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디 금석에 벽이 깊은데(我本癖金石) 그대는 시 노래를 절로 잘했네.(君自善歌詩)~”(<완당전집> 9권)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글씨면 글씨, 그림이면 그림, 시면 시, 경학이면 경학, 못하는 분야가 없어서 ‘해동의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 중에서도 추사가 스스로 특별히 자랑한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금석벽’이었다. 벽(癖)이란 시쳇말로  ‘마니아’ 혹은 ‘덕후’로 표현할 수도 있으니, 추사는 ‘금석 덕후’ 혹은 ‘금석 마니아’라 칭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북한 고고학자 도유호(1905~1982)가 1961년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로 펴낸 고고학개설서(<조선원시고고학>)에서 추사를 ‘최초의 근대적 고고학자’로 꼽았다. 하기야 금석학이란 고동기의 명문이나 석각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고고학의 한 분야라 할 수 있다. 괜한 수사가 아니다.

 

추사가 찾아낸 문무왕비석,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죽음과 유언, 문무왕에 대한 찬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최초의 고고학자
추사는 함경도 유배 시절(1851~52) 북청 인근의 신창리 청해토성을 찾았다가 석기 몇 점을 발견했다.
돌로 만든 화살촉과 창, 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과 들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석기들은 귀신의 조화 쯤으로 여기는게 보통이었다.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뇌신(雷神)이나 뇌공(雷公)이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조선조 세종 시절에는 임질(성병이 아니라 아마도 요로결석으로 판단됨)에 걸린 세종의 치료를 위해 돌칼과 돌화살촉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조선시대까지 각종 의서는 “석기는 피로, 설사, 구충은 물론 석림(요로결석의 일종)에 효험이 있는 약재”로 여겼다.   
그러나 추사는 대번에 ‘숙신의 유물’이라고 판단했다.
기원전 6~5세기부터 만주 동북방에서 살았던 숙신은 ‘싸리나무에 돌화살촉을 붙인 화살(호시)을 천하의 보물로 여겼다’는 기록(<성호사설>)이 남아있다. 공자와 관련된 일화도 전해진다.
“춘추시대 진나라 궁정에 날아온 매 한마리에 싸리나무에 돌촉을 단 화살이 꽂혀있었다. 길이가 1척 8촌이었다. 진나라 임금이 무슨 화살이냐고 묻자 공자는 ‘이 화살은 옛날 숙신씨가 쏘던 화살입니다’라 대답했다.”(<사기> ‘공자세가’)
공자는 이어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숙신이 호시 300대를 보냈다”고 부연설명했다. 거꾸로말하면 공자의 시대에는 이 숙신의 호시에 대해 공자만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석기는 귀신의 조화도, 약재도 아닌 ‘숙신의 유물’
그런데 추사는 이 유물들을 귀신의 조화니, 약재니 하는 허황된 해석이 아니라 옛 문헌자료를 철저히 검토한 끝에 ‘숙신의 유물’이라는 고고학적 해석을 내렸다. 추사는 청해토성에서 발굴한 석기를 주제로 256자에 달하는 장문의 시 ‘석노(돌화살)’를 남겼다.
“…산천의 도기에도 이 증빙이 다 없는데(山川圖記摠無徵) 전설을 또 받아들여 숙신씨라 일컫네.(又沿稱之肅愼氏)…공자의 시대에도 이것은 없었으니(孔子之世亦無之) 이 도끼 이 화살촉이 꼭 숙신의 유물이라면(此斧此鏃斷爲肅愼物)…동이족이 대궁에 능하단 게 상상되네.(更想東夷能大弓)…”(<완당전집>)
추사는 중국 후한 시대의 자전인 <설문해자>에 등장하는 “동이의 이(夷)자는 큰(大) 활(弓)에 능한 종족이라는 뜻”까지 참고해서 ‘석기=숙신 유물’로 비정했다. 조선시대 고고학자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추사의 ‘석노가’. 추사는 북청 유배시절 청해토성에서 수습한 석기를 숙신의 유물이라고 비정했다. 북한학자 도유호는 추사를 두고 ‘최초의 고고학자’라고 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레전드 발견
추사의 고고학자, 금석학자의 명성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1816년(순조 16년) 7월 어느날 만 30살을 넘긴 추사는 동네 친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오른다. 그 때까지 조선조의 개국을 도운 무학대사 혹은 신라말 고승인 도선이 세운 것으로 구전된 비석을 답사하기 위함이었다.
추사는 비석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얼핏보아서는 두껍게 낀 이끼 때문에 글자가 없는 몰자비(沒字碑) 같았다. 그런데 손으로 문지르자 글자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자가 뭉개지고 이지러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끼 낀 비면을 비추어보자 이끼가 글자를 따라 들어가 있었다. 파임 획이 끊어지고, 삐침 획이 뭉개진 것을 어렴풋 알아볼 수 있었다.
종이를 대고 탁본을 떠서 살펴본 추사는 놀라운 글자를 읽어낸다.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자가 분명했다.
진흥왕의 옛 비석이 틀림 없었다. 추사는 이때의 감격을 가감없이 전한다.
“1200년 전의 흔적이 하루아침에 밝혀지니 무학비(無學碑)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은 이렇게 세상에 도움을 준다.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완당전집> 1권)
탁본을 떠서 돌아온 추사는 지인들과 함께 탁본 판독에 매진했다. 특히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탁본과 비교한 결과 이 비석이 다름아닌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1행 진흥태왕 아래 두 글자를 처음에는 구년(九年)으로 보았는데, ‘구 년’이 아니라 ‘순수(巡狩)’ 였다. 아래 신(臣)자로 보인 것은 관(管)이었고, 그 밑의 희미한 글자는 경(境)자이니, 전부 합하면 진흥태왕순수관경(進興太王巡狩管境)이었다.”
이듬해인 1817년(순조 17년) 6월8일 추사는 지인 조인영(1782~1850)과 함께 다시 비봉에 올랐다,
이때 마모된 68자를 더 찾아냈는데,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한 글자는 총 92자에 달했다. 진흥왕과 순수, 그리고 남천(南川·진흥왕이 한강유역 경영한 뒤인 568년 세운 남천주. 지금의 경기 이천) 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글자였다.

