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난 왕씨의 혼이 될테다. 너희는 이씨의 세상에서 살아라

 “산소가 도굴됐는데 그 안을 보니까 무슨 선녀그림이 있었다는 거야. 한 6~7명이 봤다지.”


1980년대 후반 동아대 박물관 자료과장 박문국은 재실관리인에게 희한한 말을 들었다.

 

박문국은 그 유명한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 한 분인 송은(松隱) 박익 선생(1332~1398년)의 후손.

 

문동 72현은 새로 개국한 조선에 충성하지 않은 절의신(節義臣)의 상징이다.

송은 선생의 묘는 경남 밀양시 청도면 화악산 중턱(해발 505m)에 있었는데 1987년 도굴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도굴 구덩이를 발견하고 무덤 안을 내려다본 경찰관 등 몇 명이 무슨 선녀그림 같은 것을 어렴풋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덤 전면에 파헤친 도굴 갱을 서둘러 메웠기에 박문국으로서도  더 이상의 확인은 어려웠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화악산 중턱(해발 505m)에 발견된 송은 박익 선생의 벽화무덤. 2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조선 초 벽화의 화려한 외출

그런데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2000년 9월16일 태풍 사오마이가 남부지방을 휩쓸고 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송은 선생의 무덤봉분 뒤쪽 일부가 내려앉았는데 그 곳에서도 도굴 갱이 발견된 것이다. 87년 당시 도굴범들이 뚫어놓은 봉분 뒷면의 구멍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도굴범들은 그 도굴 갱에 나뭇가지를 꺾어 얼기설기 얹어놓고 온실용 비닐을 덮은 뒤 떼를 입혀놓았으나 87년 당시에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현장에 달려간 박문국의 회고담.

 

“도굴 갱은 밑으로 한 3m정도로 깊게 팠는데 어렴풋 돌 같은 것을 확인했어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니 화문석(花紋石)이었어요. 도굴 때 발 받침대로 사용한 것이었지요. 연잎과 역(逆) 卍 문양의 생동감 넘치는 문양. 사진을 서둘러 찍고는 곧바로 부총장님(당시 심봉근 동아대 박물관장·현 동아대 부총장)에게 달려갔어요.”

심봉근은 깜짝 놀랐다. 여말선초의 무덤에서 나온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니까.

“전에 벽화도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박문국의 ‘추가발언’에 심봉근의 귀가 번쩍 뜨였다. 현장에 달려가 무덤 안을 조사하니 정말이었다. 부분적으로 탈락되고 훼손되긴 했지만 석실 4벽에 빙 둘러가며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또 하나 놀라운 일은 선생의 유골이 600년 전 모습 그대로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훼손 없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사군자 벽화. 송은 박익 선생의 절개를 의미하는 그림으로 읽힌다.

박익 선생의 후손인 박문국의 고민은 컸다. 중요한 유물이 나왔으므로 조사가 필요한데 문중에서 허락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문중 입장에서 보면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격이 되고, 박물관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조사해야 하고….

일단 인골 전문가인 김재현(동아대 교수)과 함께 유골조사에 나섰다. 물론 서슬 퍼런 문중 때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하고 육안으로만 조사했다. 박문국은 문중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문중의 반대가 심했어요. 하지만 설득했죠. 600년 만에 조상의 무덤을 목욕시키듯 깨끗이 정리하는 것이라고…. 도굴 때문에 유골이 공기에 노출된 탓에 곰팡이가 살짝 슬고 있었거든요. 끈질기게 설득하자 문중에서는 ‘그럼 자네가 책임지게’하고 허락해주셨어요. 물론 유골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그런데 그 와중에서 경향신문(9월21일자)이 벽화발견기사를 사진과 함께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때부터 벌집 쑤셔놓은 듯 난리가 났다. 문화재청이 26일 서둘러 이 벽화고분을 국가사적으로 가지정했고 본격조사에 들어갔다.

 

◇불교사상 담은 풍속화와 절개의 상징 사군자 그림

특히나 미술사학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때까지 우리나라 무덤내부에 그림을 그려 넣은 벽화고분은 제일 먼저 4세기 대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그 후 백제·신라·가야·통일신라·발해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10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그 전통이 조선왕조시대까지 이어져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무덤에서 아직까지 벽화가 발견된 예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인지라 조선왕조 초기의 무덤에서 벽화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그만큼 깜짝 놀랄만한 뉴스였던 것이다.

