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한(漢) 고조 유방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漢) 고조(유방)의 어머니 유오가 연못가에서 잠깐 잠든 사이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때 아버지 태공이 달려가 보니 교룡(蛟龍ㆍ큰 물을 일으킨다는 용)이 부인의 몸에 올라가 있었다. 얼마 후 유오가 임신하여 고조를 출산했다.”

얼마 후 유오가 임신하여 유방을 낳았는데, 얼굴이 용을 닮았으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 고조 유방은 용(교룡)의 자손인 셈이다.

이 책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한술 더 떠 “고조는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와 용을 닮았다(隆準而龍顔)”고 했다. 임금의 얼굴을 뜻하는 “용안(龍顔)”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젊었을 때 무뢰배였던 유방은 동네 술집에서 외상술을 먹고 술에 취해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때 그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났는데 고조가 외상술을 먹는 날이면 그 주막의 매상이 몇 배나 올랐다고 한다.

비단 유방뿐이 아니다. 태양신이자 농업의 신인 신농씨(神農氏ㆍ염제)의 탄생 전설에도 용이 등장한다.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女登)은 볕을 쬐려고 나들이에 나섰다가 신비로운 용을 보았다. 여등은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임신한 것이다. 여등은 열 달이 지난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염제 신농씨였다.

청와대 앞 광장에 조성된 봉황상. 봉황은 지도자의 상징이다.

예를 더 들 것도 없이 한족은 ‘용=황제’이며 스스로를 용의 자손이라 믿어왔다.

용은 봉황과 기린, 거북과 함께 ‘4령(靈)’의 하나였는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물의 제왕이며 농경중심 사회에서 치수를 담당하는 지배자는 용에 비유됐다.

『광아(廣雅)』익조(翼條)에 따르면 용은 아홉 가지 짐승의 장점만을 다 땄다. 중국 위(魏ㆍ220~265년)의 장읍(張揖)이 찬술한 자전(字典).『박아(博雅)』라고도 한다. 주(周)의 주공(周公)이 BC 2세기경에 지은 중국 최고(最古)의 자전(字典)인『이아(爾雅』를 증보한 것이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입 주위에 긴 수염, 턱 밑에 명주, 목 아래는 역린이 있다.”

이 가운데 비늘은 81개가 있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으며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다.

목 아래는 거꾸로 박힌 비늘 즉, 역린(逆鱗)이 있다. 그런데 한비자(韓非子ㆍBC 280∼BC 233년)는 유세(遊說)의 어려움을 피력한 ‘세난(說難)’이란 글을 남겼는데, 역린을 언급한 내용이 무척 재미있다.

“용이란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을 탈 수도 있다. 하지만 목 줄기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역린)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그 사람을 죽여 버린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를 할 수 있다.” (『사기』 「한비자열전」)

전국시대 때 세치의 혀로 시대를 좌지우지한 유세가 들이지만 군주의 심증을 살펴가며 혀를 잘 놀려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용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상나라(BC1600~BC1046년) 때는 악어와 뱀, 제비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서주(BC1046~BC771년) 때는 입을 벌린 채 세 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의 특징이 나타난다.

통일 진나라(BC221~BC206년) 때는 봉황, 악어, 도롱뇽, 뱀이 복합된 응룡(應龍)이 등장한다.

 ‘용의 후손’이라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BC206~AD220년)에서는 사방신(四方神)의 하나인 청룡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세 개의 발톱을 가진 것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용은 한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에 융성했던 차하이 마을에서 즉, 현대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동이의 고향 발해연안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와 용이 부조된 토기들이 발견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각장 용 유물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연산산맥[만리장성]을 중국의 마지노선으로 여겼어요. 만리장성을 쌓은 까닭이 무엇이겠어요. 장성을 넘으면 그것은 중원이 아니고 오랑캐의 땅이라 여겼거든.” (이형구 교수)

그런 가운데 8,000년이나 된 차하이유적에서 용이 발견되자, 숱한 격론을 벌인 끝에 차하이를 중화의 본향이라는 의미를 담아 ‘중화 제1촌’으로 인정하는 고육책을 쓴 것이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용 신앙은 한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역사를 봐도 용과의 관계는 뿌리가 매우 깊다.

