쌀과 비단, 금은보화를 헌납했다. 소와 말이 죽어도 먹지 않았으며, 재물을 모두 남에게 주었다.”(<고려사절요>)

오죽 민중의 삶이 피폐했으면 혹세무민의 말이 현혹되겠는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
그랬다. 고려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야말로 외우내환이었다.

‘외우(外憂)’는 어땠는가. 1380년(우왕 6년) 왜선 500척이 진포(충남 서천 앞바다)에 정박하고는 하삼도, 즉 충청·전라·경상도를 마구 노략질했다.

마을이 불탔고,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었다. 왜구는 노략질한 곡식을 배로 운반했다. 운반하느라 땅에 버려진 쌀이 한 자 두께나 될 정도였다.

포로로 잡은 어린아기까지 모두 죽여 시체가 산더미를 이뤘고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뤘다. 2~3세 되는 계집아이를 자고 잡아 머리를 깎고 배를 쪼개 깨끗이 씻어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냈다.

하삼도의 연해지방은 텅텅 비었다. 왜구의 침탈이 역사상 이런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환(內患)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인 권필(1569~1612)의 <석주집>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가난’이라는 제목의 시다.

“남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지만(人無置錐地) 나는 본래 꽂을 송곳도 없다오.(而我本無錐)….”

옛 문헌을 들춰보면 힘겨운 민중의 삶을 표현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송곳 꽂을 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곳 꽂을 땅은커녕 꽂을 송곳도 없다’는 표현이니 얼마나 비참한 가난을 말하는가. 고려말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원래 고려는 중앙집권적인 토지제도를 갖고 있었다. 976년(경종 1년) 실시된 전시과제(田柴科制)가 그것이다. 먼저 모든 국내의 경작지와 삼림을 국가의 토지대장에 등록했다.

사리를 넣은 라마탑형 사리기를 분해한 모습. 유리와 금속으로 된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과 연좌형 대자, 원통형 은판, 라마탑형 용기가 결합했다.  

그런 다음 문무백관부터 한인(閑人·6품 이하의 관리 자녀)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했다.

해당 토지에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이른바 수조권(收租權)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이 수조권은 살아있을 때, 즉 당대에만 누릴 수 있었고, 상속이나 매매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외척의 권력 농단 등으로 토지제도가 문란해졌다.

권문세가의 토지독점이 확대되었고,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어 갔다. 특히 무인정권 출현과 몽골의 침입 등 혼란기가 겹침에 따라 이같은 현상은 극심해졌다.

귀족들의 토지겸병이 극심해지자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에게 줄 토지가 사라져갔다. 백성들의 굶주림도 임계점을 넘었다.

■송곶 꽂을 땅도 없다
‘송곶 꽂을 땅’과 ‘꽂을 송곳도 없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정도전의 <삼봉집>을 보면 그 비참함이 구구절절 표현돼 있다.(조선경국전 상)

정도전은 일단 고려 초기의 토지제도는 그나마 좋았다고 돌이킨다.

국가가 모든 토지를 소유해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으니 그나마 빈부와 강약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지에서 얻은 세금 역시 모두 국가의 재정에 포함됐으므로 나라도 부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권문세가가 남의 토지를 겸병했다. 부자는 밭두둑이 이어질만큼 토지가 많아졌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됐다.”

예의 그 ‘송곳 꽂을 땅도 없다’는 표현이다.

“가난한 자는 부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지만 뼈빠지게 고생해도 식량은 부족했다. 부자는 편안히 앉아 수확량이 태반을 빼앗았다. 어떤 경우는 수확량의 반까지 수탈했다. 경작하는 자는 한 명인데 먹는 사람은 둘이 된 셈이다.”

그것은 약과였다. 권문세가들이 앞다퉈 토지를 겸병하다보니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에 주인만 7~8명에 달하는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연출됐다.

그 뿐이 아니라 세금을 거둘 때 인건비며, 노자며 조운비며 이런저런 돈까지 부담해야 했다. 그랬으니 원래 조세보다 2~5배까지 더 내야 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져서 마침내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1932년 12월13일 중앙일보 기사. 금강산 월출봉에서 500년전의 납골기가 발견되어 조선총독부가 관리 중이라고 보도했다. 

■토지대장을 불태우다
이성계와 이성계를 떠받드는 신진사대부들은 바로 이런 점을 노렸다. 권문세가들이 독점한 토지, 즉 사전(私田)을 혁파함으로써 일석삼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1389년 이성계 세력이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공·사전의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우는 것이었다.

