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여 고맙다.’

 

1993년 10월 29일자 경향신문 1면 축구 기사의 첫머리가 심상찮다.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1994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의 마지막 경기기사를 쓰면서 왜 뜬금없이 이라크에게 “고맙다”고 했을까.

 

저간의 사정이 있다. 북한전을 3-0으로 끝낸 한국(2승2무1패·득실 +5)은 일본-이라크전을 초조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종료 직전까지 일본의 2-1 리드였다. 그대로 경기가 끝나면 3승1무1패가 되는 일본의 본선행이 확정될 판이었다.

 

그런데 종료 10초를 남기고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아라크 자파르의 백헤딩이 골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2-2 무승부.

 

일본은 한국과 같은 성적(2승2무1패)이었지만 골득실(+3)에서 밀려 탈락했다.

 

이라크는 졸지에 ‘한국 축구의 은인’이 되었다. 일본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자파르는 국내 단체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귀빈 대접을 받았다.

6일 새벽 끝난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을 곱씹어보며 불현듯 떠오른 24년 전 도하의 기억이다. 그나마 그때는 형편이 좋았다.

 

고마운 존재가 이라크, 한나라였으니 말이다. 이번 예선에서는 왜 그리 고마운 나라가 많은지 모르겠다.

 

한국이 경기마다 질척대는 와중에 시리아와 중국은 한국을 맹추격하던 우즈베키스탄을 연달아 잡아주었다. 또 일찌감치 본선진출을 확정지은 탓에 하등 답답할 게 없었던 이란마저 막판에 한국을 위협하던 시리아의 발목을 걸어주었다.

 

시리아·중국·이란에다 한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무승부로 ‘끝내준’ 우즈베키스탄까지…. 가기싫다는 러시아행의 티켓을 4개국이 발벗고나서 주단을 깔아준 격이다.

 

‘등떠밀려 본선진출 당했다’는 우스갯소리가 흘러 나올수밖에 없다.

물론 9회 연속 본선진출은 축하받아야 할 쾌거이다. 축구열강인 브라질(21회)·독일(16회)·이탈리아(14회)·아르헨티나(11회)·스페인(10회)의 다음이니 말이다.

 

그러나 남의 도움을 받아 근근히 본선에 진출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선수들의 기량도, 지도자의 역량도, 제도적인 뒷받침도, 그 어느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어릴적부터 기본기를 가르친 일본은 어떤 선수가 출전해도 고른 기량을 펼친다. 어떤 경기를 봐도 불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허구헌날 유럽파에 목숨을 걸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세대는 어떨까. 19세 이하 대표팀은 2014·2016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한채 탈락했다. 16세이하 팀도 2016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역시 예선탈락했다.

 

한국축구의 미래 또한 암담하다는 얘기다. 이대로라면 다음 번 월드컵 예선 때는 다른나라의 도우미로 전락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 한가한 얘기일 수 있다. 이런 상태라면 당장 내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 역시도 ‘희망고문’ 만을 안겨줄 뿐이다. 지금이 본선진출 했다고 헹가래칠 때인가.

 

그것도 이란-시리아전에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축의 헹가래를 쳤단다. 한국 축구의 현주소를 보는 듯 하다. 오죽하면 뜬금없이 히딩크 감독의 복귀설까지 나왔겠는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