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운이 좋은 겁니다. 오전에 오신 분들은 비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소나기가 막 그친 5월 어느날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승리전망대(해발 495m)에서 바라본 오성산은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 같았다. 철원군청에서 나온 해설사가 “저렇게 맑고 깨끗한 오성산 주변과 북한 지역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의 음덕”이라고 했다.   

 

■오성산의 봄날
저 멀리 해발 1062m의 오성산이 손에 잡힐 듯 하고 그 앞으로는 이른바 저격능선(Sniper ridge) 이 이어졌다. 오성산 정상에서 볼 때 저격하기 딱 좋은 능선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저격능선 뿐이 아니다. 오성산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접전의 장소였던 고지가 줄줄이 이어진다. 오성산 남방에 있는 봉우리가 해발 598m인 삼각고지이며, 삼각고지를 중심으로 북동쪽에는 1950년대 미국의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제인러셀 고지’가 있다. 북서쪽에는 ‘파이크스봉(Pikes Peak)’‘, 남동쪽에는 ‘샌디능선(Sandy Ridge)’이 있다. 파이크스봉, 제인러셀고지, 삼각고지를 합해 ‘삼각고지군’이라 일컬어졌다. ‘저격능선’은 바로 이 삼각고지 군 동쪽에 자리 잡은 해발 538m의 능선이다. 한국전쟁 때 참전한 중국은 이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해 ‘상감령(上甘領)’이라 했다.
이 고지군은 지금 보면 깊고 넓은 오성산을 호위하는 작은 고지와 능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강원 철원 근북면 승리전망대에서 바라본 오성산과 그 주변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군(제인러셀 고지, 파이크스봉 , 샌디능선)이 펼쳐져 있다.

■42일 혈전의 끝
하지만 이 고지와 능선이 바로 한국전쟁 때 피아간 2만(한국군 자료)~3만7000명(중국군 자료)의 젊은이가 죽거나 다친 혈전의 현장이다.
즉 1952년 10월 유엔군은 오성산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삼각고지(미 제7사단)과 저격능선(한국군 제2사단)을 목표로 한 작전을 펼쳤다.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즉 중국의 표현인 ‘상감령’은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당시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적의 생명줄인 철원-평강-김화의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를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철의 삼각지대’의 왼쪽 어깨가 ‘백마고지’라면, 오른쪽 꼭짓점은 바로 이 오성산 일대였던 것이다.

승리전망대에 마련된 비무장지대 이북의 상황도, 오성산 지역엔 지금도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이른바 지하만리장성이 구축돼있다고 한다. 

당시 공산군측은 “상감령을 잃게 되면 오성산이 직접 위협을 받으며 유엔군은 높은 지형에서 아래를 바라보게 되어 지원군(중국군)이 평강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면서 상감령 사수작전을 펼쳤다.
10월14일 마침내 유엔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무려 42일간이나 치열한 공방전으로 중국군 자료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3개 사단 넘는 6만 병력과 300여문 화포, 200여대의 탱크, 3000여대의 항공기를 투입했고, 포탄 190만발, 폭탄 5000여발을 쏟아 부었다. 중국군 역시 3개 사단(4만 명)과. 산포와 야포ㆍ유탄포 133문, 로켓포 24문, 고사포 47문, 박격포 292문이 35만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 전투로 상감령 산봉우리는 2m나 낮아졌고, 융단폭격으로 1m가 넘는 흙먼지가 쌓였다고 한다. 전투결과 한국군 자료로는 2만 명(중국군 1만4815명, 유엔군 4683명), 유엔군 자료로는 2만8000명(중국군 1만9000명, 유엔군 9000명), 중국군 자료로는 3만7000여 명(중국군 1만1529명, 유엔군 2만5498명) 등이 손실을 입었다.
아군 전사(戰史)에서도 “심지어 백마고지 전투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단일전투에서도 이렇게 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상관도, 부하도 누구인지 모르고 달려든 전투
이 치열한 전투의 승리자는 어느 편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유엔군의 작전 실패였다.
40일이 넘는 작전결과 유엔군은 목표인 삼각고지를 빼앗는데 실패하고 저격능선의 일부인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저격능선 전투로만 한정한다면 유엔군의 승리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가 낸 <한국전쟁사:유엔군참전편-제11권>은 “유엔군 작전은 겨우 저격능선 일각만 확보하는데 그치고만 실패한 작전”이라고 단정했다.
반면 중국군은 “상감령 전역은 전쟁 막바지 대공세였던 금성 전역(전투)과 함께 중국 지원군이 조선 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렇다면 왜 실패라 자인하는가.
우선 유엔군은 맨처음 작전을 펼칠 때만 해도 낙관론을 펴고 있었다.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에 미군과 한국군 1개 대대씩만 투입한다 해도 단 5일간의 작전기간에 약 200명의 인명손실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40여 일간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삼각고지 확보에 실패하고 저격능선 일부만 확보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특히 유엔군이 고전하자 미국내 여론도 급격히 악화됐다.
미 7사단이 맡은 삼각고지에서 미군 2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자 미국 언론들은 “한국전선에서 미군이 명분 없는 싸움에 쓰러져 가고 있다”고 연일 보도했다. 급기야 미군은 삼각고지 전투를 한국군 2사단에게 인계한다. 한국군 내부에서도 “우리가 미군의 희생양이냐”는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나 한국군의 경우 손실된 병력을 아무 것도 모르는 신병들로 채웠다. 신병들은 소속부대마저 모르고 전투에 투입됐고, 일선 지휘관들도 자기 부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전투를 벌였다.

