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는…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로…조선고유색을 현양한 진경문화를 주도한…진경산수화법의 창시자요 대성자였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연구자인 최완수는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잃지 않게 한 겸재야말로 마땅히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로 꼽았다.
왜 이런 평을 내렸을까. 정선이 활약하던 시기, 조선은 한낱 오랑캐로 치부하던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통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중국 문명의 전통이 조선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조선중화주의라는 것이다.

겸재야말로 중국풍을 답습하던 전대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금강산과 한양 등 조선의 강산을 직접 답사한 뒤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화의 새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화가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조선중화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적’ ‘민족적’ 산수화풍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위인전을 읽는 듯한 표현이 눈에 띈다. ‘마땅히 화성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로 꼽고 있으니 말이다. 겸재는 그렇게 무오류의 화성일까.
너무 일방적인 극찬은 아닐까. 오히려 지나친 신봉이 오히려 겸재의 진정한 가치를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겸재가 밀려드는 그림 주문 때문에 대충대충 그린 작품이 적지않다면 어떨까. 아니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 아예 아들이나 혹은 제자까지 대필화가로 고용했다면 어떨까.

 

■겸재의 두 얼굴, 두 그림
과연 그런 그림들이 있었다.

장진성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의 논문(‘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 <동악미술사학> 제11호, 2011년)을 보면 흥미로운 분석이 나온다.

 

우선 삼성미술관 리움의 ‘내연산삼용추도’와 국립중앙박물관의 ‘내연산삼용추도’를 비교해보라. 겸재는 58살이던 1733~35년 사이 경북 청하(포항) 현감을 지낸바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내연산삼용추도’. 내연산 삼용추긔 장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무렵 그 지역 명산인 내연산의 폭포를 몇 점 그렸다. 그런데 리움 소장 그림과 박물관 소장 그림의 질이 사뭇 다르다.

리움의 ‘내연산삼용추도’는 산 정상에서 폭포수가 떨어져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다. 겸재 특유의 힘차면서도 율동적인 필획이 등장한다.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로 표현된 암산은 거대한 기세로 화면을 압도한다. 길게 쪼개지며 내려오는 절벽의 바위결을 시원하게 묘사하고 상중하 삼용추의 폭포길이를 급격하게 줄여가며 세찬 흐름을 표현했다. 화면 전체에 남아있는 빠른 붓질의 흔적은 겸재가 얼마나 붓을 빨리 움직여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의 ‘내연산삼용추도’의 그림은 어쩐지 겸재 답지 않다.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필법으로 내연산을 묘사하고 있다. 폭포의 장관을 전혀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번의 형식적인 붓질로 폭포에서 내려온 계곡물을 표현하고 있다. 암산과 소나무 역시 반복적인 형태와 조악한 필묵법을 보여준다.

비단 ‘내연산삼용추도’ 뿐이 아니다. 간송미술관에는 겸재가 그린 ‘정양사’ 그림이 두 점 있는데 작품의 질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겸재 작품이 맞나
금강산 정양사는 유서깊은 절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의 주인이라는 담무갈, 즉 법기보살을 친견하고 창건한 절이다. 담무갈은 1만2000명의 보살을 데리고 항상 금강산에서 설법하고 있다는 보살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란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정양사는 바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잘 그린 정선의 ‘정양사’를 보면 정양사 일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俯瞰視) 기법으로 포착했다. 마치 드론으로 사진을 찍는 듯한 느낌이다. 정양사 경내의 건축물과 주변의 토산, 원경의 암봉들이 안정된 구도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내연산삼용추도’. 이 역시 겸재의 작품이지만 다소 반복적이고 진부한 필법으로 내연산을 묘사했다. 

 

“그러나 같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정양사’ 그림을 보세요.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미점(米点·붓을 옆으로 뉘여서 횡으로 찍는 점법. 송나라 화가 미불이 창안했다 해서 미점이라 한다)으로 토산을 그렸습니다. 경내 건축물은 또 어떻습니까. 잘 그린 앞의 그림에 견줘 매우 소략하게 그려져 있습니다.”(장진성 교수)

이 두 작품 뿐이 아니다.

