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는 지난 2007년 경향신문 탐사팀이 중국동북방과 러시아 등을 탐사하며 기록한 연재물이다. 이미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못보신 분들을 위해 10년만에 다시 한번 정리해본다. 지금까지 동북아 문명은 세계4대문명의 하나인 중국의 황허문명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었다. 한족 중심의 중구은 동북아 문명의 근원을 잉태했다는 지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학계는 황허문명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되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발해연안의 고대문화유적을 발굴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 지역이야말로 한족이 자신의 본향으로 자부해온 중원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민족을 형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동이의 영역이었다. 황허문명보다 훨씬 일찍 태동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동이문명이 동북아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동북아 문명의 중심으로 뛰어들어보자. 기사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2007년 시점의 직함으로 소개됐다.)          


2007년 7월28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오후였다.

섭씨 36도 불볕더위 속에 츠펑(적봉ㆍ赤峰) 인근 청쯔산(성자산ㆍ城子山) 유적을 찾아 나선 길.

“일정에 없다”며 몽니를 부리는 버스 기사와 한바탕 큰소리가 오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아는 길이라고 자신했던 안내인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린다. 길을 묻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를 무려 10여 차례.

천신만고 끝에 쓰다오완쯔(사도만자ㆍ四道灣子)역에 닿았다.「다 왔나」싶었더니 아니란다. 안내원이 뭔가 흥정을 하더니 다시 마을 6인승 승합차를 타란다.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10여분 달리더니「어라!」이상한 곳으로 들어간다. 츠펑~퉁랴오(통료ㆍ通遼) 간 고속도로 공사구간이다. 아직 공사가 한창인 미개통 도로라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휙 진입해버린다.

2007년 당시 댐공사로 노출된 싼줘뎬 유적 원경. 정상에서 보면 댐공사가 한창이었다. 

‘어어!’
탐사단은 비명을 질렀다. 역주행길이다! 고속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골이 송연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 그냥 소름 돋는 스릴을 즐길 수밖에. 20여 분 간 위험천만한「역주행」의 경험을 맛본 뒤 역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등산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풀 가득한 청쯔산. 뛸 듯이 단숨에 올라갔다. 1분1초라도 빨리 올라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과연 그랬다. 시랴오허[서요하ㆍ西遼河] 상류, 평원을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초원의 정상, 그리고 수풀 사이로 펼쳐지는 끊임없는 돌. 10여 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유적의 전체 규모는 6.6제곱킬로미터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남북길이가 440미터에 동북 폭이 340미터였고 총 면적이 15만 제곱미터나 된다. 그 산은 주위에 성벽 같은 반원형의 치(雉)가 있어서 청쯔산[城子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청쯔산유적의 6개 구역 가운데 으뜸인 청쯔산 주봉의 중앙구역은 다른 곳에 비해 지세가 높고 회(回)자 모양의 돌담[성벽]같이 둘러 세워져 있다.

다른 5개 구역 역시 돌담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 안에 원형건축유구들이 10여 기씩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 동남구역이 장관을 이루는데, 거기에는 모두 73기의 건축 유구들이 분포해 있다.

동북쪽의 돌들은 크기가 무척 크고 가운데 있는 큰 돌 위에는 작은 구멍들이 여러 개 나 있다.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윤명철 교수가 돌 위에 물을 뿌렸다. 그것이 별자리인지 아니면

싼줘덴 석성의 치. 13개나 된다.

 자연적으로 난 구멍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물을 뿌려 세밀하게 관찰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별자리 같긴 한데 우리가 조사를 하지 않았으니 판단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죠.” (윤명철 교수)

남쪽 벽 바깥부분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큰 돌 위에는 뭔가 조각한 흔적이 있다. 얼핏 보면 돼지머리 모양인데, 길이가 9.3미터, 머리높이 7.5미터, 입 부분의 폭이 최소 2.1미터정도다.

다른 산봉우리에 있는 유적 가운데는 제5호 유적이 가장 큰데 지름이 120미터나 되는 돌로 쌓은 원형 건축물이 있다.

총 200기가 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을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가 시선을 잡아끈다.

곳곳에 자리한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도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6개의 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이 분명하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10곳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중국학자들의 말처럼 원시국가(古國)의 유적이 분명합니다.” (이형구 교수)

싼줘뎬의 원형제단

샤자뎬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을 돌아보던 탐사단은 너무도 익숙한 형태와 분위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한반도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대륙의 한적한 곳에서 우리 문화의 향기를 느끼다니.

탐사단이 만난 샤자뎬하층문화는 대략 BC2000부터 BC1200년까지 융성했는데 이 시기가 마침 고조선의 연대와 겹친다는 점에서 시선을 더욱 사로잡았다.


“적석총,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방식을 보면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그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이어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토기편을 수습했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그렇다면 혹시 고조선? 솟구치는 의문점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탐사단은 다음 유적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엄청난 감동과 놀라움을 선사했던 청쯔산 탐사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했다.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2007년에 막 정식 발굴을 마친 싼줘뎬유적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탐사단은 어린아이처럼 설렜다.

아직 발굴보고서도 나오지 않았고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은 ‘싱싱한’ 싼줘뎬유적을 찾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싼줘뎬 석성에는 감시를 피해 지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유적은 2005년 인허[음하ㆍ陰河] 다목적댐 공사를 하던 가운데 발견되었고 2007년 말까지 발굴이 마무리되었다.

