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봉양하는 연회를 베풀면 어떻겠사옵니까.”
1771년(영조 47년) 20살이 된 세손(훗날 정조)이 임금(영조)에게 ‘노인봉양잔치’를 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할아버지 영조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상소문의 내용보다는 먼저 “세손의 글씨가 어떠냐”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자 이번에는 “문체가 어떠냐”고 하문했다. 대신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자 그제서야 “세손의 뜻대로 양로잔치를 베풀라”고 했다. 영조의 다음 한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세가지 기쁜 일이 있다. 세손이 양로연을 청한 것이 하나이고, 글을 잘 지은 것이 하나이며, 글씨를 잘 쓴 것이 하나이다.”(<영조실록>)
영조는 훌륭한 왕재로 성장한 세손(정조)의 글씨를 특별히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펼쳐 새로운 현충사 본전을 만든 뒤 자신이 직접 써서 내걸도록 한 ‘현충사 현판(위)’. 1707년 숙종이 현충사를 위해 하사한 ‘현충사’ 현판(아래)은 옛 현충사 본전에 걸리는 신세가 됐다. 당대 최고의 명필인 숙종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힘찬 필치가 돋보인다.

■“글씨 참 잘 썼다”고 칭찬받은 정조
그럴만 했다. 당나라 고종 때인 669년부터 시행해온 인재선발의 기준이 무엇인가. 바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풍후하고 큰 신체(身)와 바르고 분명한 말(言), 굳세고 아름다운 글씨(書)와 뛰어난 판단력(判) 등 4가지 기준으로 인재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신당서>)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은 ‘서·판’이었고, 이 서·판 시험이 끝나야 비로소 신·언 전형으로 넘어갔다.
똘똘한 신하를 뽑는데도 이렇게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는데, 하물며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는 어떤 인물이어야 했겠는가.
왕조시대 군주는 땅에서는 민심을, 하늘에서는 천심을 꿰뚫는 완전무결한 지존이 되어야 했다. 군주가 될 이는 3살부터 왕재(王才)가 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용모나 몸집은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글씨(서)와 말(언), 판단력(판)은 어렸을 때부터 키워야 했다.
이중 서예는 임금 될 자가 반드시 배워야 할 기본과목이었다.
국왕은 그 시기에 가장 뛰어난 서예가 중 한사람이 되었고, 또한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지존의 자리에 있는 국왕의 글씨가 ‘고양이 발이나 개의 발’을 일컫는 괴발개발이라면 어떨까.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성역화한 현충사의 중심축선에서 밀린 옛 현충사 본전.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한 놓치기 쉽다. 

 

■한결같이 명필이었던 조선 임금들
아닌게 아니라 코흘리개 세자 시절부터 서예교육을 받았던 조선의 임금들은 예외없이 명필이었다.
조선 전기의 임금들은 주로 송설체를 즐겼다. 원나라 서예가인 조맹부(1254~1322)의 서재 이름(송설재)을 딴 송설체는 법도와 품격, 힘이 있는 글씨체다.
세종의 왕자인 문종(재위 1450~1452)과 세조(재위 1455~1468) 등은 대표적인 송설체 서예가들이다. 문종의 경우 “굳세고 생동하는 진기(眞氣)가 오묘한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김안로)가 있다. “문종의 편지나 글씨를 얻는 사람은 마치 천금처럼 귀하기 여겼다”(김안로의 <희락당고>)는 것이다.
세조는 근엄하고 힘찬 필치를 자랑했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재위 1469~1494)은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김안로(1481~1537)는 성종의 글씨를 두고 “아리땁고 단중하여 조용히 조맹부의 법도를 따랐다”고 평했다.