 

지하갱도를 뚫고 있는 중국군. 중국군은 서해안부터 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250~287킬로미터에 폭 20~30킬로미터의 갱도를 구축했다. 중국군은 이것을 지하만리장성이라 했다. 

■원자폭탄이 터졌어도…  
그러나 이 ‘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중국의 입장에서는 상감령 전역) 실패의 으뜸 요인은 따로 있었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1년 가까이 오성산 일대의 고지에 구축해놓은 지하갱도 때문이었다. 이 지하갱도를 중국은 ‘지하 만리장성’이라 했다. 지하갱도의 위력은 엄청났다.
저격능선 전투를 지휘한 당시 정일권 한국군 제2사단장의 회고담을 보자.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은 동굴입구에 들어가면 안은 사통팔달이었다. 중공군의 반격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동굴진지에 숨어 있다가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중국군 제45사단은 오성산 일대에 총연장 8.8㎞의 갱도 306개와 엄개참호 160개, 교통호 53㎞, 그리고 대전차호 4개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게다가 참호 2400개와 노루방책 2.6㎞, 철조망 2.3㎞, 동굴 양식 창고 61개, 동굴 탄약창고 65개, 갱도와 연결된 엄폐식 취사장 140개, 각급 지휘소 및 관측소 204개를 건설했다.
투항한 한국군으로부터 유엔군의 공격 첩보를 입수한 중국군은 저격능선 하단~상단을 수직으로 연결한 폭 2m, 깊이 1.5m의 교통호를 20m 간격으로 뚫었다. 8부 능선 좌우로 연결된 교통호를 따라 8~10m 간격으로 폭격과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엄체호를 구축했다. 능선 북단에 100~150명을 수용하는 대피호를 쌓기도 했다.
오죽하면 미군 군사전문가들은 “설령 원자폭탄을 사용했다 해도 저격능선과 오성산의 공산부대를 모두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중국군의 한국전쟁사 3>)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오성산의 지하갱도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경기 연천의 불모고지 전투를 취재한 일본 기자의 기사내용을 보면 흥미롭다.
“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제트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일제히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활활 타올라 가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 공산군 진지 아래 장병들은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平松武雄의 <중공과 한국전쟁>)

갱도와 갱도 사이를 뚫고 만난 중국군들.

 

■지하에 장성을 구축하라!
이것이 바로 중국이 한국전쟁 전 전선에 뚫어놓은 이른바 지하만리장성이다,
중국은 전쟁이 교착상태로 전개되던 1951년 8월쯤부터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2차대전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하는 견고한 진지였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쌍방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전선이 교착화 한 데 따른 것이다. 왜냐.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시킨 신생국으로서는 경제발전과 한국전쟁을 동시에 치를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전쟁을 확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등을 내세워 1개진지에 수 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장비가 낙후돼있는 상황에서 전선수호는 중국군의 최고덕목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51년 6월 중순 중국군 제47군단 제140사단이 유엔군의 맹포ㆍ폭격을 방어할 이른바 ‘고양이 귀’ 모양의 동굴을 대량으로 만든다.
즉 교통호 내부에 각기 한 명 당 두개씩 0.8~1m 넓이, 지상에서의 깊이 2~3m의 동굴을 만든 것이다. 1개 중대 혹은 1대 대대의 진지는 유엔군 1000~2000발 포탄포격과 미군기 10대의 소형폭탄의 폭격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든 동굴의 효용성이 중국군 사령부는 크게 고무됐다.

