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明仁) 일왕은 1990년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속삭였다. “내 모계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것 같아요.”
“일본 왕실에 한국계의 피가 흐른다”고 인정한 폭탄발언이었지만 당시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뜻밖의 ‘무플’이 불만이었을까. 아키히토는 11년이 지난 2001년 68회 생일을 맞은 자리에서는 공개적으로 “내 몸에 한국계의 피가 흐른다”고 선언했다.
“<속일본기>에 ‘간무(桓武) 천황(재위 781~806년)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밝혔듯이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일왕가의 뿌리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고구려 왕족인 고려약광을 모신 사당. 고려약광은 666년 고구려 사신단의 일원으로 왜국을 방문했다가 고국이 멸망하면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지금의 가이타마현에 정착했고, 그 후손들이 고마(高麗)씨의 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의 고구려 행보
그런 아키히토 일왕이 이번에는 ‘고구려’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일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高)시에 있는 ‘고마(高麗·고구려)신사’를 참배한 것이다.
고마 신사가 어떤 곳인가.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자 수많은 고구려 유민이 일본 열도로 망명했다.
이 즈음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잇달아 등장한다.
666년 10월 왜국에 사신으로 왔다가 나라의 멸망(668년)을 맞은 고구려 왕족 출신의 사신 현무약광(玄武若光) 이야기다.
졸지에 돌아갈 곳을 잃은 현무약광은 오이소(大磯) 지방에서 살다가 왜국 조정으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는다. 서기 703년이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고려약광(高麗若光·고마 잣코)’이 된다. 13년 뒤 왜국 조정은 동국(東國·지금의 간토 지방)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한 곳에 모아 정착시킨다.
“716년 동국 7국에 흩어져있던 고구려 유민 1779명을 모아 무사시(武藏野)국에 정착시켰다. 그들이 정착한 곳에 고려(高麗·고마)군을 설치했다.”
무사시국은 현재의 도쿄도(東京都)와 사이타마 현의 대부분, 가나가와(神奈川) 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옛 소국이었다.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려약광(일본어 발음은 고마 잣코)은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는다.
고려약광은 고구려 정착민의 신(神)으로 추앙받게 된다. 약광이 죽은 뒤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가 건립되었는데, 그것이 고려(고마)신사이다.
약광의 후손들은 성(姓)을 고려(高麗·고마)라 했으며, 고려(고마)씨는 이 신사의 궁사(宮司·신사의 대표)를 맡아왔다.
지금은 고려 약광의 60대손인 고마 후미야스(고려문강·高麗文康)가 고려신사의 궁사로 일하고 있다.

 

1940년 4월5일자 매일신보. 조선신궁과 고려신사가 나무를 교환하는 행사를 펼쳤다. 이때의 행사를 두고 ‘내선일체의 신목교환’이라 했다.  

■일왕의 고려신사 방문, 어찌 봐야할까
이 고려(고마)신사를 아키히토 일왕이 방문했으니 다시 한 번 관심이 초점이 된 것이다.
일왕은 신사의 대표이자 고려약광의 후손인 고마 후미야스에게 “백제인과 고구려인은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 등 호기심이 넘쳤다고 한다.   
이날 고려신사의 방문을 두고 일왕은 ‘사적인 여행’이라 했다. 그러나 해석은 구구했다.
내년 말로 예상되는 생전 퇴위 전에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과 화해의 신호를 전하려고 신사를 방문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한·일 양국간 어려운 현안이 있지만 결국 ‘함께 가야 할 두 나라’라는 메시지를 던진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어떻든간에 과거사에 반성은커녕 가해의 언급마저 피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는 대비된다는 점에서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일본에 고구려인의 정착지가 있었고, 고구려 왕족의 성(고려씨)과 그 왕족을 모신 신사가 1200년 동안이나 존재해왔다는 것은 무척 신기한 일이다.
또 아키히토 일왕이 백제에 이어 고구려에까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한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고려, 아니 일본에서는 고마로 일컬어지는 이 신사가 일제 강점기에는 ‘내선일체’와 ‘내선융화’의 상징으로 철저하게 이용됐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고려신사(고마신사)를 검색해보면 뻐짐없이 등장하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상징’ 혹은 ‘내선융합의 성지(聖地)’라는 표현이다.
이 대목에 천착한 이는 일본인 학자 사토 아쓰시(佐藤厚) 센슈대(專修大) 교수다.
최근 발표된 사토 교수의 논문(‘근대기의 고마신사-근대에 이용된 고대’, <동아시아고고학> 46권, 동아시아고고학회, 2017년)에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난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1940년 당시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이 방문해서 남긴 ‘고려신사’ 비석. 일제는 고려신사를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상징물로 여겼다.

