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이 927년 겨울 11월에 경주에 들이닥쳤다. 견훤은 후궁에 숨어있던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강간했다. 부하들은 경애왕의 비첩들을 난통(亂通)했으며 공사의 재물을 노략질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경애왕조’)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55대 임금 경애왕의 최후이다.

한마디로 신라 55대 경애왕이 나라가 망해가는 줄도 모르고 927년 음력 11월에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어 귀족들과 술 마시고 즐기다 후백제 견훤의 침입으로 왕이 자결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견훤 역시 남의 나라 왕비를 강간하고, 그 부하들에게도 남의 나라 임금의 비첩들을 마음껏 겁간하도록 방임한 인간말종으로 그렸다.

포석정은 경주 남산의 서편 포석계곡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사적 1호였다. 사적 1호는 결국 후백제 견훤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신라 망국의 치욕이 함께 서려있는, 차마 기억하고 싶지않은 유적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사적 1호로 지정된 포석정. 경애왕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음에도 술판을 벌이다 비참한 죽음을 당한 곳으로 폄훼됐다.

■경애왕은 왜?
그러나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그럴까.

음력 11월이면 한겨울인데 과연 경애왕이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또한 두 달 전인 음력 9월에 이미 견훤이 경주 인근인 영주까지 쳐들어오자 경애왕이 왕건에게 급히 원군을 청했던 상황이었다.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경애왕이 몰상식한 술판을 벌였을까. 또하 견훤도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인간말종의 만행을 저질렀을까.
현존하는 포석정 터의 모양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포석정은 마치 바다의 전복껍데기 둘레와 같은 모습"이라 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포석정(鮑石亭)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 부분의 일부가 없어졌고 물이 빠지는 출수구 부분도 없어져 있는 상태에서, 일본인들이 없어진 부분을 다시 짜 맞추어 정비한 것이다.

일제는 무엇 때문에 파손된 형태의 포석을 다시 보충해 맞추면서까지 정비하고 중요문화재, 그것도 사적 1호(1933년)로 지정 보존했을까.
‘신라의 망국=조선의 망국’으로 여기려는 일제의 숨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 데도 흥청망청 놀았던 신라망국의 상징’을 사적 1호로 삼은 것….

분명 “너희는 적이 쳐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 퍼마시고 놀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를은연 중 심어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비운의 장소를 정비하고 복원한 뒤 사적 1호로 지정했을 터이다. 덤으로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견훤의 죄까지 물었던 것이다.

 

■몸통만 남은 포석정
현존하는 포석정터에 남아있는 포석, 즉 돌을 다듬어 만든 형태를 보자.

양쪽으로 다듬은 화강석을 짜 맞추어 가면서 그 사이 내부 바닥에는 돌을 깔아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입수구와 출수구는 그 형태를 알 수 없고 다만 몸통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수령 300여년으로 보이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들의 뿌리가 뻗쳐 포석유구를 부풀어 올려 원형이 손상된 상태를 보이고 있다.
분명 입수구 쪽에는 특별한 시설, 즉 거북의 입이나 용 형태의 입에서 물이 나와 흘러가도록 하는 장치가 있었을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포석정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유적(流盃渠遺蹟)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유상곡수연의 원류는 중국에 있다.
353년 3월3일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회계산(會稽山_ 북쪽에 난정(蘭亭)이란 정자에 당대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 41인이 모였다.

포석정과 인접한 나정에서 확인된 팔각형모양의 유구. 박혁거세의 탄강신화가 읽힌 성소이다.

그들은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하였고, 이때 읊은 시를 모아 서문을 왕희지가 썼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난정회기(蘭亭會記)의 난정집서(蘭亭集序)로 알려져 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유배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잔을 띄우면 흘러 돌아오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경주의 포석정 포석이 바로 왕희지 등의 유상곡수연과 중국 왕궁의 유배거 시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조해낸 신라 특유의 독특한 시설이라는 해석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이러한 시설은 왕족이나 귀족층의 놀이 시설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이렇다보니 결국 놀이만 즐기다가 나라가 망한 꼴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했던 것이다.

 

■제사, 길례를 치른 성스런 장소
과연 포석정이 그러한 의미에서만 해석되어야 할까.
포석정은 일단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정원유적인 것은 틀림없다. 태고 적부터 이궁(離宮)의 정원 속에서 행하던 계욕과 계음이 훗날 놀이의 형태로 변형됐다는 주장이 있다.

계욕과 계음, 즉 일 년 동안 몸에 밴 부정을 맑은 냇물에 씻어 청결하게 하는 일종의 제사를 지내고 제사음식과 술을 먹었던 시설이라는 것이다.

나정 우물지에서 확인된 말토양 토우. 말은 박혁거세 탄강신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동물이다.

오늘날의 음복(飮福)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술을 마실 때 흥을 돋우기 위해 잔을 물에 띄워 보내 마시게 한 게 유상곡수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계욕의 풍습은 오늘날에도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비는 마을제인 동제를 주관하는 제관이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행하는 데서도 남아있다. 또 중국의 곡수연지(曲水蓮池)는 거의 모두가 유배정·유상정 등 곡수연을 가리키는 정자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어떤 연구자는 포석정이 왕과 귀족의 연회장소 혹은 유상곡수연과 관련 있는 장소라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포석정은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던 성소(聖所)로서 팔관회(八關會)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경애왕은 이해 음력 11월 해마다 거행하던 팔관회를 개최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삼국사기> 등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데 논리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더욱이 삼국사기가 불교가 국가적인 이념이었던 고려시대에 기록됐다는 점을 감안하자.
만약 국가적인 행사인 팔관회와 관련이 있으면 김부식이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포석사(鮑石祠), 또는 줄여서 말하는 포사(鮑祠)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포석사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祠堂) 또는 묘(廟)라는 것이다.
이 포석사에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士氣)의 종주로 받들어진 문노(文弩)의 초상화를 모셨다.

