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15살에 신라 가야 백제인은 나라를 구했다

“온조왕 41년(기원후 23년)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했다.”
“진사왕 2년(386년)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을 설치했다.”
“전지왕 13년(417년) 동·북부의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다. 병관좌평 해구(解丘)가 공사를 감독했다.”
“동성왕 12년(490년) 북부의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현성과 이산성 두 성을 쌓았다.”
“무령왕 323년(523년) 한강 북쪽 백성 중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김해 퇴래리 고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4세기 무렵 가야의 철기 문화 수준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온조왕의 유훈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등장하는 기사다. 모두 15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아마도 15살을 노동력의 기준 나이로 여겼음이 틀림없다. 후대의 임금들은 바로 이 온조왕의 유훈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의 경우엔 한술 더 뜬다. 신라의 화랑도 조직을 보자. <화랑세기>에는 “13~14살이 되면 낭도가 될 수 있었다”고 기록됐다.
이 가운데 15살에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사다함은 걸출한 화랑이었다. 사람들이 풍채가 미끈하고 뜻과 기개가 곧은 그를 화랑으로 받들었다.
1000명이 그의 밑에 들었다. 561년 진흥왕(재위 540~576)이 가야를 정벌하려 하자 사다함은 출전하겠다고 나섰다. 임금이 ‘너무 나이가 어리다’고 불허했지만, 사다함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다. 결국 예하 장수가 되어 출전한 사다함은 기습작전의 선봉을 자처했다. 사다함의 전공으로 가야는 마침내 멸망했다.
진흥왕이 가야 정복의 1등공신이 된 사다함에게 가야 노예 300명과 전지(田地)를 하사했다. 하지만 사다함은 가야 노예들을 모두 풀어주고 논밭과 토지도 사양했다. 왕이 “그래도 받아야 한다”고 강권하자 사다함은 조건을 달면서 받았다.
“그러시다면 알천(閼川·경주시 북천)의 땅만 주옵소서.”
사다함은 진흥왕의 명령을 끝내 어기지 못했지만, 그 조차도 쓸모 없는 땅을 ‘콕 찝어’ 받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15살에 있었다.(<삼국사기> ‘열전·사다함전’)

■사다함·관창·김유신의 15살
사다함 뿐이 아니다. 삼한일통의 꿈을 이룬 김유신 역시 15살(609년)에 화랑이 됐다.
“김유신은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다. (김유신을 따르는 낭도집단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했다.”(<김유신전>)
김유신은 17살 때 고구려·백제·말갈이 침략한 것을 보고는 분기탱천해서 중악(경주 단석산)의 석굴로 들어갔다.
그가 눈물로 나라를 구할 방도를 구하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감탄하면서 비법을 일러주었다.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장하구나. 함부로 쓰지 마라. 의롭지 못한 일에 쓰면 재앙을 받을 것이다.”
김유신은 1년 뒤인 18살 때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삼국유사> ‘김유신전’) 
화랑 관창(645~660)은 또 어떤가. 관창이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에서 순국한 나이가 우리 나이로 16살이었다.
백제 계백(?~660) 장군이 그를 붙잡아 투구를 벗긴 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장탄식했다지 않는가.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구나! 소년이 이럴진대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야!”
어쨌든 관창의 순국에 크게 용기를 얻은 신라군이 맹진격하자 백제군은 대패했다. 백제는 최후의 회전인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사다함·관창·김유신…. 가야와 백제, 고구려를 멸하고 삼한일통을 이룬 주역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15살 무렵에 뜻을 세우고, 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

부산 복천동 22호분에서 확인된 철정(덩이쇠). 무덤에 묻을 때 관의 밑바닥에 깔아 놓았는데,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다. 덩이쇠는 금괴처럼 돈으로도 쓰였고, 실제로 철제도구를 만들 때도 사용됐다.

■갑옷을 입은 15살
아무리 역사기록이 존재한다 해도 사실 믿기지가 않는다.
15살이라면 아직은 철없는 아이가 아닌가. 게다가 서양의 만 나이로 치면 13~14살이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럴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가야 및 신라시대 갑옷 20령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갑옷을 처음 입었을 때의 나이가 바로 15살 언저리라는 것이었다.(송정식의 ‘가야 종장판갑의 장식적 요소와 상징적 의미’, <양동리, 가야를 보다> 특별전 도록, 국립김해박물관, 2011)
연구에 활용된 종장판갑(縱長板甲·세로로 긴 철판을 구부려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서 만든 갑옷) 20령을 최초로 제작했을 당시의 가슴둘레 평균을 구해보았더이 약 80.16㎝였다. 그런 다음 한국인의 신체조사결과(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1979년 자료)에 대입시켰다.
그 결과 갑옷의 평균 가슴둘레에 해당되는 나이는 15살(80.1㎝)이었다.
15살에 갑옷을 입었다는 것인데,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닐까.