일제강점기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서있던 진흥왕 순수비. 추사 김정희가 1816~17년 사이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졌던 이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임을 최초로 밝혀냈다.

 

■역대급 논문까지 남겨놓은 추사
추사는 감격에 겨워 비석 측면에 이렇게 새겨놓았다.
“이는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다.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김경연 읽었다.(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 讀)”
“정축년(1817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상정했다.(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고고학자,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가 찾아낸 획기적인 발굴성과였다. 추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북한산 순수비의 한 글자 한 글자를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사기>, <문헌비고> 등 역사기록들을 비교 검토해서 7000자가 넘는 논문(‘진흥2비고·進興二碑攷’)을 썼다. 요즘으로 치면 ‘발굴조사보고서’라 할 수 있다.(<완당선생문집>)
논문을 보면 이처럼 완벽하고 치밀한 고고학, 미술사학, 역사학, 금석학 논문이 있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추사의 이 이 역대급 논문을 읽으면 웬만한 요즘의 발굴보고서나 논문이 족탈불급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사는 ‘발굴의 신’이었다
조선판 인디아나 존스의 면모는 1817년 4월 하순~5월 초순의 경주 답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미 9개월전인 1816년 7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추사가 아니던가. 새로운 자료 발굴에 의욕이 넘쳤을 것이다. 부친(김노경·1766~1840)이 경상도 관찰사(1816년 11월~1818년 12월)였던 때여서 답사지로는 제격이었다. 게다가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는 도처가 유물밭이 아닌가.
먼저 전해(1816년) 찾아낸 북한산 순수비의 주인공인 진흥왕의 무덤을 찾았다. 추사는 “사람들은 태종무열왕릉 위에 조성된 4대릉을 그냥 인공산이라 하지만…내가 보기에는 진흥·진지·문성·헌안왕 등 네 임금의 무덤”이라 추정했다.