간송미술관의 <신묘년풍악도첩> 중 ‘총석정’과 개인소장의 ‘총석정’ 또한 같은 겸재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차이가 난다.

간송미술관 소장 ‘총석정’은 묘사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에서 속필을 사용한 표현주의적 화풍으로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 소장의 ‘총석정’은 거칠고 빠른 붓질로 총석정과 주변 경관을 그렸다. 묘사적인 화풍에서 매너리즘화한 화풍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간송미술관의 ‘만폭동’과 왜관수도원 소장의 ‘만폭동’ 또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목멱산(남산)’ 또한 겸재의 그림 답지않은 조악한 그림이다.

 

개인소장의 ‘비로봉’ 역시 마찬가지다. 겸재 정선이 부여한 제목, 즉 ‘비로봉’ 글씨가 없었다면 그제 동네 뒷산을 그렸을 법한 평범한 그림이다. 일반적인 산수화 같다는 것이다. 특정적인 현장감과 사실성이 결여됐으므로 비로봉의 지형적인 사실성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한번에 쓸어내리듯 그리는 일필휘쇄
아니 ‘추앙받아야 할 화성(畵聖)’의 작품인데, 대충 그렸거나 심지어는 대필작가에 맡긴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간송미술관 소장의 ‘정양사’ 두 작품. 장진성 교수는 “왼쪽 ‘정양사’는 정양사 일대의 경관을 하늘에서 조망한 부감시를 써서 포착한 작품이지만 오른쪽 ‘정양사’는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미점을 썼다”고 평했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3재(齋)’로 일컬어지는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겸재평’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즉 풍속화·인물화에 능통한 조영석은 겸재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만약 만리강산의 풍경을 한번에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一筆揮灑)로 그려낼 경우 필력의 웅혼함, 기세의 유동은 내(조영석)가 자네(정선)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네. 그러나 가느다란 털, 머리카락 한 올을 한치의 틈없이 정교하게 그리는 데는 자네가 나에게 조금은 양보해야 할 것일게.”(심재의 <송천필담>)

개인소장의 ‘비로봉’. 겸재의 비사실적이고 태만한 필법의 전형적인 그림이라는 장진성 교수의 평이다.

 

무슨 말인가. 겸재는 그야말로 일필휘쇄, 즉 한번에 쓸어내리듯 재빠른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조영석은 한마디로 “자네가 빨리 그리기는 하지만 정교한 면에서는 나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평한 것이다.

이런 평은 겸재(1676~1759)의 평생 절친인 이병연(1671~1751)의 평가에서도 볼 수 있다.

 

즉 1712년 겸재는 당시 강원도 김화(금화) 현감이던 이병연의 초대로 금강산을 유람한 뒤 <해악전신첩>을 제작했다. 이때 안개속 비로봉을 그리는 겸재의 모습을 본 이병연의 평가글이 남아있다.

“내 친구 정선은 주머니에 그림 그리는 붓이 없어/ 때때로 그림 그리는 흥취가 나면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 갔네./ 금강산에 들어와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이 더욱 방자해져서/ 백옥같은 만이천봉 하나하나 점찍어 그리고/ 놀랍도록 꿈틀거리는 구룡폭 어지러운 비바람 일어나게 그리네.”

 

■더욱 방자해진 붓놀림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더욱 방자해진 쓸어내리듯한 붓질’(揮灑太放恣)이라는 표현이다. 또 이병연의 이어지는 평은 겸재의 스타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선이 문득 한번 웃더니 먹만으로 젖은 듯 그려내니/ 전신이 더욱 기이하고 뛰어나 옅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 하네./ 나를 보고 또 가지고 가라하니 관아의 창 가운데 놓아두었네.”