■혹독한 성인식
그러나 연구자는 그럴 수 있다는 몇가지 예를 든다. 물론 추론이다.
즉 처음 갑옷을 입는다는 것을 통과의례의 하나인 성인식이 아니었을까. 성인식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인의 자격을 획득하는 의례를 뜻한다. 송정식씨는 통과의례 가운데서도 특정집단에 자원 가입할 때의 의식을 주목했다.
이것을 흔히 입사식(入社式)이라 한다. 요즘도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누얼족 소년들은 14~16살 때 이른바 입사식을 한단다.
작은 칼로 얼굴과 귀 사이의 얼굴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낸다. 이때의 고통을 참아야 함을 물론이다. 케냐의 유목민인 마사이족의 경우 12~16세 소년들이 백점토를 바르고 무기를 소지한 채 대략 2개월 동안 격리생활을 한다. 이런 행위를 4~5년마다 한번씩 실시하며 같은 시기에 시술받은 소년은 같은 연령 집단의 성원으로서 일생의 친구관계가 유지된다. 이른바 할례의식이라 할 수 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따비(손잡이를 잡고 발판을 밟아 삽질하듯 땅을 일구는 농기구).

■아동학대 당한 마한인들
그건 아프리카 이야기가 아닌가. 그걸 어떻게 우리 역사와 결부시킬 것인가.
그런데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전·마한조’을 보면 수상한 대목이 나온다.
“나라에 일이 생기거나 성곽을 쌓도록 시키면 용감하고 건강한 여러 소년들이 등에 가죽을 꿰어 큰 밧줄에 묶고 큰 나무를 붙들어 맨 뒤 종일 지껄이며 고함치면서 힘쓰는데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힘쓰기와 건강함을 권하는 것이다.”(<삼국지>)
“그 사람들은 장대하고 용감하다. 소년들도 성을 쌓고 집 짓는데 힘을 쓴다. 문득 허리에 줄을 매어 큰 나무에 매달려 소리치며 강건함을 부르짖었다.”(<후한서>)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나라에 일이 있거나 성곽을 쌓을 때’라는 것이다. 북한의 백남운(白南雲·1894~1979)은 이를 두고 1933년에 쓴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소년들의 등에 가죽을 꿰면서까지 강제노역을 시켰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삼한사회의 비참한 강제노역’으로 본 것이다.

■인간 가래가 된 15살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성인식(입사식)의 원형이 아닐까. 성인식은 육체적·정신적인 시련을 통해 성인의 자격을 인정받는 풍습이다.
이런 성인식의 표현이 바로 할례의식이다. 여자는 음핵제거, 남자는 포경수술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송곳니 발치, 문신 새기기, 콧구멍 뚫기, 귓구멍 내기, 피부에 상처내기 등이 있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면 남자는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여자는 여인의 취급을 받지 못해 혼인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따라서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
일본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는 ‘등가죽에 긴 끈을 꿰어 온종일 환호하는’ 기이한 행위는 단순한 고역이 아니라고 했다. 바로 원시적인 성인식에서 볼 수 있는 고통과 시련의 할례의식이라는 것이다.
<삼국지>에 보이는 ‘목삽(木삽)’은 긴 자루의 삽 형태를 갖춘 가래를 뜻한다. 3명이 한 조를 이뤄 가래의 양쪽 구멍에 끈을 묶어서 양쪽에서 잡아당기며 땅을 파는 농기구이다. 목삽은 소로 논밭을 가는 우경(牛耕)이 발달하기 전에 땅을 갈아엎는 데 사용했다.

■성인의 자격
그런데 여기서 15살이라는 나이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중국 동한 시대의 법전인 <백호통(白虎通)>은 “8살 때 소학에 들어가고 15살 때 태학(太學)에 들어간다”고 기록했다.
이는 일찍이 공자는 15살을 ‘지학(志學)’, 즉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라고 규정한 것과 연결된다.
또 <주자가례> ‘사례편람’은 “남자 15살에 갓을 쓰는 관례를 행한다”고 했다. 여자 나이 15살엔 계례(계禮)를 올렸다.
계(계)는 비녀를 뜻하는데, 15세가 된 여자가 땋았던 머리를 풀고 쪽을 찌는 성인식을 일컬어 계례라 한다.
남자는 인격의 수양과 완성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둘 나이라는 것이고, 여자는 시집을 갈 수 있는 나이라는 뜻이다.
그 나이가 되면 ‘~해라’는 등의 낮춤말씨가 아닌 ‘~하게’ 풍의 보통말씨로 높여 말한다. 또 어른이 된 이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남자의 경우 ‘자(字)’, 여자의 경우 ‘신사임당’과 같은 당호(사임당)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그러니까 15살은 성인의 자격을 취득하는 나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
그런데 말이 15살이지 옛 사람들이 말하는 15살은 지금의 만 나이로 치면 14살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 2학년이다.
밤늦게까지 학교다 학원이다 해서 뺑뺑이를 돌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오는 아이들이다.
국가의 공역에 끌려다니고, 심지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마한·백제·신라의 15살 보다는 그래도 나은 삶인가.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한밤에 어깨가 축 늘어져 터벅터벅 걷고 있는 지금의 15살 아이들을 보면 애처롭기만 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인 15살은 쉽지 않은 나이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