1966년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 끝에 새로 마련한 현충사 본전. 콘크리트 구조물에 한옥을 얹혔다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暗君)’이라는 악평을 듣는 선조(재위 1567~1608)는 서예에서 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명필인 석봉 한호(1543~1605)를 발탁했으며, 한호의 글씨체인 석봉체로 <해서천자문>을 제작하여 전국 서당에 보급시켰다. 조선의 어린이가 일제히 석봉체로 천자문을 배웠다는 것은 파천황의 사건이었다. 선조의 글씨도 명필이었다. 한호의 글씨처럼 강한 필치로 대담하게 휘두른 붓 맛이 일품이었다. 이같은 선조의 서풍은 후대의 임금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인조(재위 1623~1649)와 효종(재위 1649~1659), 현종(재위 1660~1674)의 글씨가 그랬다. 근엄한 분위기의 강한 필치가 선조와 일맥상통했다.
그러나 숙종(재위 1674~1720)이 즉위하면서 다시 강건했던 필치가 부드럽게 변한다. 특히 숙종은 꺾는 부분을 각 지게 쓴 선대 임금들과 달리 모서리를 유연하게 돌려 꺾어 썼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재위 1724~1776)은 부왕보다 더 유연하면서도 필획의 변화가 큰 화려한 ‘조선풍 송설체’를 표현했다.
할아버지 영조에게서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던 정조(재위 1776~1800)는 굵고 시원한 필치로 당당한 인상의 글씨를 썼다. 멀리는 선조부터 가까이는 할아버지 영조의 서풍을 이어받아 자신의 글씨로 연마한 것이다. 순조(재위·1800~1834) 역시 아버지(정조)의 글씨를 본받은 명필이었다. 순조가 5살 때(1795년) 쓴 글씨 ‘구오복 팔천세(九五福八千歲·복을 누리며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어떤 명필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큰 붓으로 시원하게 쓴 대담한 필획이 돋보인다.
서예에 안목이 없는 필자 같은 비전문가가 봐도 조선 국왕의 글씨, 즉 어필(御筆)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만큼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충사의 위치도. 숙종의 현판이 걸린 옛 현충사는 충무문-홍살문-현충사로 이어지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다.

 

■‘글씨는 천한 기예입니다.’
그런데 각 문헌을 살펴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군신을 막론하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린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다.
예컨대 강희안(1417~1464)은 안견·최경과 함께 시와 그림, 글씨에 뛰어난 ‘3절(絶)’로 통했다.
두어 살 때부터 담장과 바람벽에 손가는대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는데, 법도에 꼭 맞았다. 전서 뿐 아니라 예·해·초서를 막론하고 통달했다. 그림의 신묘함은 당대 최고였다. 그러나 강희안의 작품들은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이 강희안의 서화를 구하러 오면 단칼에 거절했으니까….
“글씨와 그림은 천한 재주(賤技)입니다. 이것이 후세에 전해진다면 내 이름만 욕되게 할 뿐입니다.”(<해동잡록>)
조선시대이니 그림은 또 그렇다치지만 강희안은 글씨, 즉 서예마저도 왜 ‘천한 재주’라고 스스로 폄하했을까.

 

1931년 6월  26일 동아일보. 현충사가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유적보전회가 결성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2만여명이 1만6000원을 모았다. 신문은 성금을 보내온 사람들의 명단과 사연을 소개했다.

■‘작문은 배우, 서예는 시간낭비’ 
이 대목에서 강희안과 같은 조선의 문인학자가 즐겨 인용한 도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북송의 정이(1033~1107)다. 
정이는 아예 작문, 즉 글을 짓는 행위마저 도를 닦는데 해가 될 뿐이라는 ‘작문해도설(作文害道說)’을 개진했다. 정이는 <서경>의 ‘완물상지(玩物喪志)’ 성어를 인용하면서 “글 짓는 자들은 오로지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俳優)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완물상지는 “어떤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면 본래의 뜻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서예는 더 폄훼했다. 정이는 “서예에만 매달리면 그것은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라 했다.