북한산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내고 기쁜 마음에 새겨넣은 추사의 글씨.

추사는 분황사터에 방치된 ‘화정국사비’의 빗돌받침도 찾아냈다. 그런가하면 이미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에 의해 발견되었던 무장사 비석의 다른 한 조각을 풀섶에서 발견했다. 무장사는 경주 동북쪽 30리 암곡촌 북쪽에 있었는데, 추사는 이 궁벽한 산골까지 샅샅이 뒤져 결국 한 조각 남은 비석을 찾아낸 것이다. 추사는 “샅샅이 뒤진 끝에 풀 속에서 또 한조각을 발견하고는 너무 놀라고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이에 두 조각을 합치고 연결하여 절 뒤쪽의 행랑에 옮겨두어 비비람을 피하게 했다.”(<해동비고>)

 

■발견했다가 21년간 실전된 문무왕비를 찾는 여정
그러나 경주 답사에서 추사가 찾아낸 문무왕비처럼 극적이고 우여곡절을 겪은 유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문무왕비의 존재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비석의 존재는 1760년 7월~62년 6월 사이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년)의 글에 나와 있었다.
“예전에 계림에 있을 때 문무왕릉을 찾아갔으나 돌 한 조각 흔적도 없었다. 36년 뒤 주민이 밭을 갈다가 들에서 문득 고비를 얻으니 문무왕비였다. 대사(大舍) 한눌유가 쓴 것이다. 글자가 박락되어 혼란스러웠다.”(홍양호의 <이계집> ‘에신라문무왕릉비’)
이 기록에 따르면 홍양호는 경주부윤 시절(1760~62년) 문무왕릉을 찾았다가 어떤 유물의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다 36년이 지난 1796년 무렵 경주 주민이 밭을 갈다가 들판에서 문무왕비의 일부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때 홍양호는 문무왕비의 탁본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지식인들도 이때 발견된 문무왕비의 탁본을 보았다. 유득공(1748~1807)의 <고운당필기>는 이때 찾은 ‘문무왕비의 명문’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문무왕이 서거하자 동해구 큰 돌 위에 화장하고는 대왕석이라 불렀다. 지금 발견한 비명에 ‘…쌓은 섶을 가지고 장사 지낸 다음 뼈를 경진(鯨津·고래나루)에서 깨뜨렸다’라는 등의 글귀가 있었다. 분명 불에 태워서 물에 장사 지냈다는 말인데, 신라 군신들이 너무 불교에 미혹된 것이다.…”
결국 홍양호는 문무왕비의 발견 사실과 비문의 탁본을 전했고, 유득공은 당대 유포된 문무왕비의 명문 내용을 알렸을 뿐이다. 아마도 두 사람 다 문무왕비의 실물을 보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런 측면에서 홍양호나 유득공은 진정한 의미의 고고학자나 금석학자는 아니다.
1796년 무렵 경주 주민의 눈에 띄었던 문무왕비는 이후 또다시 20년 넘게 자취를 감추었다.

 