■내지 시찰단은 왜 고려신사를 찾았나
시조인 고려약광을 기리려고 건립된 고려신사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지방의 작은 신사에 불과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뀐다. 이때부터 고려신사의 위상도 달라진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지도층을 대상으로 이른바 ‘내지(일본)시찰단’을 파견한다. 이 시찰단에는 조선총독부의 활동사진반이 동행했다. 이들에게는 일본의 발전상을 직접 보고 들은 뒤 귀국해서 무지몽매한 조선 민중에게 선전해야 한다는 임무를 맡겼다.  
예컨대 1920년 5월 조선총독부는 조선 각도의 군수 30명을 시찰단으로 파견했다. 이들과 함께 동행한 활동사진반이 사아타마(埼玉)에서 찍은 동영상이 무대는 바로 고려촌이었다. 이때 고려신사의 궁사인 고마 오키마루(高麗興丸)는 시찰단에게 ‘고려약광의 사적’을 담은 책자를 선물했다. 이렇게 완성된 동영상은 7월부터 조선 각지의 12곳에서 총 6만8000명이 지켜본 가운데 상영됐다. 이후 고려촌과 고려신사는 내지시찰단의 단골 방문지가 됐다.  
일본 본토에 고구려인의 정착지가 존재했다는 소식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1920년 10월 22일부터 오사카(大阪)-나라(奈郞)-교토(京都)-도쿄(東京)를 거쳐 고려촌을 방문한 경북 유림 시찰단의 감상록에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격적인 만남의 순간이 담겨있다.
“약광왕의 후손인 오키마루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키마루가 신사의 역사를 설명하고 감구(感舊·회한)에 젖어 눈물을 흘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다 울었다.”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들은 각종 매체에 ‘고려촌’과 ‘고려신사’, ‘고려약광’ 이야기를 앞다퉈 소개했다.  이후 총독부 직원 8명과. 전라남도 면장 40명, 황해도 유생 16명 등이 줄줄이 일본 본토의 고려촌을 찾았다. 

고려신사 봉찬회의 임원 사진. 앞줄 가운데 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고다마 히데오 백작이고, 그 바로 오른쪽이 총독부 경무국장을 역임한 마루야마 쓰루키치다. 일제는 고려신사를 내선일체의 성지로 여겨 대대적인 중창공사를 벌였다.|사토 아쓰시의 논문에서

 

■일제가 고려신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1921년 8월 고마 오키마루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조선>)에 실은 ‘고려약광 사적’의 서문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일한이 합병하여 한 나라가 되었다. 이때 일한 상대(上代·고대사)의 교섭을 연구하는 것도 시국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고구려 왕실과 황국(일본)의 관계를 증명하는 우리 조상(고마씨)의 유적을 알리는 것은 양국민을 친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어째 좀 수상한 느낌이 든다. 한일합병으로 한나라가 된 일본인과 조선인의 가교역할을 ‘고마씨(고려씨)’ 가문이 한다? 하기야 고려씨의 입장에서는 그럴수도 있었겠다.
1200년이 넘도록 이역의 땅, 그것도 일본에서 갖가지 설움을 받으며 정착해온 고려씨가 아닌가.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한반도에서 ‘동족’이라며 찾아와 혈연관계를 말하니 울고 불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1922년 3~7월 사이 도쿄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 참석한 조선방문객 가운데 무려 2100명이나 고려촌과 고려신사를 방문한다.
기현상이라 할만큼 인기폭발의 유적관광지가 되었다. 1923년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조선인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재단법인 ‘고려왕 유적보전회’가 결성된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그럴만 했다. 1925년 3월 고려신사에 심상치않은 방문객이 찾아온다. 당시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1934년엔 고려신사를 후원하는 단체(고려신사봉찬회)까지 발족한다. 원래는 민간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후원조직이었다.
그런데 봉찬회의 본부가 들어선 곳이 수상하다. 바로 동양척식회사의 도쿄 건물이었다. 동양척식회사가 어디인가. 식민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려고 세운 회사였다. 식민지 수탈의 총본산에 왜 고려신사를 받드는 단체가 들어섰을까. 더욱 미심쩍은 것은 봉창회의 임원들이었다.
회장인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백작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1929~1931년)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이사장인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역시 총독부 경무국장(1919~1924)을 지냈다. 나머지 156명의 이사와 평회원들도 식민지 조선과 관련된 정치인·관료·학자·언론인들이었다.

