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경주 월성의 성벽 기단부에서 인골 2기가 발견됐습니다. 그저 휩쓸려 들어가 묻힌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람제사의 희생물로 그곳에 묻힌 것입니다. 성벽을 튼튼하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제사상을 차렸고, 두사람이 희생물이 된 것이지요. 인골이 발견된 성벽의 연대가 5세기 무렵이었으니까 1500년 전 신라의 상황이네요. 이게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2000년에는 경주의 한 우물에서 10살짜리 어린아이 인골이 거꾸로 박힌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제사에 사용된 다른 동물들의 뼈가 수두룩했고, 제사용 토기들도 즐비했습니다. 국가적인 제사행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이 불쌍한 어린아이 역시 제사의 희생물이 된 거죠. 이 인골이 묻힌 연대는 9세기 무렵이니까 1100년 정도 된 것인가요. 가만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랬으니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어땠겠습니까. 사람제사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았겠지요. 고려때도 조선때도 뭔가 민심이 흐트러질 때마다 사람제사의 유언비어가 돌았습니다. 어린아이를 희생물로 바쳐야 건축물이 튼튼해진다는 따위의 소문들이었죠. 심지어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성종 시대에도 사람제사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성종 임금의 흑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그리고 왜 옛 사람들은 생사람을 잡아 제삿상에 바쳤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가 전해드립니다.

중국 상나라 말기(기원전 1300~1046) 하늘신에게 점을 친 뒤 갑골에 기록한 점궤의 내용이다.

강족은 중국 서북쪽에 살던 유목인이다. 상나라는 강족과 같은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얻은 포로를 제사용 희생물로 올린 것이다.

희생물로 ‘백인’이 지목되었다든가, 혹은 사람(강족)과 가축(양)을 함께 올렸다든가 하는 모습에서 야만성을 한껏 드러낸다. 그러나 3500년 전의 사회를 지금의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물에 영혼이 있고 혼백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원시시대 종교의 사상적인 기초였다. 생산력이 낮고 자연재해에 무력했던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 했다.

경주 월성에서 확인된 사람제사의 흔적. 성벽의 기초부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있다. 두사람은 5세기 무렵 성벽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희생물이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해와 달, 물, 불, 비, 번개, 땅 등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농경사회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늘과 땅의 도움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신·지모신을 향한 신앙이 생겼다.

옛 사람들은 이런 자연현상을 인격화하고 의지가 있는 실체로 숭배했다. 그들을 향한 경의, 감사, 굴복, 충성, 기원의 표시로 제물을 바쳤다. 그 중 가장 신성한 희생물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제사의 희생물로 여기는 의식을 ‘인신공희(人身供犧)’, 즉 인생(人牲)이라 한다. 거북하지만 사람제사, 인간제사라 일컬으면 된다.

■짐승과 동격 취급받은 사람
상나라 말기의 도읍인 안양 샤오둔춘(小屯村) 유적에서는 21기 건축물 기초에서 인간희생물이 발굴됐다.

189개의 구덩이에서 641명의 인간희생물이 301마리의 짐승 뼈와 함께 확인됐다. 이들 대부분은 정복전쟁에서 잡은 포로나 노예였을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동격의 희생물 취급을 받았던 셈이다.

다만 무기를 지니고 앉은 채로 매장된 사람도 있었다. 어떤 희생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인채 발견됐다. 무슨 뜻일까.

대만의 고고학자 스장루(石璋如)는 “가운데 있는 사람이 먼저 희생된 후에 이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이 2차로 희생된 것”이라 해석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목이 잘려 살해됐다.

머리는 대부분 몸체 위에 놓여있었다. 아마도 살해된 후 먼저 몸체를 묻고 머리를 묻은 것으로 보인다.

상나라 종묘로 추정되는 건축물의 기초에서도 사람 및 동물 희생물이 확인됐다. 사람은 오른쪽에, 동물은 왼쪽에 배치됐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시신들은 역시 목이 잘려있었고, 그중 일부는 불에 탄 채 확인됐다. 아마도 사람제사는 머리를 베는 벌(伐)과 불에 태우는 분(焚)의 형태로 지냈을 것이다. 