족보에 따르면 무덤의 주인공인 송은 선생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밀양으로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하다 1398년 11월에 죽었다고 기록돼있다.

그러나 이 무덤에서 출토된 지석은 선생이 죽은 뒤 22년만인 1422년에 묻힌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벽화는 4벽에 석회를 고르게 발라 말린 후 다시 백분(白粉)을 얇게 입혀 벽면을 고른 뒤 묵선(墨線)으로 내용을 그렸다. 그런 다음 색을 칠하는 이른바 백묘화(白描畵) 기법으로 꾸몄다.

 

고려에 충성을 바친 절의신 송은 박익의 무덤.

특히 12지신상 위주인 고려시대 벽화와 달리, 대나무와 매화 등 사군자와 바위그림이 완전한 인물 풍속도와 함께 그려졌다는 것은 놀랄 만 한 일이다.

사군자 그림은 태조 왕건릉 등 10세기 능(陵)에서만 보이는 데, 이는 고려에 변함없는 충절을 지킨 송은 선생과 관련 있을 것이다.

 

즉 대나무와 매화는 그의 충절을, 바위는 불변의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희한한 것은 동·서벽의 대나무·매화·바위가 모두 북벽을 향해 절하듯 기울어져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북벽에 그려져 있었을 박익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벽화에 그려진 사람들은 모두 24명으로 복원된다. 남자는 단령포를 입고 벙거지를 썼으며 가죽 장화를 신고 제사용품을 나르고 있는 모습. 반면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에 가죽 신발을 신었으며 머리에는 화식관(花飾冠)을 썼다.

북쪽 단 벽에는 위에서 말했듯 묘의 주인공인 박익의 모습이 그려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완전 탈락되어 확실하지는 않다. 남쪽의 단 벽에는 2필의 말과 2명의 마부가 그려졌는데, 직령(直領·소매가 넓고 뻣뻣한 웃옷의 일종)과 장화, 그리고 몽고풍의 모자인 발립(鉢笠)을 쓰고 있다.

그림에 나타난 사람들의 옷이나 장식물이 화려하지 않다. 여성들의 머리에 있는 연꽃 장식의 관과 여러 가지 기물을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널조각(棺片)에 보이는 범자(梵字)문양 편 등은 불교사상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전체적인 내용은 죽은 사람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의례를 준비하기 위한 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을 담은 장례준비행렬도(葬禮準備行列圖)라 할 수 있다.

안휘준(서울대 교수)은 송은 선생 묘 상단에 보이는 당초문대(唐草紋帶)와 하단의 벽돌무늬, 그리고 동·서벽의 인물상들이 모두 북쪽을 향해 간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 스타일은 평양 덕흥리 고분이나 수산리 벽화고분, 쌍영총·각저총 고분 등 5세기 고구려 고분과 연관성이 있다. 박익 선생의 무덤벽화가 그보다 900~1,000년이나 앞선 고구려 벽화고분과 연관성이 있다는 건 신비로운 일.

박익 무덤에서 보이는 벽화그림. 고구려 벽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안휘준은 “혹 송은 선생이나 주변인물, 벽화제작자 중 누군가 평양이나 그 부근의 고구려 벽화를 본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도 해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심봉근은 “그 시기에 누군가가 평양의 무덤 속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벽화 상단부의 운문(雲紋)이 고구려 양식과 닮았다기보다는 1100년대 중국 요나라 무덤인 장광정(張匡正)묘의 동벽벽화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중국과의 관련성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벽화를 그린 화가도 한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게 발굴단의 짐작이다. 말 그림이라든가 매죽도 그림은 상당한 수준. 다만 일반 풍속도는 세련미가 다소 떨어진다. 두 사람 이상이 그렸다는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이 벽화무덤의 발견으로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고분벽화의 전통이 조선초기인 15세기 초까지 이어졌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무덤의 주인공이 비록 조선 초기에 죽었으나 그림의 내용은 다분히 고려적(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누누이 밝히지만 고려 벽화에 보이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표현되지 않은 점과 매화(梅花)와 대나무 그림이 10세기 초 고려의 태조 왕건과 정종의 무덤에서도 발견된 것을 볼 때 고려에 대한 묘 주인공의 충절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무튼 이 벽화묘의 발견과 조사는 우리나라 고대 회화사는 물론 당대의 복식·민속·묘제·종교 등 문화사적 의미로 보아도 실로 커다란 수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씨의 녹을 먹지 않겠소.”