이병연의 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겸재가 한번 씩 웃더니 내(이병연) 손에서 붓을 빼앗아 일필휘쇄로 쓱쓱 비로봉을 그린 뒤 ‘자 이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단 이 그림 뿐이 아니다.

이른바 겸재의 ‘일필휘쇄’ 이야기는 이곳저곳에서 나온다.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목멱산’. 밀려드는 그림주문 탓에 형식적인 그림을 그려준 것 같다는 평이다.

 

조선 후기 문인 신돈복(1692~1779)의 야담집 <학산한언>에는 어떤 역관이 연행(燕行)을 떠나며 겸재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잠시 휘쇄법을 사용해서(暫加揮灑) 파도가 소용돌이 치는 바다 위에 떠있는 돛단배 그림 한 폭 그려주시면….”

또 조영석이 겸재에게 ‘절강추도도’를 부탁했는데, 그 또한 “순식간에 붓을 휘둘러 거친 파도가 이는 가을 강 풍경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조영석의 <관아재고>)

 

■밀려드는 그림 주문량
여기서 말하는 겸재의 ‘휘쇄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조선 후기의 문인 이규상(1727~1799)의 인물평에 그 단서가 나와있다.

“정선의 그림은 생동하여 원기가 있었다. 그러나 붓놀림은 거친 기운을 띄었다. 화폭 가득한 그림이라 할지라도 한 점의 붓 흔적과 먹 자국도 없었다. 일국의 그림 요구에 응하여 종이와 비단에 붓을 쓸어내리듯 휘둘러 그린 것이 얼마나 되는 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이규상의 <병세재언록>)

장진성 교수가 주목한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휘쇄법’은 겸재 정선의 일관된 그림 제작 기법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큰 화폭에 그림을 그릴 때도 ‘한 점의 붓 흔적과 먹 자국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겸재 정선의 그림은 ‘원기(元氣)는 가득하지만 조악한 기운 또한 띤다’는 것이다. 이는 칭찬일 수도, 비판일 수도 있는 평이다.

또 하나 겸재에게는 늘 그림 주문이 쇄도했다. “제발 작품 하나 그려달라”는 폭발적인 요구에 겸재는 특유의 일필휘쇄법으로 썩썩 그려주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주문이) 삼대밭처럼 많았고, 겸재가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조영석)였다.

문제는 제 아무리 일필휘쇄의 겸재였다 해도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겸재 정선의 득의작으로 꼽은 ‘인왕제색도’.  비 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렸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아들이, 대필작가가 대신 그렸다?
조선 후기 문인 권섭(1671~1759)의 <옥소고>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어찌 이 노인(정선)이 피곤하여 아들이 대신 그리게 하였는가. 아니면 붓가는대로 쓸어내리듯 휘둘러 그릴 때 혹은 득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런 것인가.”

이 무슨 말인가. 권섭은 정선의 화첩을 본 뒤 “이 그림은 분명 정선이 아니라 그 아들이 대필한 것”이라 추정했다.

만약 정선의 그림이 맞다면 어떨까. 정선 특유의 휘쇄법에 따라 그린 그림 중에는 잘 그린 득의작도 있지만, 더러는 태작(태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권섭은 정선의 그림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하고 있다. 빨리는 그리지만 잘 그린 작품도 있고, 못 그린 작품도 있다는 식이다.

만약 밀려드는 주문에 부응하려고 대필을 시켰다면 누구에게 맡겼을까. 권섭의 언급대로 아들을 시켰거나 제자인 마성린(1727~1798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표암 강세황(1713~1791)도 약간은 비판적인 평을 내놓는다.

“정선은 마음대로 쓸어내리듯 휘둘러 붓을 사용했는데, 바위의 기세와 산봉우리의 형상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열마준법을 어지러이 써서 대상을 묘사했다.”

강세황은 정선이 금강산의 거대한 산세와 기암절봉의 형상이 일률적인 열마준(어지러이 죽죽 내리 그리는 기법)을 처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진경산수의 사실성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정선의 휘쇄법은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비록 대상을 정교하게 그리지는 못하지만 필력이 웅건하고 거대한 기세를 보여주는 신속한 필묵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려고 거칠고 빠른 붓질로 그린 기법 또한 휘쇄법을 뜻하기도 한다.