우선『삼국유사』북부여조에는 “BC58년 4월 8일 해모수(解慕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창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책 신라 탈해왕조를 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재위 BC57~AD4년)의 왕비 알영을 낳은 것은 계룡(鷄龍)이며, 신라 4대 왕 석탈해(昔脫解ㆍ재위 57~80년)는 용성국(龍城國) 왕과 적녀국(積女國) 왕녀의 아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책 백제 무왕조를 보면 백제 30대 무왕(武王ㆍ재위 600~641년)은 과부(寡婦)인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며, 『순오지(旬五志)』)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시 평론가(詩評論家)인 현묵자(玄默子) 홍만종(洪萬宗ㆍ1643~1725년)의 문학평론집에는 소정방(蘇定方)이 백마강의 용을 잡고서야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조를 보면,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은 평소 “죽으면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용은 절대 권력과 호국의 상징이었다.

봉황과 용이 함께 표현된 백제 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삼국유사』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에 따르면, 문무왕(文武王ㆍ재위 661~681년)은 자신의 말대로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었고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ㆍ재위 681~692년)은 682년 감은사 금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다. 용(문무왕)의 출입문을 만든 것이다.

수호신으로서 용 이야기는 『삼국사기』,『삼국유사』,『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된 것만 해도 86편이나 될 정도다. 『삼국사기』에는 최소한 23건, 『삼국유사』에는 24건의 용 관련 기록들이 나타난다. 『고려사』「고려세계(高麗世系)」를 보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ㆍ재위 918~943년)도 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서해바다 한복판에서 부처로 변신한 여우에게 핍박을 당하는 용왕을 구해주고 그의 딸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한다. 작제건과 용녀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이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이다. 그러니까 왕건의 할머니가 용인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왕건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용이라는 신성한 존재를 통해 보장받았다고 하여 아예 ‘신성(神聖)’이라 자호하였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용 관련 유물들이 차고 넘친다. 고구려의 경우 무용총, 삼실총, 장천 1호분, 약수리 벽화분, 덕화리 1호분, 호남리 사신총, 강서중묘 등에 사신도의 일원으로 청룡이 등장한다.

신라의 경우도 고리자루칼, 청동초두, 허리띠 장식, 와당, 서수형 토기 등에 용이 표현됐다. 백제도 무령왕릉의 팔찌, 동탁은잔, 고리자루칼, 금동대향로 등의 유물에 용을 넣었다.

1997년 11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못을 정비하던 조사단은 흥미로운 유물을 수습했다. 연못바닥에서 구리로 만든 용이 나온 것이다.

그 용은 길이가 146.8센티미터이고 폭이 14.2센티미터에 이르렀으며 무게는 66.5킬로그램이나 나갔다. 혀를 길게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채 해학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경회루 바닥의 용은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 조선의 지배자는 경복궁 연못에 왜 이런 용을 집어넣었을까?

‘물의 신(神)’인 용은 불을 다스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꽃 모양의 산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경복궁은 풍수지리로 볼 때 불에 아주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불을 다스리기 위해 연못을 조성했는데, 이것도 모자라 불을 다스리는 용 조각품까지 집어넣은 것이다.

우리 역사의 용들과 ‘차하이 용’이 머릿속에서 춤추듯 어우러지는 순간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전통적으로 용은 한족의 상징이라고 하고 동이족의 토템은 ‘새’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이의 상징이라는 ‘새’는 어찌된 걸까?

2,400년 전에 조성된 유적인 대전 괴정동에서는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려 넣은 농경문 청동기가 발굴되었는데, 청동기 뒷면에는 새 한 쌍이 서로 마주보는 모양의 솟대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때까지는 용이 임금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봉황이 나라의 통치자인 대통령을 상징한다. 그만큼 새 신앙은 우리 역사에서 그 뿌리가 매우 깊다.

경복궁에서 출토된 용 유물.