정이는 작문을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의 재주’, 서예를 ‘시간낭비’라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시·서·화에 능했던 강희안이 넘치는 천부적인 끼를 감추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천한 기예를 후대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부끄러워한 이유였다.

 

■면박 당한 임금들…. “글씨 잘 쓰는 거 자랑하면 안됩니다”
강희안이 그랬을진대 임금이라면 어땠겠는가. ‘완물상지’는 후대의 모든 군주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해야 할 금과옥조가 됐다.
왕조시대 신하들은 군주가 혹여 쓸데없는 분야에 빠져 정사에 돌보지 않을까 끊임없이 ‘완물상지 하지마라’고 다그쳤다.

1932년 6월7일 동아일보 화보. 조선 백성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현충사를 중건하고 이순신 장군의 영정 봉안식을 열었다. 그 소식을 전면화보로 소개했다. 

 

특히 서예는 ‘시간낭비’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대표적인 ‘완물상지’의 분야였다. 자고로 군주가 서예솜씨를 자랑하면 ‘못난 임금’ 소리를 들었다.
예컨대 1405년(태종 5년) 세자(양녕대군)가 스승(성석린)에게 자기가 쓴 글씨 40여자를 보여주자 성석린은 “매우 잘 쓴 글씨”라며 ‘엄지척’ 했다.
그러자 세자가 의기양양해서 “예전의 국왕 중에는 누가 글씨를 잘 썼느냐”고 되물었다. 성석린은 “당 태종과 송 휘종이 잘 썼다”고 하면서도 핀잔을 준다.
“그러나 당태종은 참덕(慙德)이 있고, 송 휘종은 천하를 잃었습니다. 서찰(書札)은 군왕이 그렇게 중하게 여길 바는 못됩니다.”
이 무슨 말인가. 당 태종(재위 626~649)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만고의 성군이다. 그러나 맏형(건성)과 동생(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된 것은 옥의 티다. 역사는 그 일을 ‘당태종의 참덕(잘못)’이라 한다.

역시 시문과 서예, 그림에 뛰어났던 송 휘종(재위 1100~1125)은 풍류천자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반격에 사직을 잃는 치욕을 당한 망국의 군주였다. 성석린은 서예와 그림 같은 잡기에 능하다고 다 옳은 군주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성석린에게 한 수 배운 양녕대군은 훗날 조카인 세조 임금에게 똑같이 가르쳐주었다.
즉 1459년 세조가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또한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자 양녕대군이 면전에서 면박을 준다.
“군주가 비록 몇사람을 당해 낼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해도 제 자랑을 해서는 안됩니다.”
지존인 임금이 자랑 좀 했기로서니 아무리 큰아버지지만 그렇게 돌직구를 날리다니….(<세조실록>)

조선 임금들은 3살 때부터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순조가 5살 때 썼다는 ‘구오복 팔천세’ 글씨  

 

■‘그래도 서화솜씨는 내가 제일 잘나가!’ 자랑한 성종 
성종처럼 ‘완물상지 하지 말라’는 신하들의 집요한 지적질에 몸서리를 친 임금은 없을 것이다.
성종에게는 두가지 취미가 있었다. 활쏘기와 서화였다.
특히 서화는 성종 스스로 ‘내가 제일 잘 나가!’라며 자화자찬한 취미활동이었다. 대사헌 이세좌는 성종의 서예와 그림솜씨를 이렇게 표현했다.
“전하가 글씨를 쓰면 저절로 난새(鸞·전설상의 새)가 놀라고 봉황이 되돌아옵니다. 전하의 그림솜씨는 대자연의 이치와 그 신묘함을 견줄 수 있습니다.”(<성종실록>)
성종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1484년(성종 15년) 성종은 “(막 창건한) 창경궁 내간(內間·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의 전각 현판은 과인이 직접 쓰고 싶은데 괜찮냐”고 물었다. 원래 궁궐의 전각이나 문의 현판은 임금이 쓰는 것이 아니었다. 임금이 임명한 서사관이 써야 했다.
그렇지만 글씨에 자신이 있던 성종은 “그래도 내간의 현판 정도는 내 글씨를 걸어도 좋지않느냐”고 운을 뗀 것이다.
상당수 신하들은 “만세에 전하는 현판글씨인데 (명필인) 어필(임금의 글씨) 현판이라면 더 좋지않겠느냐”고 반색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신료들은 “어필로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이 실록기사를 쓴 사관은 “몇몇 신하들은 임금이 친히 하찮은 일, 즉 현판 글씨를 쓰도록 권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기예를 좋아하는 임금의 뜻에 부응했다”고 꼬집었다.(<성종실록>)