“공전과 사전의 장부를 저잣거리에서 불살라버렸다. 그 불길이 며칠이 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창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전의 법이 과인의 치세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되었구나. 애석하도다.’ 했다.”(<태조실록> ‘총서’)

불은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저잣거리의 백성들은 불에 타 한줌 재로 변하는 착취대장(토지대장) 더미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이성계를 향해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고려왕은 한낱 기득권 세력의 대표일 뿐이었다. 토지는 이로써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드디어 과전법이 시행됐다. 1391년 5월의 일이다.

과전법은 전·현직 관리에게 녹봉(봉급) 대신 경기도의 토지를 차등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경기도 외의 땅은 국가 소유가 됐다.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하는 체제가 된 것이다.

과전을 받은 관리들은 수확량의 1할(10분의 1)만 세금으로 받았다. 기존에 수확량의 50%까지 내면서 수탈당했던 백성들로서는 그나마 쌍수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은 훗날 “토지분배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때보다는 1만배 나은 제도였다”고 자평했다.

무엇보다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온갖 횡포를 부렸던 고려말 권문세가는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랬으니 기득권 세력의 대표였던 창왕이 ‘고려 법이 무너졌다“고 한탄한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경제적 기반이 없었던 신진사대부, 즉 조선 건국의 주체들은 급격히 힘을 얻었다.

청동그릇. 1391년 3월 신견, 명, 박룡 등 3인이 시주해서 사리합으로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있다.

■왜 1391년 5월일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이성계가 금강산에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시기다.

앞에서 살펴봤듯 이성계는 1390~1391년 사이에 사리장엄구를 제작해서 금강산 비로봉에 봉안한다.

특히 ‘1391년 5월’을 염두에 둬야 한다.

사리기 명문을 보면 “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런데 사료를 보면 토지개혁의 마무리도 ‘1391년 5월’이라 했다. 금강산에 간 것이 먼저인지, 토지개혁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1391년 5월’은 이성계와 이성계 세력에게는 ‘운명의 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의 하생, 즉 이성계가 꿈꾼 ‘새 왕조 조선의 개창’을 만천하에 선포한 달이었다.

생각해보라. 이성계는 1만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금강산까지 행진했다.

이성계는 누가봐도 “내가 차기 대권의 주인공”이라 외친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물론 모반대역죄에 해당됐지만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성계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목자득국’, 전국구스타로 떠오른 이성계
이성계는 1380년 소년 장수 아기발도를 죽이고 왜군을 쳐부순 이른바 황산대첩 이후 시쳇말로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등)

이성계가 개선하자 이색·김구용·권근 등이 축시를 전했으며 최영 장군은 “공이 아니면 누가 이런 승리를 거두겠냐”고 눈물까지 흘렸다.  

1388년 권력을 농단하던 이인임과 임견미·염흥방 일파를 처단하자 ‘인기짱’이 됐다. 매관매직으로 치부하고, 남의 전답을 빼앗아 탐욕과 포학을 일삼는 자들을 일소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이들을 처단하자 백성들이 기뻐해서 길 가던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성계는 이때 수문하시중(정승)에 올랐다.

은제 도금 팔각당형 사리기. 사리를 넣은 라마탑형 사리기를 품은 용기이다.  1390년 사리탑을 조성해서 모신다는 내용과 발원자의 이름을 새겼다. 강양군 부인 이씨, 낙안군 부인 김씨, 승려 월암. 영삼사사 홍영통, 동지밀직 황희석,     그리고 박자청의 이름이 보인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목자득국(木子得國)’의 동요가 퍼졌다. 장마가 엄청났는데도 이성계 군대가 강을 건넌 다음에야 위화도에 물이 잠긴게 신기했던 것이다.

목자득국은 ‘木+子’, 즉 이(李)씨의 왕조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회군하던 연도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경(西京·평양)에서 개경에 이르는 수백 리 사이에 우왕을 좇던 신료와 개경 사람,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료로 이성계 군대를 영접했다.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동북면 백성들과 여진족까지 태조 이성계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밤낮으로 달려왔다. 합류한 사람들은 1000명이 넘었다.”

개경으로 회군한 이성계군을 막을 자가 없었다.

“도성의 남녀가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와서 영접했다. 군사들이 수레를 끌어내 길을 통하게 했다. 노약자들은 산에 올라 이성계군의 회군모습을 바라보고 기뻐서 고함을 지르며 뛰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기록은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 조선 건국을 합리화 하기 위해 이성계를 신화적인 인물로 꾸민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금강산 월출봉에서 확인된 이성계 사리함은 문헌에 등장한 ‘1만명의 지지 행렬’과 ‘미륵 하생’ 기록은 심상치 않다.

이것은 이성계가 대권출정식에서 새왕조 개창을 외친 ‘대권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주경미, ‘이성계 발원 불사리장엄구의 연구’, <미술사학연구> 제257호, 한국미술사학회, 2008
 서성호,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소개-이성계 발원 사리갖춤’, 국립중앙박물관 사이트(http://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