내지시찰단의 일원으로 고려신사를 방문하고 돌아온 경상북도 유림 대표단. 조선총독부는 시찰단에 활동사진반(촬영팀)까지 붙였다. 촬영팀은 시찰단이 고려신사를 방문하는 모습을 찍었고, 이 모습을 조선 전국에 방영했다. 고구려인을 잘 대접해서 동화시킨 내선융합의 모델로 삼기 위함이었다.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모형
봉찬회의 회칙을 보면 단체의 목적이 점차 뚜렷해진다.
“부대사업으로 내선동화에 관한 문서의 출판과 내지(일본) 본토에 사는 조선동포에 대한 사회적인 시설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선동화? 그렇다. 봉찬회가 만든 두 권의 잡지(<고려신사의 유래와 봉창회의 취지>, <고려신사의 소기(小記)>)에는 더욱 소름끼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일본 각지에 조선관계의 유적은 적지않다. 그러나 이 고마촌(고려촌)만큼 사실(史實)이 확실하고 유적이 명확하며, 그 후손이 연면하여 1300년간이나 이어져온 것은 없다.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모형이고 살아있는 증거다.”
봉찬회의 이사이자 언론인인 다케이 후미오(武井文夫)의 한마디, 즉 “고려신사는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모형이자 증거”라는 바로 이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다케이는 이 대목에서 “그럼에도 이 고려신사를 아는 사람이 적다”고 유감을 표한다. 왜냐.
“조선은 일본문화의 모태다. 그 망명객이 귀화하자 우리나라(일본) 사람은 잘 대접하고 동화시켰다.…이런 살아있는 사료인 고마(고려)신사를 아는 이가 특수한 학자나 호사가외에는 없다. 참으로 유감스럽다.”
다케이의 마지막 언급이 쐐기를 박는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현창(顯彰·널리 알리는 것)은 내선융화의 문제를 일보 전진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랬다. 일본인들이 왜 고려신사를 받드는 봉찬회를 결성했는지, 또 왜 기회있을 때마다 유력 조선인들을 시찰하게 했는지, 또 왜 사이토 조선총독 같은 최고위 인사들까지 찾아갔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일본인들은 고려신사를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상징물’로 여겼던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지난해 7월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을 관람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늘 "백제인의 피

가 흐르고 있다"고 고백해왔다.

 

■일본과 조선에서 벌어진 거국적인 모금운동
조선총독부도 맞장구 쳤다.
총독부 이마이 다(今井田) 정무총감은 “일본의 봉찬회가 부후(腐朽·낡고 오래된)한 신사를 중창하려고 모금운동을 벌인다는 조선총독부도 동참하겠다”고 호응한다.
“신사의 재건은 내선융화에 있어 가장 유의미한 것이다. 조선도 적극 동참해서 재건자금을 모아줄 것이다.”(<매일신보> 1934년 11월 19일)
실제로 조선에서도 고려신사 중창을 위한 거국적인 모금행사가 벌어졌다. 1935년 11월말까지 3만8000만엔이 걷혔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동시에 진행된 모금운동 결과 총 12만5000엔이 걷혔다. 지금의 화폐가치로는 2억5000만엔(한화 25억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을 모금한 것이다.
이 돈은 1936~42년 사이 진행된 고려신사의 개축공사에 쓰였다.
1942년 11월 27일 거행된 준공식을 보도한 <매일신보>의 제목은 ‘내선일체의 성지(聖地)에 고려신사를 중수했다’는 것이었다.
고려신사를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시각은 일관됐다. 내선일체의 성지였다.
“고려악광왕을 모신 신사가 있어 내선일체 구현의 힘찬 줄기를 반영하듯 내선인의 참배가 날로 늘어가는데…물자난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순조롭게 끝나….” 