상나라 초기의 도성으로 짐작되는 정저우상성(鄭州商城) 내부의 가옥 기초에서 영아 2명의 시신이 개 한마리와 함께 발견됐다.

다른 가옥에서도 영아 시신 3구와 어른 시신 3구가 확인됐다. 민간에서도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낸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다.

중국 상나라 후기 유적인 인쉬 유적에서 발굴된 유골들. 사람제사로 쓰였다.

■16살 처녀 송현이의 죽음
굳이 다른 나라의 예를 들 것도 없다.

부여는 “사람을 죽여 100여 명까지 순장시켰다.(<삼국지>·위서 동이전)”는 기록이 있다. 동옥저에서는 ”해마다 7월이면 동녀(童女)를 구해 바다에 집어넣는다“(<삼국지> ‘위서·동이전’)고 했다. 고구려에서도 “248년, 왕(동천왕)이 죽자 새 왕(중천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무덤에 와서 따라죽는 이가 많았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에서는 502년(지증왕 3년)이 되어서야 순장제도를 없앴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삼국사기>·신라본기)는 것이다. 가야는 또 어떤가. 비극적인 실증자료가 있다.

2006년 경남 창원 송현동 고분에서 무덤의 주인을 따라 순장된 1500년 전 가야 소녀의 인골이 나왔다. 복원결과 키 152.3㎝, 허리 21.5인치에 불과한 16살 소녀였다.

정강이와 좌우 종아리에서 비정상적인 뼈가 툭 튀어나왔다. 생전에 소녀가 반복적으로 무릎을 꿇고 주인의 시중을 들었다는 얘기다. 결국 이 소녀는 살아서는 뼈 빠지도록 섬기던 주인이 죽자 그만 따라죽어야 했던 가여운 신세였던 것이다.

■우물, 성벽에서 속속 드러난 사람제사의 흔적
순장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람제사를 지낸 흔적도 남아있지 않을까. 최근 그 명백한 증거가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서 확인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한창 조사 중인 경주 월성의 성벽 기초에서 신라인 2명의 유골이 누운채 발견되었다.

한 구는 키 166㎝에 이르는 남성이었고, 다른 한 구의 키는 159㎝였는데 성별을 알 수 없었다. 혹 우연히 성벽에 박힌 것은 아닐까.

아니었다. 성벽 바닥의 토층에 아주 정연한 상태로 묻혀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얼굴 주변에 나무껍질로 싼 흔적이 나타났다. 장례의식이 있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희생자를 죽여 성벽 바닥 부분 토층에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흔적이 역력하다.

중국 안양의 인쉬유적에서 확인된 사람제사의 흔적.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벽이나 제방, 궁궐을 지을 때 땅의 기운을 다스리고 무사안전을 기원하려고 바친, 사람제사 풍속의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난 것이다. 

두 사람의 인골이 발견된 토층의 연대는 5세기 무렵(서기 400~500년 사이)이다. 지증왕이 순장제도를 없앤게 502년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야만적인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제사의 희생물이 된 것일까.

뭐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이후의 고고학 자료를 봐도 사람제사의 흔적은 남아있으니까….      

지난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신관 공사터의 9세기 통일신라 시대 우물에서 10살 가량의 어린아이 유골이 확인됐다. 유골은 거꾸로 쳐박힌 형태였다.

그렇다면 장난치다가 그만 추락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수상했다.

제사음식이나 제사의 희생물로 사용된 동물뼈의 존재, 무엇보다 일부러 토기병의 입부문을 파손하고 던져놓은 행위 등은 분명한 제사의 흔적이다. 때문에 이 어린아이도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낼 때 산채로 우물 속으로 던져진 희생물이 아닐까 짐작된다.