동이족의 상징이었던 새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았다가 어떤 이유로 거의 사라져 버렸는지 궁금하던 차에, 선양(심양ㆍ瀋陽) 신러[신락ㆍ新樂]유적에서 마침내 하나의 단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차하이에서 1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신러유적은 차하이유적보다 약 500년 늦은 7,500년 전에 조성된 유적이다. 그런데 희한한 유물이 하나 소개됐다.

“자, 이 유물은 권장(權仗ㆍ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이라는데 새 모양이잖아요.”

이형구 교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1978년 5월, 신러유적에 대한 2차 발굴조사를 벌이던 선양시 문물관리국은 가장 큰 주거지(제2호 방)에서 한 점의 탄화된 나무지팡이를 발견했다.

이 지팡이는 길이가 38.5센티미터에 폭은 4.8센티미터였으며 두께는 1센티미터였다. 연구자들은 이 유물이 새의 부리와 머리, 눈, 코, 꼬리를 조각한 것으로 새를 토템으로 삼은 씨족이 남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러 주거지 유적에서 확인된 권장(權仗). 용과 새의 모티브가 겹쳐져 있다.

“7,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이토록 정교한 목조예술품을 만들었다니 정말 놀라워요! 신러유적은 당시 번영했던 원시 모계씨족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죠.”

신러유적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5,000제곱미터 범위 내에 16기의 주거지가 있다. 그 가운데 지팡이가 확인된 가장 큰 주거지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100제곱미터에 이르는 주거지에서는 갈지자 문양의 토기를 비롯해, 불씨와 재를 살리고 운반한 것으로 보이는 사구기(斜口器ㆍ비스듬한 입 모양을 가진 토기) 등이 쏟아졌다.

세 번에 걸쳐 시굴한 끝에 석기 800여 점과 세석기 700여 점을 발굴했는데, 그 결과 신러사회가 채집 및 수렵생활을 하면서도 이미 원시농업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러 권장을 전시한 신러 박물관의 전시모습. 동이족은 용과 새를 함께 모셨다.

그리고 공예품을 만든 장소도 드러났는데, 이는 신러사회에서 사회분업과 분화가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차하이를 대표하는 용과 신러의 상징인 새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용과 새가 겹쳐진 듯한 권장을 세밀하게 살피던 이형구 교수가 의견을 내놓는다.

“이 유물만 놓고 본다면 지금으로부터 7,000~8,000년 전 발해연안에 살던 사람들은 용과 새를 함께 모신 게 아닐까요?”

이 교수는 차하이ㆍ싱룽와 문화와 신러문화의 뒤를 잇는 훙산문화에서도 용과 새 문양의 옥 제품이 섞여 나온 것에 주목했다. 그 유물의 주인공들이 용과 새를 함께 모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앞서 우리 민족과 용의 밀접한 관계를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로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과 새의 관계 또한 긴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예를 든 부여 창업주 해모수와 신라 박혁거세, 석탈해신화는 용은 물론이고 새를 상징하는 천강(天降ㆍ하늘에서 내려오는)신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용과 새가 같은 신화에서 공존한다는 뜻이다.

신러에서 확인된 권장을 소개하고 있다.

용과 봉황의 조화는 백제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굴되자 전문가들은 깜짝 놀랐다. 향로는 크게 뚜껑과 꼭지, 몸체와 받침 등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뚜껑 꼭지를 보자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활짝 편 채 날고 있지 않은가.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이 3개 마련돼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의 받침대는 용의 형상이었다.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승천하는 듯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지금 막 승천하는 듯 몸을 곧추 세운 역동적인 모습을 한 용이 입을 벌린 채 향로를 받치고 꼭대기에는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봉황이 날고 있다.

용은 물과 하늘을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에 천계를 넘나드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가교.架橋]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한족들은 용을 신성한 존재로 떠받들어 왔지만 새는 그렇게까지는 신성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관장의 말에 주목해 보자.

신라 경주에서 출토된 용모양 토우.

“지금까지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로 여겨져 숭배되어 왔지만 용에 대한 숭배는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 형태를 띠었죠.”

다만 동이의 나라인 상나라만이 난생신화를 건국신화로 삼고 있다.『사기』「은본기(殷本紀)」를 보면 “상의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이 제비 알을 삼켜 임신한 뒤 낳은 이가 바로 설(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용과 새를 동시에 신성시한 종족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었다는 뜻이다.
 