 

■내선일체의 신목 교환
일제는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상징으로 여긴 고려신사를 마음껏 활용한다. 심지어는 사상범의 교화수단으로도 썼다.
단적인 예로 1939년 11월 좌우익 전향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사상보국동맹 일행 45명은 일본 메이지(明治) 신궁과 고려신사를 차례로 참배했다. 메이지 신궁에서는 일본의 국체(國體)를 경험하고, 고려신사에서는 내선일체의 개념을 완성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야말로 치밀한 사상교육이다.
<매일신보>는 1940년 4월5일 일본의 고려신사와 식민지 조선의 조선신궁 사이에 열린 ‘특별한’ 행사를 보도했다. 1940년은 일본의 초대 천황이라는 진무(神武) 천황의 즉위 2600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해였다. 이를 기념해서 열린 진무천황제에서 고려신사와 조선신궁 간 나무교환식이 거행됐다. 고려신사는 조선신궁에 벚꽃나무를, 조선신궁은 고려신사에 오엽송(五葉松)과 개나리를 각각 보냈다. 이때의 <매일신보> 신문 제목이 고약하다. ‘내선일체의 신목(神木) 교환’이었다.
“고려(고마)신사가 보낸 신앵(神櫻·벚꽃나무)을 심는 행사가 장엄하게 거행됐다.”
조선신궁의 궁사인 아치와(阿知和)와, 고려신사 봉찬회장인 다케이가 주고받은 덕담을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다.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오늘날 내선인(內鮮人)이 같이 이런 역사상에서 결합하여 서로 손잡고 가야 합니다.”(아치와)
“황국(일본)의 은혜에 접하여 무사시(武藏野·고구려인이 정착한 땅)에서 신이 되어 주무시는 고마왕(고려약광)의 영혼도 지하에서 기뻐하실 겁니다.”(다케이)
다케이는 특히 “고려신사가 조선신궁에서 보낸 오엽송과 개나리를 내선번영의 기초로 여겨 잘 키울 것”이라 했다.

고려신사를 수호하고 있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내선일체는 야마토 민족의 위대한 포용력”
그런데 고려씨, 즉 고마씨도 머나먼 조상만 한반도에서 넘어왔을 뿐 이제는 완전히 동화된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고려약광(고마잣코)의 58대 후손인 고마 아키쓰(高麗明津·1894~1984)는 1940년 신사를 방문한 일본인에게 자신의 내선일체론을 설파한다.
“고구려나 백제나 쇠망하여 일본으로 망명하기 시작한 아스카(飛鳥)시대 말기부터 나라(奈郞)시대까지 야마토 민족(大和民族)의 위대한 포용력이 최고도의 내선일체를 발휘한 때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야먀토 민족은 일본 최초의 국가였다는 야마토 국가(3~8세기)를 구성한 종족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고려명진은 ‘내선일체’라는 개념은 이미 야마토 시대에 쇠망한 백제·고구려 후손을 포용하면서부터 생긴 것이라 해석했다. 그것을 아스카(7세기)·나라(8세기) 시대의 ‘위대한 포용력’이라 했다.
아키쓰에 따르면 고려신사는 1200년 넘은 ‘내선일체’ 역사의 상징물인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1940년 아키쓰는 “고려씨 가문은 완전히 일본에 동화했기에 어떤 차별도 느낄 수 없다”고 자랑스레 단언했다.
“일전에 어떤 조선인으로부터 ‘당신 조상이 반도인이라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냐’고 질문했을 때 저는 어이없이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우문도 그런 우문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간토인(關東人)은 고대의 야마토 민족과 조선(고구려) 민족의 동화에서 유래합니다. 과언이 아니라 혈통상 실제 우리 조상의 일부입니다. 몇십년 사이에 마음도 몸도 정말로 융합하자는 것, 이것이야말로 야마토 민족의  위대한 포용력이고 민족발전의 기조입니다.”
이 말만 들으면 고마 아키쓰는 철저한 내선일체의 신봉자였음을 알 수 있다.