신라에서 우물은 특별한 장소가 아닌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부인 알영이 태어난 곳이니까…. 민심이 흉흉했던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 이 가련한 아이가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다. 

상나라 유적에서 확인되는 사람제사의 흔적들.|<중국의 사람을 죽여 바친 제사와 순장>에서

■최충헌 저택의 비밀
통일신라라 하면 지금부터 불과 1100~1300년 전의 세상이다. 생각해보라. 불과 1100년 전까지 사람제사의 전통이 남아있었다는 얘기다. 소름끼친다.

그랬으니 고려시대 들어서도 사람제사 이야기는 그리 먼 옛날의 전설이 아니었다.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민간에 널리 퍼져간다. 예컨대 <고려사> ‘열전 최충헌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즉 무신정권의 실권자인 최충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최충헌이 새로운 저택을 지을 때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최충헌(1149~1219)이 땅기운을 제압하려고 비밀리에 동남동녀를 잡아 오색옷을 입혀서 공사중인 저택의 네 귀퉁이에 생매장한다”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난리가 났다. 백성들은 자기 아이를 숨기느라 혈안이 됐다. 어떤 이들은 아이를 업고 도망쳤다. 이 틈을 타 무뢰배들이 아이를 유괴한 뒤에 몸값을 빼앗고 돌려주는 일까지 생겼다.

그로부터 100년도 훨씬 지난 1343년(충혜왕 4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주인공이 임금이었다. 즉 개경 사람들 사이에서 그럴듯한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다.

충혜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 묻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삽시간에 그 소문이 퍼지자 난리가 났다.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는 자들이 있었다. 이 틈을 타 무뢰배들이 도적질을 자행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고려사절요>는 어린아이의 숫자를 50~60명이라 구체적으로 적시해놓았다. 충혜왕이 누구인가.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못난 임금이다. 결국 나라가 어지러우니 별의별 소문이 다 퍼졌던 것이다. 물론 최충헌이나 충혜왕이나 정말로 아이들을 주춧돌에 묻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조 성종 시대에 떠돈 해괴한 소문의 실체
이같은 소문은 조선조 들어서도 이어졌다.

1494년(성종 25년) 황해도 해주 관찰사 황사효가 “괴상한 유언비어가 퍼지고 있다”는 장계를 올린다.

“해주에 이런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왕자나 공주가 집을 지으면서 어린아이를 묻어서 재앙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내려 한답니다. 그래서 지방의 어린아이들을 잡아 배에 싣고 간답니다. 이 소문 때문에 어린아이를 가진 백성들이 산과 들로 피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제가 소문의 출처를 수사하고 있습니다.”

제의장소로 추정되는 경주 우물에서 확인된 10살 가량의 인골. 제사의 희생물로 바쳐진 것으로 보인다.

성종 임금이 화들짝 놀랐다.

“아이를 묻으며 재앙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낸다? 틀림없이 간사한 무리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재물을 훔치려고 벌인 흉계다. 끝까지 수사해서 범인을 색출하라.”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사관의 평가가 심상치않다.

“사신이 논평한다. 여러 군(君)과 옹주(翁主)의 집을 해마다 지어…이런 소문이 퍼지니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경기·충청·황해 등 각 도의 백성들이 모두 아이를 안고 산에 올라가 피하느라 마을이 텅비었다.”

사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 뿐 아니라 경기·충청도까지 그 해괴방측한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훗날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구전설화로 확대재생산된다.

“옹주의 저택을 지었을 때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면 넘어지고, 다시 세우면 또 넘어졌다. 대책이 없었다. 하루는 지나가던 어떤 풍수쟁이가 한마디 툭 던졌다. ‘어린애를 주춧돌 밑에 묻으면 땅의 기운을 잡아주어 기둥이 튼튼해질 거요.’ 이 말을 들은 공사책임자들이 풍수쟁이 말대로 어린아이 한 명을 잡아 주춧돌에 묻었다. 그랬더니 기둥이 넘어지지 않았다. 집도 튼튼했다. 이 말이 퍼지자 경향 각지의 백성들이 아이를 업고 숨었다.”(<한국민간전설집>)

■옹주와 왕자들의 호화저택이 빚은 유언비어 
사실 실록을 쓴 사관의 논평에 단서가 있다. “여러 군과 옹주들이 해마다 집을 지어…”라는 대목이다.