■태평성대와 제왕을 상징하는 봉황

상상의 새인 봉황은 모든 동물의 우두머리인 용과 학이 연애해서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서로움을 뜻한다. 봉황은 성인이 탄생했을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원래 봉(鳳)이라는 한 글자였지만 나중에 수컷 봉(鳳)과 암컷 황(凰)이 결합해 봉황이 되었다.

중국 동한 때인 AD 100년 허신(許愼)이 편찬한 사전(辭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봉황의 암컷과 수컷은 오동나무에 사이좋게 살면서 예천(醴泉ㆍ평화의 시대에 단물이 솟는 샘)을 마시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고 했다.

“봉황의 모습은 앞은 기러기, 뒤는 기린, 턱은 제비, 입부리는 닭,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이마는 황새, 뺨은 원앙, 몸의 무늬는 용, 등은 거북이라고 했어요.” (천진기 관장)

등장하는 동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기러기는 군신(君臣), 친구(親舊), 부부(夫婦)의 신의를 생명처럼 지키는 큰 인물을 상징하며, 기린은 성인의 시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동물이며 현인을 뜻한다.

제비는 천녀(天女)와 귀녀(貴女)를, 닭은 여명의 신호탄을 쏘는 영험함을, 뱀은 다산과 풍년을 상징한다. 또 비늘 모양이 갑옷을 닮은 물고기는 병권(兵權)을, 황새는 고귀와 고결, 장수를, 원앙은 부부애를, 용은 큰 인물을, 거북이는 불의 재앙을 막아주는 물의 신을 가리킨다.

청와대 앞 광장에 조성된 봉황 조형물. 

봉황은 특히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오덕(五德)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푸른 머리는 인(仁), 흰 목은 의(義), 붉은 등은 예(禮), 검은 가슴은 지(智), 노란 다리는 신(信)을 상징한다.

또 살아있는 곤충과 풀은 먹지 않고 자연의 절도에 맞는 것만 먹고 마시며 오색 깃털에 다섯 가지 묘한 음색을 낸다고 한다.

“이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는 봉황은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겨졌어요. 이것은 제왕이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했죠.” (천진기 관장)

런 이유 때문에 천자의 도읍이었던 중국 장안(長安)을 봉성(鳳城)이라 했고 궁중의 연못을 봉지(鳳池)라 했다. 봉황은 바로 천자를 미화하는 상징이었다.

“높은 벼슬을 봉경(鳳卿), 좋은 벗을 봉려(鳳侶), 아름다운 누락을 봉루(鳳樓)라 하는 등 봉(鳳)자가 들어가는 말에는 나쁜 말이 없어요.”

평화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말로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는 “봉황래의(鳳凰來儀)”라는 말도 있고, 백성을 다스리는 군왕의 덕목과 같다 해서 조선시대에도 경복궁의 천정에 봉황무늬를 넣었다.

이 봉황은 1967년부터 대통령표장과 엠블럼 문양으로 채택되어 40여 년간 사용되었으며, 역대 대통령들이 보낸 선물에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지도자의 덕목을 되살리고, 태평성대를 예고한다는 봉황이 2000년대 들어 수난을 겪고 있다. 2005년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문양이 새겨진 골프공을 연말선물로 돌려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 취임식 전에 권위주의를 타파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봉황문양을 대통령 엠블렘에서 빼기로 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이 방안은 법령(대통령 표장에 관한 공고)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이고, 그동안 굳어진 상징성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무산되었다. 

필자는 청와대 분수대에 서 있는 봉황 조형물을 지나친다. 무궁화로 덮인 지구의 위에 봉황이 올라선 모양이다. 1985년 전두환 정권 때 건립됐으며, ‘지도자의 상징’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봉황 한 마리가 조각된 이 조형물을 두고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봉황은 원래 암수 두 마리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한 마리만 조각되었기 때문에 청와대만 들어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쨌든 수 천 년 간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상서로운 새 봉황이 권위주의의 앞잡이로 전락하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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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