송은 선생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과 교유한, 이른바 ‘8은(隱)’으로 일컬어진다.

우왕의 폐위, 공양왕 옹립 등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끝까지 정몽주·이색 등과 함께 고려를 지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동료들과 함께 낙향·은거,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켰다.


민족문화추진회가 영인한 ‘송은집’ 등을 통해 박익과 동료들의 교유관계를 더듬어 보자.

 

박익은 ‘정몽주에게 준 시’에서 읊었다.

‘송계에 숨어사는 사람을 찾아 오셨네/석양에 사립문 닫아 놓아 꽃잎은 쌓이는데/술동이 앞에 두고 나의 심정 묻노니/저기 보이는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

 

박익은 포은, 목은과 깊이 교유했다. 이색보다는 5살이 적고, 정몽주 보다는 6살 연상이었다. 특히 정몽주에게는 네 명의 아들을 보내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

선생은 이성계가 공양왕 옹립에 반대했던 이색·이종학·조민수·이숭인 등이 유배되거나 주살되자 낙향을 결심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는 시를 짓는다.

 

“恩極生難報 年深意不安/當兵行似검(쇠金변에 刃자) 臨事用如閑/公道由於直 私情沒底間/人心朝暮變 義魄豈忘還(지극한 은혜라 살아서 다 갚기 어려워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편치 못하구나/전쟁에서는 칼날처럼 행동했고, 사무에 임해서는 차분하게 일했네/공인으로서의 행실은 정직한 데서 나오는 것, 사사로운 정이 그 사이에 있을 수 없지/세상인심은 아침 저녁으로 변한다지만 의로운 혼백은 어찌 돌아갈 길 잊으랴).”

선생은 지방관으로 나서 왜구를 토벌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공무에 정직하여 사사로움이 없었다는 자부심을 한껏 펼친 시이다. 선생은 또 포은에게 낙향의 뜻을 미리 전한다.

 

“聞見先天事 榮名辱世間/莫言心內思 不似早還山(지난 날의 일들을 듣고 보니, 영화롭던 이름은 세간의 욕이네/마음 속 품은 생각을 말하지 말게나. 일찍이 산으로 돌아감만 못하리).” 

하지만 낙향한 선생은 정몽주와 이색의 권유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예조판서로 복직된다. 하지만 이성계 세력은 끝내 고려의 마지막 보루 정몽주를 살해하고 만다.

 

조선 초 문인인 김대유는 정몽주 살해 직전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죽음을 맹세하던 날, 정몽주는 박익에게 눈물로 말했다. 살고 죽는 게 천명이라고 하지만, 나는 고려왕조를 위해 죽을 것이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대와 목은, 야은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소.”

 

이에 박익도 대답했다.

“나도 이씨의 녹을 먹지 않겠소.”

정몽주가 죽자 송은 선생은 다시 밀양 송계로 낙향,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낙향 직후에는 “촉나라 흥망이 네 탓이 아닌데 누구 원수 갚으려 소리소리 피나게 우나. 하늘 높고 땅 넓어도 갈 곳 없는 나그네, 달 지고 꽃도 지니 수심만 가득하네” 하면서 고려 사직을 잃은 것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찾는다.

생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는 송은에게 판서·좌의정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태조는 “우리 조정으로서는 안된 일이지만 그는 고려의 충신이다”라고 인정해주었다.


 

황희 정승도 박익을 위한 표지문에서 “그의 맑고 깨끗한 절개는 성리학의 올바른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고 무한한 존경심을 표했다. 그런 송은은 네 아들을 불러 이렇게 유언한다.

 

“고려와 조선, 나와 너희가 사는 때는 다르다. 나는 죽어 왕씨의 혼이 될 터이니,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서 살아라. 기왕에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충성을 다하라.”


 

이렇게 어느 날 우리 곁에 홀연히 나타난 송은 선생은 풍속도로 여말선초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꿋꿋한 매화·대나무 그림으로 충절의 교훈을 던져준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