그랬다. 백성들은 성종 임금의 아들·딸(부마)들이 호화저택 건축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홍문관·사간원·사헌부 등에서 여러차례 상소문이 올라왔다.

예컨대 1493년(성종 23년) 12월23일, 지평 강형과 홍한 등이 그러한 사치풍조에 제동을 건다.

“부마(옹주의 남편)와 여러 군(임금의 아들) 저택공사가 너무 화려합니다.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종이 짜증을 부렸다.

“이미 규모에 맞게 지으라고 누차 말했다. 뭘 또 고치라는 거냐.”

그후 9개월이 지나도 흉흉해진 민심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가뭄 때문에 곡식이 익지 않았고, 초가을인데도 우박은 물론 눈까지 내렸다.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마저 큰 손상을 입었다.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이 못참겠다는 듯 나섰다.

“어째서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기상이변이 이어지는 것입니까. 왜 수해와 한재만 일어납니까. 전하께서 마땅히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성세명은 본격적으로 ‘지적질’ 해댄다.

“여러 군과 부마의 호화저택에다 제천정(한강변 정자)까지 짓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신음이 ‘영차’ 하는 소리와 어우러집니다. 목불인견입니다. (쓸데없는 공사에) 쓸 돈을 돌려 기근 구제에 사용한다면 백성 1000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1000명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다면 (임금이)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습니까.”

무시무시한 직언이었다. 성종은 오히려 상소문을 올린 간관들을 타박하면서 책임을 정승과 재상에게 슬쩍 돌린다.

“왕자와 부마 집을 짓는 자들은 군역을 맡고 있는 병사들과 공장(건축기술자)들 뿐이다. 그들이 흉년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또 백성을 피곤하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킨다고?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왜 정승과 재상이 직언하지 않고 자네들이 나서는 것인가.”

재상과 정승도 가만있는데 어찌 자네(홍문간 부제학 성세명)가 나서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세명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흉년이 들어서 민심이 흉흉합니다. 비록 군졸과 기술자들이 공사를 맡는다 해도 백성의 원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거꾸로 박힌 어린아이 유골과 제사용 토기, 동물뼈 등이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우물. |국립경주박물관 

■“그러고도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서슬퍼런 직언을 해대도 성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자와 옹주들이 나와 가깝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을 뿐이다. 만약 여기서 공사를 중단하면 공장(건축 기술자)들은 손놓고 놀고 있으라는 거냐.”

그러면서 성종은 성세명의 상소를 재상·정승들에게 보여주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임금의 역성 좀 들어주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윤필상·이극배·노사신·한치형·유지 등 명공대신들은 한결같이 “홍문관의 상소가 맞다”고 했다.

“지금 주상께서 정승·재상들이 가만 있는데 홍문관 부제학이 뭔데 나서냐고 하셨습니까. 책임을 대신들에게 돌리셨군요.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홍문관의 상소는 진실로 정성스럽고 바릅니다. 정확합니다.”

성종은 재상·정승까지 나서 홍문관 부제학만 옳다고 하고, 임금의 말을 무시한다고 여겨 울컥했다.

“임금의 말은 무시하고, 모두 홍문관만 옳다고 하는구나.”

이후 사간원 사간 홍형과 헌납 남세담 등이 “작금의 재변은 모두 왕자·옹주의 호화저택 건축 때문에 일어났다”는 후속 상소문까지 올렸다.

“왕자·옹주의 집 건축에 소요되는 재목을 어디서 벌채해오는 줄 아십니까. 황해도까지 가서 해옵니다.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상이변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끝끝내 대신들의 상소를 외면했다.