탐사단이 찾아갔을 때도 댐 공사가 한창인 듯 여러 대의 트럭이 황톳길을 달리며 노란 연무를 흩날리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오르며 유적이 어디쯤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뿌연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역사의 흔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말이 필요 없는 풍경. 마치 청쯔산유적처럼 완연하게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끊임없이 펼쳐졌고, 제사터와 도로(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양념에 불과했다. 정상 부근에 오르자 거대한 성벽의 행렬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는데 학자들도 처음 보는 유적이라 흥분한 듯했다.

“대단하네. 치(雉)가 도대체 몇 개야?” (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줄자로 높이를 재어 보고 성의 규모를 더듬느라 바쁘다.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3미터 정도였는데, 치를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동북쪽 면에 7개, 서북쪽 면에 6개 등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은 BC2000부터 BC1500년 사이에 번성한 샤자뎬하층문화의 것이었다.

“토성에서 석성으로 접어드는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현무암으로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겁니다.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으로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이처럼 견고하게 쌓았다니…….” (이형구 교수)

멀리서 바라본 싼줘뎬 유적 모습.

구멍이 숭숭 뚫린 거친 현무암. 필자가 잠깐 상념에 빠졌다.

필자가 비무장지대 인근 민통선을 답사하면서 확인했던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석성에서는 물론, 러시아 연해주 발해의 성과 절터에서 무수히 볼 수 있는 현무암이다.

그 현무암을 이 메마른 중국 땅에서 다시 볼 수 있다니. 또 그것이 우리와 친연관계에 놓인 샤자덴 하층문화의 성이라니….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고 하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형구 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미터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막으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 4,000제곱미터였고, 건물터 수십 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지구를 포함한 발해연안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이다.

“제가 발굴한 인천 계양산성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는 강화도에 있는 전축성(塼築城)도 다 이런 식입니다.” (이형구 교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을 것처럼 멀리 떨어진 대륙과 한반도의 유적지가 이렇게 서로 닮아 있다니!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들이 하나같이 같은 배에서 나왔다고 아우성치고 있지 않은가.

쌍둥이처럼 빼 닮은 청쯔산성과 싼줘뎬유적의 축성술은 탐사단이 넘겨짚은 것처럼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진 것일까?

“다링허와 랴오허를 건너 랴오둥반도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간다고 보면 어느 정도 시차가 생기는 게 당연하죠. 청쯔산성과 싼줘뎬유적의 축성술이 고조선시기를 거쳐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졌다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청쯔산성에서 확인한 성혈. 윤명철 동국대 교수가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찬찬히 훑어보니 이 대륙의 유적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조선의 채취마저 물씬 풍겼다.

고구려와 백제가 자리 잡기 전에 동이족이 대륙에서 한반도에 퍼져 살면서 고조선을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아닐까?

뻗어나가던 생각을 이쯤에서 쉬게 하고 중국학계의 분석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랴오시[요서ㆍ遼西]의 샤자뎬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나라부터 상(商)나라까지의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한치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2070년 건국)와 같은 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와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단계의 권력을 갖춘 사회조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싼줘뎬유적에서는 석성뿐만 아니라 원형 제단과 적석총, 석관묘들이 다수 나왔는데, 한 눈에 봐도 만든 이들의 조형적 감각과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보여주었던 청쯔산유적과도 절묘하게 겹쳐졌다. 중국학자들도 동의하듯 성곽은 물론이고, 제사 공간과 주거지, 거대한 적석총과 석관묘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국정도 말이다.

이형구 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곽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왕권정도의 규모를 갖춘 국가단계의 조직사회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중국학계는 BC2000년 무렵에는 이미 중원에 하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죠. 하지만 이곳의 문화는 하나라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 랴오허와 다링허유역 즉, 발해연안과 중원 사이에는 옌산[燕山]산맥이 버티고 있잖아요.”

렇다면 고조선의 흔적일까. 물론 문헌사료가 없으니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여러 증거로 볼 때 중원 하왕조 시기에 동이족 왕국이 일어나 성을 세우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2007년 싼줘뎬석성과 청쯔산유적을 둘러본  복기대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는 백암성 같은 고구려성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또한 샤자뎬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훙[주홍ㆍ朱泓] 지린대[길림대ㆍ吉林大] 교수는 분석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샤자뎬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얼굴이 평평한 ‘고동북형(古東北型)’에 속하는데, 이와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동북지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진보한 문화주민이다.”

산시성[산서성, 山西省], 산시성[섬서성, 陝西省], 그리고 네이멍구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형(古華北型)’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하층문화의 주인공들은 중국 동북유형의 문화형태를 발전시킨 사람들이었다.

청쯔산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또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를 확인한 결과 샤자뎬하층문화는 BC2400년부터 BC130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고조선의 연대와 겹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어쨌든 막 발굴이 끝난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놀랄 만한 석성과 건물, 제단, 돌무덤을 세운 이들이 동이족의 문화전통을 확실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은 청쯔산과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도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이족의 숨결. 탐사단의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조상의 체취를 담고 있는 유적들은 조심스럽게 속살을 내비친다.

머나먼 세월의 흔적을 찾아 한 걸음씩 내딛는 과거로의 여행. 처음부터 ‘고조선의 유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급하게 나섰던 마음을 뒤로 하고 동이족 사람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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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