동굴처럼 파놓은 갱도 를 통나무로 갈무리하는 중국군들

“거점은 반드시 갱도식으로 확보라고 적의 유탄포와 포탄의 공격을 견디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전법은 곧 효과를 입증한다.
“경기 연천 마량산과 216.8고지에서 빛났다. 51년 10월4일~7일 사이 영연방 사단은 매일 1만~2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지만 진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영국군 21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고 모두 700여명의 적을 살상했으며….”
급기야 중국군은 1951년 10월21일 “주요진지는 반드시 갱도식으로 하되 깊이는 5m 이상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로써 서부전선 예성강 하구에서 북한강 동쪽의 양구 문등리까지 전 전선에 걸쳐 8개 중국군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 이른바 갱도식 방어진지 구축작전을 펼친다.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할 도구가 없으면 손수레를 만들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낮에는 흙을 동굴입구 운반했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이 틀 때까지 위장하면서 공사를 계속했다. 쇠로 된 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타는 숯을 넣은 탄등(炭燈)까지 만들었다.”
결국 공산군측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250㎞ 길이의 모든 전선에 종으로 20~30㎞의 두꺼운 방어선을 갖추고 땅굴을 거점으로 한 거점식 진지방어체계, 즉 지하갱도를 구축했다.

 

■마지노선은 저리 가라!
그들의 표현대로 ‘난공불락의 지하만리장성’을 건설한 것이다.
250㎞의 한반도 중부전선에 중국군이 판 갱도는 7789통로, 길이 198.7㎞, 엄체호 75만2900개, 노천 및 엄폐식 참호길이 3420㎞, 북한군이 판 갱도는 1,730통로, 길이 88.3㎞, 각종 엄체호 3만1700개, 참호길이 263㎞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폭탄대피소, 지휘소, 관측소, 엄폐부, 토치카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이상 상감령 전투)에서 유엔군을 상대하고 있는 중국군. 중국군의 갱도작전 때문에 유엔군이 고전했다. |눈빛출판사 제공

등은 8만5000여개(중국군)와 1만6000여개(북한군)이었다.
이렇게 구축된 지하만리장성의 제원을 계산하면 총 갱도수 9519개, 갱도길이 287㎞, 엄체호 78만4600개, 엄체호 총 길이 3683㎞, 그리고 각종 시설물 10만1500개이다. 지하장성의 총연장만 해도 400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철옹성인 것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할 만큼의 진지를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건설한 셈이 된다. 공산군의 방어진지는 공중 및 야포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서해안~동해안에 형성된 개미집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고 자랑했다.(<모택동선집>)
공산군이 구축한 지하요새는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나 되는 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 동굴로 통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의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한국전쟁 하>)

중국군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의 제원도

마오 주석은 1952년 8월 “해답은 굴을 파는 것이다,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1층으로 지하도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고 큰소리쳤다.(<중공군의 한국전쟁(간사, 군사연표>)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 아니었다. 국군 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공산군이 진지 내에서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당까지 마련돼 있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갱도공사가 마무리됨으로써 거점방어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중국군이 수행한 이 지하만리장성의 개념은 전쟁 후 북한군에게 고스란히 전수됐고, 이후 북한군 전투교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북한군 역시 이 갱도작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은 땅굴 작전 역시 이 갱도작전의 하나라는 것이다.

 

■갱도작전의 위력
중국은 이 지하만리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바로 ‘상감령 전역(戰役ㆍ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이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군은 갱도 위쪽에 구멍을 파고 폭약을 이용, 폭파를 시도하고 갱도입구에 폭탄, 폭약통, 수류탄, 유황탄, 가스탄을 투척하거나 화염발사기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갱도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오염됐으며, 초연, 독가스, 피비린내, 대소변 냄새, 땀 냄새 등이 갱도내부에 가득해 호흡이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갱도내에서 손풍금을 켜고 있는 중국군들.