■집념의 발견, 문무왕비 상하단을 모두 찾아냈다
그것을 현장답사를 통해 찾아낸 이가 바로 추사 김정희다.(1817년)
추사는 먼저 낭산 남쪽 기슭 선덕왕릉 아래 사천왕사~전(傳) 신문왕릉 사이를 샅샅이 뒤졌다. 일단 사천왕사터에 있던 귀부를 찾아냈다. 귀부엔 비석은 사라지고 단지 홈만 파진 받침대만 있었다. 아마 이곳에 문무왕비가 꽂혀있었을 것이다. 추사는 주변을 뒤졌다. 이미 경작지로 변해 있었기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추사의 집념은 대단했다.
“백성의 밭 가까이에 돌무더기를 쌓여있는 것을 보고 문득 ‘아! 저기 한번 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람을 사서 돌무더기를 걷어내고 바닥까지 드러내어….”(김정희의 <해동비고> ‘문무왕비’) 
쌓인 돌무더기를 파내려 일당을 들여 인부까지 사서 ‘본격 발굴’ 한 것이다.
“바닥까지 드러내니 네모나고 평평한 돌 조각이 보였다, 흙을 씻어내니 글자를 새긴 흔적이었다. 꺼내보니 (20여년전에 경주 주민이 찾아낸) 비석의 하단이었다.”
탁본으로만 보았던 그 비석을 현장에서 찾아낸 ‘고고학자’로서의 추사였다.
추사는 찾아낸 비석 하단부을 사천왕사터에 있던 귀부에 꽂아보았다. 꼭 들어맞았다. 추사는 이때 “마음이 이상야릇했다(心異)”고 표현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추사 ‘고고학자’는 예서 멈추지 않았다. 비석 하단이 있다면 상단도 있을 것이 아닌가.
추사는 미친듯이 주변을 뒤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우거진 수풀 더미에 뒹굴고 있던 돌 하나를 찾았다. 과연 그것은 비석의 상단부였다. 두 조각을 합쳐보았다. 가운데가 약간 비었고, 윗 부분 일단도 비었다. 빈 쪽에 새겨진 결자(缺字)를 다시 살필 수 없어 매우 안타까웠다.”(‘문무왕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탁본, 추사는 북한산비를 고증하면서 황초령 순수비 탁본을 활용했다,

 

■명문해석도 ‘금강안 혹리수’로 했다
추사는 지금으로 치면 무령왕릉(1971년)이나 천마총(1973년), 혹은 백제 금동대향로(1993년)에 비견되는 획기적인 발굴 성과를 연달아 이룬 셈이다. 1816년 진흥왕순수비를 확인했고, 이듬해에는 20여년전 잃어버린 문무왕비의 하단부는 물론, 상단부까지 찾아냈으니 말이다.     
추사는 경주 답사에서 찾아낸 문무왕비의 명문을 판독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좀체 풀리지 않는 글자가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추사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지인들과 비문의 해석에 매달렸다.
“땅거미가 어스름하여 답답함을 풀 수 없었는데 형(누구인지 모름)으로부터 붉은 색 점을 찍어 교정한 문무왕지의 남은 글자 해석문을 받고 다시 정정해야겠습니다.…참으로 다행입니다. 문무왕비의 해석문을 다시 부쳐드립니다.”
서화감상을 하더라도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 즉 금강역사와 같은 매서운 눈과 세무관리와 같은 혹독한 손길로 했다는 ‘완벽주의자’의 풍모가 명문해석에도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1817년 4~5월 경주답사 때 무장사 터를 찾은 추사 김정희는 나뒹굴고 있던 깨진 비석을 찾아내고 환호성을 질렀다.

 

■사라진 문무왕비는 왜 시내에서 발견됐을까 
그러나 추사 김정희가 찾아낸 문무왕비는 또다시 그 자취를 감추었다가 140여 년 만인 1961년 경주 동부동 민가에서 재차 발견된다. 이때 발견된 것도 비석의 하단부였다. 상단부는 그로부터 다시 48년이 지난 2009년 역시 같은 동네인 동부동의 개인집 수돗가에서 검침원이 발견했다.
그렇다면 추사가 문무왕릉비가 있던 사천왕사 부근에서 찾아낸 비석이 왜 시내의 민가로 흘러 들어갔을까.
최근 울진 봉평리 신라비 발견 30주년을 맞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열린 ‘6세기 금석문과 신라사회’ 학술대회에서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추론이 발표됐다.
즉 1817년 사천왕사의 문무왕릉비 주변에서 발견한 비석의 상·하단을 시내(동부동 쪽)로 옮긴 이가 다름아닌 추사 김정희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일식 한국고대사회회장(연세대 교수)가 발표한 ‘한국고대금석문의 발견지와 건립지’ 논문인데, 매우 그럴듯한 논지를 펴고 있다.
“문무왕비문 상하단 2조각을 수습한 추사는 이것을 경주부 관아로 잘 옮겼을 것이다. 잘 보관해달라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의 기대와 달리 세월이 흐르면서 방치됐고, 관아건물이 퇴락하면서 가까운 민가로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다 시공을 뛰어넘어 1961년과 2009년 재발견되었을 것이다.”