“왕자·옹주의 집 규모는 이미 정해졌고, 재목도 정당한 돈을 주고 구입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생매장’ 소문이 퍼진 사연의 전말이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 하지 않는 임금과 왕족의 행태를 백성들이 흉흉한 소문으로 꾸짖고 있는 것이다.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의 ‘흑역사’라 할 수 있다.

■법정소송으로 번진 어린아이 생매장 사건
1523년(중종 23년)과 1554년(명종 9년)에도 어린아이 생매장 소문이 생산된다.

특히 1523년에는 법정소송으로까지 번졌다. 즉 상주에 사는 심무지기와 이은 등 두 사람이 아이들을 잃어버렸다. 아이를 찾지못한 두 사람은 때마침 새 집을 짓고 있던 이웃(이성동)을 의심했다.

‘분명히 저 자가 집을 지으면서 아이들을 묻었을거야.’

두 사람은 이성동을 관가에 고발했다. 얼마후 다른 곳에서 아이들의 시신을 찾았는데 입 속에 흙이 들어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 보라’고 앙앙불락했다.

“우리가 송사를 벌이니까 이성동이 자기 집 주춧돌에 묻은 아이들을 꺼내 다른 곳에 유기한 게 틀림없습니다. 아이들 입에서 흙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 사건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다. 결국 중종 임금이 주재한 가운데 잘잘못을 따졌다. 결국 “그럴 리 없다”는 쪽으로 마무리됐다. 아이들 입속에 든 흙의 색깔이 용의자(이성동)의 집 흙빛깔과 같은게 유력한 혐의점이었다.

그러나 같은 마을의 흙이라면 색깔도 같을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그러자 중종은 성종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수사종결’을 선고했다.

“성종 때도 집을 지을 때 아이를 죽여 묻어야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두 사람도 아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더는 추문하지 마라.” 

경주무화재연구소가 발굴중인 경주 월성현장

■‘민심이 불안하면 유언비어가 신나게 돌아다닌다’
1554년(명종 9년)에도 “어린아이 생매장의 참언이 퍼졌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1년 전인 1553년 경복궁 화재로 불에 탄 사정전·흠경각·강령전 등을 중건하는 공사가 벌어지던 때였다. 

“근자에 도성 안에서 ‘대궐을 지을 때 2∼3 살 영아를 산 채로 주춧돌 밑에 묻으려 한다’는 요망한 말이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 시내가 그 때문에 난리 났습니다. 성종 때 왕자와 부마의 집을 지을 때 이런 말이 있었는데….”

여기서 당시 영경연사 상진의 한마디가 인상깊다.

“이런 요망한 말이 떠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백성을 어린 아이처럼 돌본다면 백성은 임금을 부모처럼 우러러 볼 것입니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한다고 임금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상진이 덧붙인 말이 무시무시하다.

“백성들이 곤궁하고 심지가 안정되지 않으면 이런 유언비어가 소문이 돕니다. 전에도 여자가 용(龍)을 낳았다는 말이 있어 온 성안이 웅성거렸습니다. 민심이 흉흉한 때에 갑자기 호걸이 나와 교화를 막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상진은 이처럼 어지러울 때 호걸이 나타나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의 논평도 당대 뒤숭숭한 세간의 민심을 생생하게 전하고 전하고 있다.

“경복궁 중창 공사가 있었는데 ‘어린 아이를 땅에 묻어야 한다’는 시중에 떠들썩하게 돌았다. 백성들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어수선한 틈을 타 아이가 있는 백성들을  협박해서 뇌물을 챙기는 자까지 생겼다.”

사관의 다음 한마디가 핵심을 찌른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면 유언비어가 아주 신나게 돌게 된다. 그러니 민심이 동요하기 쉽고, 이런 유언비어를 진압하기는 힘들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많았다.”

상나라 무정왕의 부인인 부호묘에 순장된 인골의 모습.

■태종우를 아십니까
사람제사와 관련해서 상나라의 건국자인 성탕의 미담이 전해진다.