하지만 중국군의 갱도작전은 위력을 발했다.
“23개 갱도방어 부대가 20일간 158차례에 걸친 습격으로 적 사살 2000명, 중기관총 24정 노획, 7개 분소대진지 탈환 등의 전과를 올렸고, 597.9고지(삼각고지)의 1갱도를 방어하던 저격수는 기관총과 소총으로 3일간 적 115명을 살상했다.”(<한국전쟁시 중공군 전술분석 및 평가>
중국측은 “갱도를 핵심으로 견고한 방어 전략을 펼쳐 1만1000여명의 희생으로 유엔군 2만5000여명을 살상시켰고, 항공기 274대를 격추시켰다”고 자랑했다.
물론 갱도의 부작용도 있었다. 하루 종일 등잔불을 켜야 했기에 등불용 콩기름이 1개 군에서 월평균 10만근이나 소요됐다. 식수부족으로 혀가 갈라지고 코피가 터지는가 하면 야맹증 환자가 급증하기도 했다. 중국군은 솔잎을 1시간쯤 삶아 일주일간 거푸 마신다든가, 물에 개구리 알을 넣고 끓인 뒤 하루 2~3차례에 걸쳐 이틀 동안 마신다든가 하는 현지 주민의 민간요법으로 치료했다고 한다.
 
■백악관에서 울려퍼진 수상쩍은 피아노곡 
중국의 ‘상감령 전역’ 전황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대륙에 전해졌다.
중국인들은 한반도 중부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지원군의 승전소식에 열광했다. 중국이 파견한 위문단원들은 상감령 전역의 갱도를 찾아 대륙에서 보낸 대량의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중국군에게 전달했다.

중국군을 위무하고 있는 위문단의 공연모습.

또한 1950년대엔 바로 이 ‘상감령 정신’이 대륙을 풍미했다. ‘상감령 정신’이란 곧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을 뜻했다.
1956년에는 영화 ‘상감령’이 중국 내에서 개봉됐으며,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 바로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었다.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다. 이 때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것이다. 바로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我的祖國)’이었으니 말이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가사에 나오는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곧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미국은 과연 랑랑의 연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았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도 비무장지대 일대에는 중국군 등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오상산 일대에는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만리장성이 있다고 한다.

 

■비무장지대는 세계유산이다
지금 이 순간 왜 패배한 전투의 상처를 굳이 들춰보고 있는 것일까. 중국군이 무모한 인해전술만으로 한국전쟁에 임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꼽고 싶다. 왜곡딘 전쟁사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군의 교리발전 뿐 아니라 교육훈련에도 도움이 된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있다,
또하나 패배한 전투에서 배우는 반면교사의 정신도 중요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비무장지대 안에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요새가 지하에 묻혀있다는 사실이다. 그 규모는 필설로 다할 수도 없다.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총연장 250~287㎞, 폭 20~30㎞에, 참호와 교통호까지 계산한다면 총연장은 4000㎞에 이른다. 단순계산으로만 보더라도 5000~7000㎢에 달한다. 중국식 표현대로 ‘지하만리장성’이라고 해도 좋다. 남북한과 유엔 16개국, 그리고 중국 등 19개국 젊은이의 피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비무장지대 일원은 자연유산이나 문화유산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문화유산의 개념 가운데서도 하나의 거대한 전쟁유산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중국이 구축한 거대한 지하장성과 전쟁 이후 쌍방이 설치한 콘크리트 벙커 등 각종 군사시설은 하나의 거대한 단일요새이자, 대표적인 전쟁유적이라 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한미, 북미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리면서 한반도에 전례없는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회담 결과에 따라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협정 체제로 전환되면 비무장지대 일원은 파천황의 변화를 겪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비무장지대 일원은 19개국 젊은이들의 피와 추억이 서린 곳이며, 전쟁 후에도 동서냉전의 상징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인류에게 다시는 이 같은 전쟁을 치러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안겨주는 평화기원의 유산으로 남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할 수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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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해방군화보사, <그들이 본 한국전쟁>, 노동환 외 옮김, 눈빛 출판사, 2005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하>, 국방군사연구소, 1997
국방부 전사편찬위, <한국전쟁 전투사-14, 저격능선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98
육사 화랑대연구소, ‘한국전쟁시 중공군 전술분석 및 평가’, <군사연구총서> 49, 화랑대연구소, 2004
안용현, <한국전쟁 비사 4-혈전과 휴전>, 경인문화사, 1992
오규열, ‘중공군의 상감령 전투에 대한 재평가’, <군사> 46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임종득, ‘저격능선(상감령) 전투에 대한 재조명’, <군사평론> 345호, 육군대학, 2000
국방부 전사편찬위, <한국전쟁사 제11권-유엔군 참전편>, 전사편찬위, 1980
平松武雄, <중공과 한국전쟁>, 황인모 옮김, 병학사, 1989 등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