 

■“글씨 자랑은 임금이 할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성종 임금의 그림과 글씨가 시중에 떠돌았다는 것이 당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지금 시중에는 어찰(임금의 편지)를 얻어 한껏 치장해서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풍조가 일고 있습니다.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세좌는 “임금이 고작 문장의 수식에 정신이 팔리고, 서예와 그림 같은 서생의 하찮은 기예를 자랑하니 이게 될 말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전하께서는 재능과 기예가 많다는 사실을 제발 감추고 비밀로 하십시요.”
서예와 그림은 지존인 임금이 자랑해야 할 재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종은 손사래를 친다.

 

선조의 어필. 선조는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되지만 석봉 한호를 발탁해서 천자문을 보급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다. 선조 본인도 명필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는 본래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런데 대체 경들은 어디서 보았다는 거냐”고 되묻는다. 이세좌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필 서화는 신(이세좌) 등이 신승선·윤은로·윤여림의 집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성종을 다그친다.
이세좌는 “예부터 임금이 뭐든지 지나치게 좋아하면 성덕에 누가 된다’고 했다”고 성종 임금을 추궁했다. 성종은 그제서야 구구절절 번명을 늘어놓는다.
“실은 서화를 영돈녕(종친부의 일을 관장한 종1품 벼슬)에게만 내려주었을 뿐인데, 아마 여기서 유출되었을 것이다. 또 내가 서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우연히 했을 뿐이다.”(<성종실록>)

문종의 글씨. "굳세고 생동하는 진기(眞氣)가 오묘한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얻었다. 문종의 편지나 글씨를 얻는 사람은 마치 천금처럼 귀하기 여겼다고 한다.

 

■‘완물상지’의 경각심
그러나 성종의 글씨와 그림은 시중에 널리 퍼졌던 것은 사실이다.
중종~인종 때의 권세가인 김안로는 “성종이 틈나면 대략 붓을 휘둘러 글씨를 썼는데, 이 크고 작은 필적이 민간에 널리 퍼졌다”고 증언했다.
“성종의 필적을 얻은 이는 그것을 완상하고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해두었다. 큰 구슬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희락당고>)
군왕이 이렇게 서예에 관심을 두면 ‘잡기말예(雜技末藝)’니, ‘완물상지(玩物喪志)’니 하면서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것이 조선시대였다.
이유는 앞서 밝혔듯 분명했다. 군주가 서예와 같은 한가지 일에 집착하면 정사에 소홀할까 걱정한 것이다. 신하들은 ‘무엇이든 너무 지나치거나 자랑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군주를 사정없이 다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 아닌가. 제 아무리 겸손해야 할 군주라지만 넘치는 재능과 끼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신권보다 왕권이 강화되는 조선 후기들어 분위기는 다소 바뀐다.

임금이 승하한 뒤 선왕을 추숭하는 여러 조치가 취해진다. 선왕이 남겨놓은 어제(御製·임금이 남긴 시가와 문장)와 어필(임금의 글씨), 어화(임금의 그림)를 수집·정리해서 전각에 봉안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선왕의 위업을 기리며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어느 때든 ‘완물상지’의 경각심만큼은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 바로 조선시대였다.