 

■영친왕은 왜 방문했나
고려신사를 향한 일제의 보살핌은 끔찍했다. 조선총독부 관리 중 고등관급 이상의 관리가 고려신사에 석등을 헌납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펼쳤다. 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친일단체는 야등을 봉헌하는 행사를 펼쳤다.
이뿐이 아니었다. 사이토 총독(1925년)에 이어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1940년)도 고려신사를 참배했다. 이때 미나마가 세운 기둥이 지금도 신사 입구에 남아있다.
1942년 11월 22일 영친왕 이은(1897~1970)과 왕비 이방자 여사(1901~1989), 왕세자 이구(1931~2005) 등 3명이 고려신사를 찾았다. 방문기사의 내용 역시 “이왕(영친왕) 전하 부부가 ‘내선일체의 유서깊은’ 고려신사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친왕이 심은 나무 역시 지금도 자라고 있다.
1943년 5월에는 중앙조선협회 회원 40명이 고려신사를 찾아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전승기원제’까지 올렸다. 이 협회는 1926년 조선총독부의 고관출신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원과 기업인, 언론인 등을 회원으로 둔 단체이다. 이 단체가 고려신사를 방문해서 전승 기념 제사를 올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선일체의 거룩한 사실을 찾는 일종의 성지순례 같았다.

1940년 6월11일 매일신보.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이 고려신사를 참배하는 기사를 실었다. 고려신사 앞에는 늘 '내선일체의 장'이니 '내선융화의 성지'니 하는 수식어가 붙었다.

■철저히 이용당한 고려씨 가문
‘근대기의 고려신사’ 논문을 쓴 사토 아쓰시 교수는 고려 신사, 즉 고마 신사가 근대 일본에 의해 얼마나 철저하게 ‘이용 당했는지’를 밝혀냈다.
1200년간 도래인의 후예로 살다가 식민지 시대에 갑자기 ‘내선일체의 성지’니, ‘내선융화의 살아있는 상징’이니 하며 각광을 받았던 고려씨 가문은 들떴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일본인으로 1200년 이상 살아온 고려씨(고마씨) 가문이 무슨 특별한 종족의식이 있었겠는가.
“당시 한일합병이라는 시대상황에서 고려씨 가문이 뭔가 기여할 수도 있다는 사명감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사토 교수)
일본의 간토인(關東人)이 고대의 야마토 민족과 조선민족의 융합 속에 탄생했다고 설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토 교수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인에게 많은 재난을 주었는데, 고려씨 가문에게도 불행한 일이었을 것”이라 했다.
한마디로 고려씨 가문과 고려신사는 ‘내선일체’의 도구로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다.
사토 교수는 이것을 ‘일본의 근대가 고대를 이용한 것’이라 표현했다. 메이지(明治) 유신을 보라는 것이다. “매이지 유신은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사쓰마번(薩摩藩·가고시마현)과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현)의 무사들이 귀족과 결탁해서 일으킨 쿠데타 아닌가. 바로 그 쿠데타 세력이 정치적 정통성을 찾으려고 내세운 표어가 왕정복고(王政復古)였다.”
즉 쿠데타 세력이 무사 정권이 아닌 그 이전의 왕, 즉 천황 중심의 정치로 복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근대(쿠데타)가 고대(천황정치)를 이용했다는 뜻이다.
멸망한 고구려 왕족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고마신사, 즉 고려신사…. 그것에는 이렇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식민지 시대의 우여곡절이 담겨있다.
아키히토 일왕의 방문을 굳이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흐뭇하게만 여길 일은 아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사토 아쓰시(佐藤厚), ‘근대기 고마신사(高麗神社)-근대에 이용된 고대’, <동아시아 고대학> 46권, 동아시아고대학회, 2017년
송완범, ‘고마군 건군 1300년에 즈음한 고마약광의 의미’, <동아시아 고대학> 39권, 동아시아고대학회,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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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