문노와 그 부인이 된 윤공이 결혼했고,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포석사였다.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안고 있다. 포석정이 자리 잡고 있는 경주 배동 주변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와 관계있는 나정(蘿井)에서 확인되듯 무언가 신성한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신궁이 설치된 장소도 월성(月城)의 남쪽으로 기록돼 있는데, 도당산(都堂山)을 거점으로 한 그 주변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실을 조영한 장소도 이 일대. 박씨의 능이 모두 이 일대에 집중돼있다는 점은 박씨가 이곳을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는 1934년 포석정을 고적(사적) 1호로 지정했다. 망국의 위기 속에서도 술판 놀자판을 벌였던 신라 경애왕을 앞세워 '패배주의'를 심어주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정(蘿井)과 포석정
그런 뜻에서 2003년 11월 경주에서는 의미심장한 현장설명회가 열렸다.
포석정에서 북쪽으로 1㎞도 떨어지지 않은 탑동 나정유적에서 발견된 팔각건물지(각변 길이 8m, 동서남북 각 60m)에 대한 성격규명을 위해 전문가들이 모인 것이다.

발굴단은 팔각지 한가운데에서 우물지를 찾아냄으로써 더욱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2004년 4월에는 이 유적에 대한 정밀조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더 흥미로운 성과가 나왔다.

즉 팔각형 건물의 주변에서 기원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 흔적이 더 확인된 것이다. 비상한 관심을 끄는 것은 이 건축물의 흔적(溝狀遺構) 중앙에 또 하나의 우물지가 발견된 점이다.
이 우물샘에서는 기원전후에 제사용으로 쓰인 ‘두(豆)’형 토기와 말머리 토우가 확인됐다.

기원전후라면 박혁거세가 나라를 창건했던(BC 57년) 시점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는 삼국사기 기록이 맞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혁거세 탄생신화에 따르면 ‘말(馬)’은 하늘에서 세상에 내려온 혁거세의 존재를 인간들에게 알려준 성스런 동물이다. 이에 따르면 6촌의 촌장들이 왕 추대를 위해 알천 언덕에 모였는데 남쪽 양산 밑 우물(나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비쳤다. 흰말 한 마리가 붉은 알 하나를 품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물과 말 모양 토기, 그리고 제기...

<삼국사기> ‘신라본기·혁거세거서간’ 즉위조를 보자.
“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서 6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6촌의 하나)의 우두머리 소벌공이 양산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웬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보니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큰 알만 하나 있었다. 알을 가르자 그 속에서 한 어린아이가 나오므로 거두어 길렀다. 나이 10여세가 되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여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시비하고 기이하다 하여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여기에 기록된 바로 이 나정은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곳으로 75년 사적 245호로 지정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제2대왕 남해왕(차차웅) 3년(AD 6년) 정월에 시조(始祖)의 묘를 세운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소지왕 9년(487년) 나을(奈乙)에 신궁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역시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에는 “지증왕이 시조가 내려와 태어난 곳인 나을에 신궁을 세워 그를 제향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998년 발굴 수습한 '포석(砲石)'명 기와의 탁본. 이 '포석'명은 화랑세기에 기록된 포석사의 '포석(砲石)'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목된다.

■신라시대 귀족 예식장

많은 학자들은 이 나을을 ‘나정’으로 본다. 나(奈)와 라(蘿)가 신라의 라(羅)처럼 나라를, 나을의 을(乙)은 우물(井)의 고어인 ‘얼’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곧 나을은 나라의 우물이라는 뜻이니 나정에서 거대한 팔각지 건물이 나오고, 그 안에서 우물이 발견됐으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팔각 건물지는 하남 이성산성과 이천 설봉산성 등에서 드물게 발견됐는데 모두 제사를 지낸 제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팔각형은 흔히 8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으로 종교적 건축물에 많이 응용되었다. 특히 중국 한나라 조정에서 하늘을 제사하는 제단이 둥근 팔각형이었다. ‘나을’은 박혁거세의 탄강지인 나정이 될 수 있다.
<화랑세기>를 보면 아주 주목되는 기사가 있다. 12세 보리공조를 보면….
“보리공과 만룡이 혼인하기로 결정하자 만호태후가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리해보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신라인들은 시조의 탄생신화가 깃든 나정을 신성시한다. 그런 다음 21대 소지왕(마립간)때 이 시조묘, 즉 사당을 신궁으로 격을 높여 축조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보리공과 만룡의 결혼기사에 비추어 보면 신라인들은 이 신궁과 포석사를 한 묶음으로 신성시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신궁에 제사지내고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한 것이다.

 

■경애왕은 나라의 안녕을 빌고 있었다

이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현존하는 포석정은 중국의 유상곡수연과 유배거시설과 분명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랑세기>에 보이는 포석사도 눈 여겨 봐야 한다. 이 포석사는 문노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고 유력자들의 길례(吉禮)가 행해진 사당으로써 성스러운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포석사 내에 포석시설과 관계있는 정자가 있었고 이것이 포석정일 것이다.
국가제사를 마치고 나면 음복을 하거나 길례를 한 뒤 피로연 장소로 활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라인들의 독창적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문헌사학에 있어서 옛 기록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음을 본다. 이 포석정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먹자판·놀자판의 ‘망국의 놀이터’였다는 해석은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기록을 받아들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결코 경애왕이 다만 술 마시고 즐기기 위해 군신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베푼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가 참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서술을 함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기보다는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더 실체에 접근할 올바른 해답이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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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