장진성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겸재 정선은 초기에 묘사에 충실한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신묘년풍악도첩>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밀려드는 주문에 부응하려고 ‘휘쇄법’을 사용해 표현주의적인 화풍을 구사하게 됐다. 그러나 그후 주문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표현주의적 휘쇄법조차 점차 매너리즘화하여 결국 형식적인 필묵법으로 변하게 됐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해악전신첩> 중 ‘불정대’ 그림. 쓸어버리듯 휘둘러 빠르게 그리는 정선 휘쇄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열린 ‘겸재 그림’의 즉석 경매
그럴 이유가 있었다. 당대 정선의 그림 수요는 사실 엄청났다. 그림값도 대단했다.

신돈복(1692~1779)의 야담집인 <학산한언>을 보면 겸재의 그림이 중국에서도 불티나듯 팔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겸재의 절친인 이병연은 1500권에 달하는 중국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병연은 중국 연경의 그림가게에서 손바닥만한 겸재의 그림조차도 고가로 매매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연경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겸재가 보내준 그림을 중개해서 생긴 돈으로 중국서적을 대량으로 사들였던 것이다.
<학산한언>은 겸재의 그림이 중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어느날 한 중인 집안에서 겸재에게 “그림 좀 하나 부탁한다”면서 비단치마를 가지고 왔다. 말하자면 그림 의뢰였다.

그러나 비단치마에는 얼룩이 묻어있었다. 겸재는 이 얼룩을 지우버리고는 비단치마 세 폭 중 한 폭에 ‘금강산전도’를, 다른 두 폭에는 ‘해금강도’를 그렸다.

 

주문한 그림을 받은 중인은 ‘금강산도’는 집안의 가보로 삼았고, ‘해금강도’ 한 폭은 중국 연경으로 떠나는 사신 편에 들려보냈다. 중인의 의뢰를 받은 사신단은 이 그림을 연경(북경)의 그림가게에 가져갔다. 그림가게에서 즉석 경매가 이뤄졌다. 경매가가 계속 치솟았다.

마침내 중국 사천성(四川省) 청성산에서 온 승려가 은 100냥을 불렀다. 그 승려는 그 정도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액수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경에서 온 선비가 조용히 ‘120냥!’을 불렀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승려는 ‘130냥!’을 불러 그림을 손에 넣었다.

그런다음 그림을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려는 실제 그림값으로 50냥만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겸재 그림 1폭 가격은 청나라 궁정화가 1년 연봉
이 일화에서 보듯 겸재의 그림은 당대 중국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사천성 승려와 남경의 선비까지 매혹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 연경에서 겸재의 부채그림이 공양에 쓰는 향 50매 가격에 팔렸다. 때문에 연경을 드나드는 역관들은 겸재의 그림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신돈복) 동네에 사는 사람이 이병연에게서 ‘금강산화첩’을 사들일 때 엽전 30냥과, 좋은 말 한마리(40냥 가치) 등 총 70냥을 지불했다.”(<학산한언>)

종합해보면 겸재의 그림은 국내에서는 70냥, 중국에서는 은 130냥 가치로 매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돈은 과연 얼마의 가치였을까.

당시 청나라 초기 중국화가들의 그림값은 대개 6냥 이하였다. 또 청나라 건륭제(재위 1736~1795) 시기 1급 궁정 화원의 월급이 11냥이었다. 그렇다면 겸재의 그림값(130냥)은 청나라 1급 궁정화원의 1년 연봉(132냥)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하경산수도’. 안정된 구도와 치밀한 구성, 웅장한 화면 등 많은 시간과 공력이 들어간 겸재의 작품이다.

 

■겸재의 득의작들
겸재는 밀려드는 그림 주문 때문에 평생 바쁜 나날을 보냈다.

