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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연필잡기와 신언서판

 
중국 당나라 때부터 통용된 관리등용의 원칙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신(체모)·언(말씨)·서(글씨)·판(판단력) 등을 두루 갖춘 인물을 뽑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은 ‘서·판’이었고, 이 서·판 시험이 끝나야 비로소 신·언 전형으로 넘어갔다.

 

옛 사람들이 판(판단력)과 함께 서(글씨)를 그 사람의 능력과 됨됨이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글씨 쓰기가 대접을 받은 이유가 있다.

 

조상들은 예부터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라거나 정신의 일부로 여겨왔다.

젓가락질 하나 변변히 못한다고, 연필 하나 제대로 잡지못한다고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과학적으로도 증명됐다. 뇌의 두정엽에 있는 운동중추의 30%가 손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논문이 있다.

 

젓가락을 사용하면 30여 개의 관절과 50여 개의 근육이 뇌신경을 자극해서 지능촉진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도 있다. 연필잡기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잘못된 글씨 쓰기 자세가 건강을 해친다.

 

연필을 제대로 잡지 못한채 글씨를 쓰면 근시의 위험이 있으며, 잘못된 자세가 유지되어 척추측만증과 어깨통증 등의 질병을 앓게 된다.

 

연필잡기가 안되면 작문실력도 떨어진다. 글씨 쓰기를 기피하게 되니 몇자 적고 마는 현상이 생긴다.

물론 엄지와 검지, 중지에 골고루 힘을 주어 연필을 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91년에도 전체 초등학생 중 단 10%만이 연필을 바로 잡았다는 통계가 소개됐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자판에 의존하는 요즘에는 더욱 글씨 쓸 일이 없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연필 하나 잡지못한다고 걱정하는 학부모도 있다.

 

교육부가 3월 새학기를 앞두고 초등 1~2학년 교육과정을 발표했다. 발표 내용 중에 ‘한글 기초 교육은 연필잡기→자음→모음…’이라는 단 한줄이 가장 부각됐다.

 

그만큼 연필잡기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리라.

 

하기야 어릴적부터 나름 글씨 좀 쓴다고 자부했던 50~60대도 부쩍 퇴화한 글쓰기 능력을 절감하고는 당혹감을 느끼기 일쑤다. 쓰지 않는 기능은 사라진다는 용불용설을 실감하게 된다.

새삼 “몽당 연필이 가장 좋은 기억력보다 더 낫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만년필로, 노트북으로 어지럽게 시를 쏟아내고 있지만 몽당연필로 시를 쓴 박목월 시인을 따라갈 수 없다는 시(김원중의 ‘몽당연필 시인’)도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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