 

■방치되는 꼴을 못본 추사의 신신당부
하일식 교수는 몇가지 근거를 댄다.
추사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야외에서 나뒹굴어 방치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예컨대 경주 답사 당시 암곡촌에 방치된 무장사 비석의 한 조각을 발견한 추사는 근처 풀속에 나뒹글고 있던 나머지 한 조각을 찾아냈다. 너무 놀라고 기뻐서 환호성을 지른 추사는 두 조각을 합친 무장사비석을 절 뒤쪽의 행랑에 고이 옮겨두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 ‘비바람을 피하게 하려고’ 였다.(<해동비고> ‘무장사비’)
이 뿐이 아니다. 
추사는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두동강에 나서 나뒹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1832년(순조 32년) 벗 권돈인(1783~1859)이 함경감사로 출사하자 “함흥에 가거들랑 제발 황초령비 좀 찾아보라”고 신신당부했다.
추사의 부탁을 받은 권돈인은 두동강 난 비석을 발견하고는 탁본을 보내왔다. 그러자 추사는 “어렵게 찾아낸 비석을 우거진 잡초 사이에 그대로 두면 절대 안된다”고 재차 당부한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대감께서 돌아오신 뒤에는 반드시 또 매몰되고 말 것입니다. 진흥왕의 위대한 공적이 담긴 한 조각 빗돌이 1000년이 넘었습니다. 비안개가 바뀌고 사라지듯 세월 속에 사라질 비석이 절대 아닙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비석의 뜻을 높이고 꾸미고 포장하는 일에 조금도 소홀해서는 안됩니다.”(<완당전집> ‘권돈인에게’)
그러면서 추사는 함경감사 권돈인에게 “지금 이 비석을 함경도 감영으로 가져와서 영원히 보전될 것”이라고 부탁했다.

1817년 추사는 문무왕비의 하단과 상단부를 모두 찾아냈다. 그러나 이후 비석은 실전되었다가 1961년과 2009년(사진) 경주 구 시가지 동부동 민가에서 잇달아 발견되었다. 하일식 연새대교수는 사천왕사 근처에서 발견된 비석 2조각을 조선시대 경주부 객사(지금의 동부동 일대)로 옮긴 이가 바로 추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문무왕비를 옮긴 이는 다름아닌 추사 김정희였다
이런 추사였기에 경주답사에서 애써 찾아낸 유물들을 그대로 현장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사가 경주답사에 나선 1817년 무렵의 경상감사는 다름아닌 추사의 부친(김노경)이었다. 답사중 돌무더기를 파헤쳐 문무왕비를 찾아낼 때도 인부들을 동원한 추사였다. 추사로서는 문무왕비가 세워져 있던 사천왕사 부근에서 4㎞ 정도 떨어진 경주부 객사로 비석 2개를 옮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무왕비석의 이동경로를 추적해온 하일식 교수는 “1961년과 2009년 문무왕비가 발견된 경주 시내 동부동은 바로 조선시대 경주부 객사에 인접한 동네”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사천왕사 부근에 흩어진 문무왕비 2조각을 경주부로 옮겨 객사 부근에 놓아둔 이가 바로 추사 김정희였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후기 사천왕사터 부근에서 발견된 문무왕비 조각들이 150년이 훌쩍 지난 1961년과 2009년 경주 구시가지 중심부에서 재발견된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추사야말로 발굴 및 조사와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 유물의 보전까지 끝까지 책임진 조선판 ‘인디아나 존스’라 이름붙일 수 있겠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하일식, ‘한국고대 금석문의 발견지와 건립지’, 울진봉평리신라비 발견 30주년 기념 ‘6세기 금석문과 신라 사회’ 학술대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한국고대사학회, 2018
박철상,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 너머북스, 2015
유홍준, <알기쉽게 갖추린 완당평전-김정희>, 학고재, 2006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