 

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김안로는 성종의 글씨를 두고 “아리땁고 단중하여 조용히 조맹부의 법도를 따랐다”고 평했다.

 

■현충사를 둘러싼 논쟁 
왕조시대가 종막을 고한지 100년도 넘은 이때, 왕조시대 임금도 아닌 대통령의 글씨가 뜨거운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다른 곳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 즉 충남 아산 현충사의 현판을 둘러싼 논쟁이다.
‘난중일기’(국보 76호) ‘이순신 장군 장검’(보물 326호) 등 이순신 유물의 소유권자인 종부 최모씨는 “현충사에 걸려있는 박정희 현판을 떼고 숙종의 어필 현판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난중일기’의 현충사 전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왜 이런 주장을 할까. 먼저 현충사가 모두 왜색으로 물들어있다는 것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필적이 왜적과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신사와 비슷한 양식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또 지금의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색채가 너무 진하다는 것이다.

 

■현충사 하면 박정희가 떠오른다 

현충사 하면 ‘충무공 이순신’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박정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펼치면서 자신의 정치색을 너무도 짙게 덧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친필현판은 바로 그 정치색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사업도 그 자체로 역사라는 것이다. 왜색이 문제가 된다고 일제시대 때 깔아놓은 철도와 도로를 깔아뭉개야 하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또한 옛 본존에 걸려있는 숙종의 ‘현충사’ 현판은 겉만 한옥이지 콘크리트로 지은 지금의 본전 건물과는 구색이 맞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일리 있는 의견이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친회와 15대 종부의 해묵은 갈등도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문화재청은 오는 21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박정희 현판 문제를 다룬다. 어떤 결론이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숙종의 글씨. 다시 강건했던 필치가 부드럽게 변한다. 특히 숙종은 꺾는 부분을 각 지게 쓴 선대 임금들과 달리 모서리를 유연하게 돌려 꺾어 썼다.

 

■숙종이 하사한 현판
이 논쟁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될 본질이 있다.

어떤 경우든 ‘현충사’의 역사성을 훼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충사(사적 155호)가 어떤 곳인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유서 또한 깊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 임금이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를 가납함으로써 사당을 짓게 됐다. 3년 뒤인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顯忠祠)’ 글씨를 쓴 현판을 하사했다. 숙종은 이때 이순신 장군을 위한 제문을 내렸는데 그 내용이 심금을 울린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거니와 제몸 죽여 나라를 건진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이때 숙종이 표현한 ‘신망국활(身亡國活) 시견사인(始見斯人)’, 즉 ‘제 몸 죽여 나라를 구한 이는 이 분에게서 처음 본다’는 말은 충무공을 향한 최고의 찬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현충사 재건에 뜻을 모은 조선민중 2만명
그후 현충사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을 겸했던 현충사도 문을 닫았다. 일제강점기에 충무공의 묘소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이충무공유적보전회가 설립되어 모금운동을 펼쳤다. 1931년 6월26일 동아일보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달된 성금내역을 1면을 털어 게재했다.
‘정열(情熱)이! 단성(丹誠·뜨거운 정성)이!’를 제목으로 성금을 보내온 사연들을 전한 기사를 보면 눈물겹다.
조선 본토가 아닌 중국 단둥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먹을 것을 위해 조국을 버리고 타국에서 공장생활을 하면서 근근히 지내오다 충무공 유적 보존 소식을 듣고 20전씩 모았다”면서 성금을 보냈다.

심지어는 나병(한센병)에 걸려 대구 나병원에 수용된 환자 148명이 성금을 모아 보냈다는 기사도 실렸다. 9살 된 코흘리개 학생은 “성금모금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한테 받은 10전을 보낸다”면서 “이 적은 돈이라도 보태 충무공의 묘소를 보전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사연을 보냈다.
원래 4000원을 모금하려 했지만 성금이 쇄도하는 바람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2만여명이 참여한 성금의 액수는 무려 1만6000원에 달했다.
이렇게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까지 보낸 성금을 바탕으로 현충사가 중건된 것은 1932년 6월5일이었다.