사대부 문인 및 관료들의 요청에 부응해야 했고, 연경을 오가는 역관 및 중인들을 통해 중국 판매용 그림을 그려줘야 했다. 어떤 경우엔 폭주하는 주문 수요를 맞추느라 특유의 일필휘쇄법으로 휙휙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아재 조영석의 품평이 흥미롭다.

“겸재는 ‘금강제화첩’을 그릴 때 싫증나면 마치 붓을 곱게 세워 쓸어버리듯 대충대충 그리는 필법을 사용했고, 그림 요청이 쇄도할 경우 적당적당 편의적으로 그렸다.”

물론 겸재의 이름에 걸맞은 득의작도 여러 편이었다. 예컨대 표암 강세황은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를 겸재의 득의작이라 극찬했다.

강세황은 “안개에 쌓여있는 아름답고 무성한 여름 산 경치가 일품”이라고 평가한 뒤 “정선 중년의 최고의 득의작이며 보배로 삼을만한 작품”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작품은 특유의 일필휘쇄법으로 쓱쓱 기른 작품이 아니다. 안정된 구도와 치밀한 구성, 웅장한 화면 등 많은 시간과 공력을 투입한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은 겸재를 둘러싼 평가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인왕제색도’ 만큼은 득의작이라 꼽을 수 있다”고 했다.

“문자 그대로 겸재의 본색이라 할 수 있는 창윤(蒼潤·푸르고 촉촉함)한 맛과 장건한 맛과 웅혼한 맛과 호한(浩汗·넓고 큼)한 맛과 임리(淋리·힘이 넘침)한 맛이 나타난 득의작이다. 내 소견으로는 아마 그 많은 유작이 이 한 작품을 위한 전주곡이었고, 또는 후렴곡이었던 것 같다.”(고유섭의 <조선미술사>)

 

<신묘년풍악도첩> 중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겸재의 진경산수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겸재가 조선 중화주의를 생각이나 했을까
금석 박준원(1739~1807)은 “조선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조선의 산천을 구경하고 나서야 겸재가 신품(神品)을 남겼음을 알게 된다”고 전했을 정도였다.  

또 ‘금강전도’의 제시를 보면 “굳이 금강산을 직접 답사하지 않고 배갯머리에 누워서 감상해도 좋을 정도로 금강산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평도 있다.

밀려드는 주문에 더러 진부하고 형식적인 그림을 그리기는 했어도 마음을 다잡게 되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작품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겸재는 80여 세가 되어도 여러 겹의 두터운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세밀한 그림을 그렸다. 터럭만큼도 실수가 없었다.”(박지원의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은 생의 황혼기에도 작품활동에 몰두하는 노화가의 모습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흔히 어떤 인물을 평할 때 ‘추앙해야 할 위인’ ‘범접할 수 없는 성인’으로 규정해버린다면 그 인물은 신격화되고 만다. 겸재 정선이야말로 그렇다. 장진성 교수는 그것을 ‘애정의 오류’라 표현한다. 위인전식의 연구는 외려 겸재의 참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평생 그림에만 몰두했다는 겸재가 무슨 조선중화주의를 생각했겠습니까. 그럴 겨를이 없었을 겁니다. 겸재는 죽기 전까지 매일 그림을 그려야 했던 인기화가였으니까요”(장진성 교수)

 

필자가 보기에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겸재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그러나 일필휘쇄로 붓을 휘둘렀던 겸재가 더욱 정겨운 모습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장진성,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 <동악미술사학> 제11호, 2011년

          '애정의 오류-정선에 대한 평가와 서술의 문제', <미술사논단> 제33호, 한국미술연구소, 2011

신돈복, <국역 학산한언 1>, 김동욱 옮김, 보고사, 2006

최완수, <겸재 정선>, 현암사 2009

박은순, '사의와 진경의 경계를 넘어서:겸재 정선 신고', <겸재 정선>, 겸재 정선기념관, 2009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