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던 대한제국 마지막 서구식 문관대례복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근대복식사 전공자인 이경미 한경대 교수(의류산업학과)는 10일 “1980년대부터 한국맞춤양복협회에 전시된 복식을 조사한 결과, 대한제국이 1906년 12월 칙령 개정 이후 제작한 문관대례복(국가의 의식 때 착용한 옷)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906년 12월12일 고종황제의 칙령 제75호 ‘문관대례복 제식’의 개정에 따라 제작된 대한제국 마지막 대례복. 이전에 비해 앞면의 금색표장이 사라졌지만 뒷면의 칼라와 어깨, 등, 호주머니, 소매 등에 무궁화를 장식했다.|한국맞춤양복협회 제공

대한제국은 국제외교무대에 진출하기 위해 1900년 4월 17일 서양식 문관대례복에 대한 규정을 처음 만들었다. 이후 1904∼1905년 칙령의 형태가 아닌 ‘정오(正誤)’의 형태로 한차례 수정령을 발표했고, 1906년에는 아예 칙령 제75호로 문관 대례복 제식을 개정했다.

이들 대례복 가운데 1900년 양식은 한국자수박물관(민철훈 대례복) 등 4곳에, 1904~5년 양식은 연세대박물관(윤치호 대례복) 등 3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1906년 양식은 이완용과 송병준의 사진과 도식으로만 파악했을뿐 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가 이번에 찾은 것이다.
발굴경위도 흥미롭다. 맞춤양복협회 회원(이정근씨)이 이경미 교수의 ‘개화기 복식’ 관련 방송대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협회에 전시 중인 유물과 비슷한 사진이 나오자 혹시 하는 마음에서 제보하면서 ‘실물’이 확인됐다. 이정근 씨는 “이 대례복은 1989년 한국맞춤양복협회 회관을 건립할 때 1000만원을 들여 구입

대례복 뒷면의 무궁화 문양 |한국맞춤양복협회 제공

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협회에서는 어떤 유물인지 모른채 회의실 한편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서구식 문관대례복은 관리 등급에 따라 친임관(황제가 직접 임명장을 주는 최고고등관), 칙임관(정1~종2품의 최고관리), 주임관(3~6품 관리) 등의 복식으로 나뉜다. 이번에 발굴된 대례복은 칙임관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경미 교수는 “1906년에는 전면에 무궁화 금색 표장이 생략돼 디자인이 간소화했는데, 일본에서 작위를 받은 사람의 대례복과 전반적으로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출간된 <제복의 탄생>(2012년 민속원 펴냄)에서 1906년 대례복 개정이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식민지화가 용이하도록 한 의도가 대례복 개정에 개입된 게 아니냐”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교수는 “서구식 대례복에는 영국 참나무, 일본 오동나무처럼 나라를 대표하는 문양이 들어갔는데,

이완용과 송병준의 1906년 대례복 착용 사진.|민속원 제공

대한제국은 무궁화를 사용했다”고 강조했다. 발굴된 대례복에도 등의 위아래와 양쪽 호주머니, 소매와 칼라에 무궁화로 장식했다.
이교수는 “대한제국 문관대례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무궁화 문장”이라면서 “일제강점기가 되면 대례복의 형태는 같지만 문장만 무궁화에서 오동나무로 바뀐다”고 밝혔다.

비록 복장은 차츰 작위를 받은 일본식 대례복과 같은 형태지만 무궁화 문장만은 1900년(광무 4년)의 규정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이경미 교수는 “대한제국 문관대례복에서 중요한 것은 무궁화 문장”이라며 “일제강점기가 되면 동일한 형태에 문장만 오동으로 변경된다”고 강조했다. 이교수는 “누가 입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1906년 칙령 개정 이후 만든 대한제국 문관대례복 가운데 유일하다는 점에서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