즉 성탕은 하나라(기원전 2070~1600)의 폭군인 걸왕을 쫓아내고 상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7년이나 가뭄이 이어졌다.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관이 점을 치니 “사람을 희생물로 제사지내야 한다”는 응답을 얻었다. 그러자 성탕은 손수 제물이 되겠다고 나섰다. 목욕재계하고 손톱을 잘랐으며 머리를 깎고 흰 띠풀을 깔았으며, 그 위에 누워 스스로 희생물을 자처했다.

그러자 단비가 쏟아져 사방 수천리의 땅을 촉촉히 적셨다. 성탕의 시대에 인간 제사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반증해주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조선조 태종이 바로 이 상나라 성탕의 고사를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에 음력 5월10일에 내리는 비를 특별히 ‘태종우(太宗雨)’라 했다. 태종 임금이 내려준 비라는 뜻이다.

조선말기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 ‘문헌지장’편을 보면 이 태종우의 유래가 잘 나와있다.

“5월 10일은 태종의 기일이다. 태종 만년에 승하하실 날이 얼마 남지않았을 무렵, 날이 몹시 가물었다. 나라 전체가 기우제를 지내느라 부산을 떨었다.

이때 태종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가뭄이 드니 백성들이 어찌 살라는 것인가. 안되겠다. 과인이 하늘에 올라가 천제에게 즉시 단비를 내려달라고 고하겠다’고 했다.

과연 이튿날 태종 임금이 승하했는데, 곧 단비가 경기도 일원에 내려 풍년이 들었다. 이후로 해마다 5월10일 되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일컬어 ‘태종우’라 했다.”

그런데 민간의 속설은 한발 더 나간다.

“태종 말년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태종은 ‘임금이 부덕한 탓’이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자 태종은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하고,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붙기고 비가 내리기를 간구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장작불이 꺼졌다. 해마다 이날 전국적으로 비가 왔는데 이 비를 태종우라 한다.”(<한국대표야담집> 2)

처음엔 태종이 죽은 뒤에 하늘에 올라가 천제를 만나서 비를 뿌리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완전히 바뀐다.

태종임금이 스스로 기우제의 희생물을 자처해서 실제로 장작더미 위에 앉아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상나라 성탕의 고사를 덧붙인 것이 틀림없다.   

후대의 임금들도 이 속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사인 <영조실록>에도 ‘태종우’가 나온다.

“1764년 5월10일 비가 약간 내렸다. 영조는 ‘이는 조상(태종)의 덕분’이라고 했다. 해마다 이날이면 문득 비가 내리니,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 그래서 임금이 언급한 것이다.”

선조~인조 때의 문신인 박동량(1569~1635)이 쓴 <기재잡기>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들어있다.

즉 “1591년 5월 10일 근 200년 만에 처음으로 태종우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했다”는 것이었다. 이 언급이 사실이라면 태종의 승하(1422년) 이후 1590년까지 해마다 5월10일이면 어김없이 태종우가 내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랬던 태종우가 내리지 않았으니 조짐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니 태종우가 내리지 않은 조짐이 전란으로 이어진 것인가.

아마 당대 조선의 일부 백성들은 이렇게 믿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조시대엔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이라도 나서 인간제사의 희생물을 자처했다. 비록 사람을 진짜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임금이 ‘쇼’라도 해서 하늘과 조상의 보살핌을 받는 설화로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학예실장과 이인숙 학예연구사가 기사 작성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황전악, <중국의 사람을 죽여 바친 제사와 순장>, 김용성 옮김, 학연문화사, 2011
서경호, ‘고대중국의 인순과 인생의 초보적 검토’, <중국인문과학> 제5집, 중어중문학회, 1986
김현희, <우물에 빠진 통일신라 동물들>, 국립경주박물관, 2011
최운식, ‘인신공희 설화 연구’, <한국민속학> 통권 제10호, 한국민속학회, 1999
이기환·이형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성안당,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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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