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래자 思來者

잘못된 임시정부 수립일…어디서부터 문제였나

4월 13일자 달력을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1990년부터 시작된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를 위해 제정한 날짜였다. 왜 4월13일이었을까.

상하이(上海) 주재 일본 총영사국 경찰이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 직후 임시정부 사무실을 급습·압수한 문건을 토대로 작성한 ‘조선민족운동연감’을 근거로 했다.

1938년 4월30일자 한국국민당 기관지인 <한민> 18호기사. ‘1919년 4월11일 임시로 10개조의 헌장을 제정 발포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했는데, 금년 4월11일이 임시정부를 성립한지 제19회째 되는 기념일이므로 임시정부에서는 그 날에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다.|출처: 한시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바로 잡아야 ’,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4집, 2008년 봄 에서 

연감의 1919년 4월 13일조에는 ‘내외에 독립정부 성립을 선언해(內外ニ獨立政府成立ヲ宣言シ)…’라 적혀 있었다.

이 일본 경찰의 연감은 다름아닌 임시정부가 1920년에 펴낸 <한일관계사 사료집> ‘독립운동 역사’의 4월13일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 ‘4월13일’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2005년부터 한시준 단국대 교수(역사학과)가 ‘4월11일’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한교수는 “1938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 약 7개월간 머무르고 있던 임시정부가 ‘4월11일에 정부수립 기념식을 거행한(했)다’는 <한민(韓民)> ‘17·18호’ 기사를 발굴했다.

<한민>은 김구 선생 등이 세운 독립운동단체이자 정당인 한국국민당의 기관지이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의 <대공보>와 <신화일보>도 1942년 4월11일 ‘제23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기사를 냈다.

특히 <대공보>는 ‘조선의 해방(朝鮮的解放)’을 주제로 한 축하사설까지 실었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이 중국 인사들에게 보낸 초청장에도 ‘4월11일 정부수립 23회 기념식이 열린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상하이 주제 일본경찰이 작성한 <조선민족운동연감>. 1919년 4월13일조에 임시정부가 내외에 독립정부성립을 선언해~' 등등의 기록을 남겼다. 임시정부의 공식 사료인 <한일간계사료집>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료집은 오류가 있었던 임정자료집을 토대로 옮겨 쓴 것이다. |출처: 한시준의 논문에서  

1943년에도 “4월11일 임시정부 성립기념일을 맞아 중한문화협회가 강연회를 개최했다”(<신화일보> <중앙일보>)는 기사가 보였다. 강연회에는 김구·조소앙·신익희 등 4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강연회에 참석한 중국인들이 연합국이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할 것을 촉구했고, 김규식이 임시정부의 성립 경과와 한국독립운동의 실상 등을 중국어로 강연했다”는 기사내용도 눈에 띈다.

이밖에도 “1945년 4월 11일 제38차 임시의회 개회식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기념식이 임시정부 예당(禮堂)에서 거행됐다”는 임시의회 회의록도 발굴됐다. 당사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스스로가 해마다 4월11일에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다.

그렇다면 왜 임시정부가 작성했다는 <한일관계사료집>에는 왜 4월13일이라 했을까.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과)는 “<사료집> 정리 과정에서 1919년 4월 한달간 진행된 사건들을 4월13일조에 한꺼번에 묶어놓은 데서 비롯된 기록 오류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박교수는 “특히 문제의 4월13일에는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되어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저 4월13일 김구·안승원·김병조 등이 상하이에 온 날짜라는 것만이 ‘팩트’이다.

1942년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이 공동명의로 중국인사들에게 보낸 임시정주 수립 기념식 초청장. 4월11일이 임시정부 제23주년 기념일이라는 것과, 하루 전인 10일 오후 3시에 다과회를 개최하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다.

4월11일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중 29명이 1919년 4월10일 밤 10시에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인 김신부로에서 모였다.

회합의 명칭은 임시의정원이라 했고, 이 회합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밤샘회의 끝에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국무총리 등 정부의 각료가 선출됐고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제정 통과됐다.

당시 임시정부 회의록에는 “4월11일 국호·관제·국무원 등의 문제를 토의하자는 동의와 재청이 가결되었다”고 분명히 기록돼있다. 

급기야 이낙연 국무총리가 내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11일로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한시준 교수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지 무려 13년만의 일이다.

한번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되돌려놓기가 이토록 힘겨운 것이다. 4월11일이면 어떠고, 4월13일이면 어떠냐, 불과 이틀차이인데 하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다.

하지만 헌법 전문이 규정했듯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천명했다. 그러니 임시정부 수립일부터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법통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기사는 한시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 바로잡아야’,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4집, 2008 봄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박찬승 교수와는 전화통화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