 

정조의 어필. 할아버지 영조가 대신들에게 ‘우리 손자가 얼마나 글씨를 잘 쓰냐’고 극찬했다.

■구석으로 몰린 숙종의 ‘현충사’
그러다가 1966년 4월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따라 지금과 같은 규모로 확장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성역화 기념으로 새로 건립한 현충사의 본전에 한글현판 ‘현충사’를 내걸었다. 이외에도 현충사의 정문에는 ‘충무문’, 본전의 정문에는 ‘충의문’ 현판을 걸었다.
그러니까 박대통령이 현충사에 건 현판은 ‘현충사’ ‘충무문’ ‘충의문’ 등 3개인 것이다.
이 와중에 당대 최고의 명필인 숙종 임금이 쓴 ‘현충사(顯忠祠)’ 현판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사실 직접 찾아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다. 필자는 얼마전 실로 오랜만에 다시 잘 정돈된 현충사를 찾아갔다.
1966년 성역화에 따라 확정 정비된 현충사의 중심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무문-충의문-현충사’ 친필 현판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면 숙종의 어필 현판은? 정문에서 현충사로 들어가는 중간의 왼쪽에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 옛 본전에 걸려있다.
옛 본전은 1966년 성역화 작업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이다.

 

■현충사에 한번 가서 직접 느껴보라
만약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현충사를 찾아 중심축선으로만 걷는다면 십중팔구 놓치고 말 것이다.
결국 충청도 유생의 애끊는 상소와 숙종의 ‘현충사’ 현판, 그리고 일제강점기 2만여 민중의 정성이 담겨있던 그 유서깊은 옛 현충사 본전은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긴채 조연으로 전락한 셈이다.
필자는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구든 현충사 현판 논쟁에 가세하여 이런저런 의견을 내려한다면 반드시 현충사를 한번 방문해보라.
찾아가서 성역화 이후의 웅장한 현충사와, 지금은 한편의 구석에 서있는 옛 현충사 건물을 비교해보라. 물론 박정희 현판과 숙종의 현판도 한번쯤 살펴보라. 지금의 현충사는 과연 누구의 현충사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첨언: 필자는 현충사를 다녀와 옛 자료를 뒤져보았다. 2005년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문화재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37곳(43건)이었는데, 그중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28곳(34건)에 달했다. 지금은 교체되었지만 한글 현판인 ‘광화문’(사적 117호)을 비롯해 영릉·녕릉(사적 195호), 행주산성(사적 56호),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사적 229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3호) 등 내로라하는 사적의 현판이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이중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유허인 화석정(파주시유형문화재 61호)와 오죽헌(보물 165호)까지 포함돼 있다. 18년이나 집권한 탓도 있겠지만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도 서예를 통치에 활용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서예’를 두고 ‘잡기말예’니, ‘완물상지’니 하며 경계했던 조선 신하들의 아우성을 떠올려본다. 박정희 현판의 존치를 주장한 종친회장이 ‘숙종만 임금인가, 박정희 대통령도 임금이다’라고 주장한 종친회장의 인터뷰도 눈에 띄었다. 사실이 아닌 내용이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이민식, ‘영조어필비’, <영조어필비>,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도록. 2015
이동국, ‘퇴계 이황 서예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04
양영술, ‘정조어필의 유가미학적 고찰’, 성균관대 석사논문, 2010
장학진, ‘역대대통령들의 묵적 연구’, 원광대 석사논문, 2017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실의 묵향-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왕실 서예> 테마전 도록, 2006
서울서예미술관, <조선왕실어필>, 한국서예사특별전 22 도록, 예술의전당, 2002
현충사관리소, <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 1999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