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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7년 세종대왕이 관측한 그 별…579년후 알고보니 신성폭발이었다 2022년 6월 21일은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성공적으로 우주궤도에 안착한 날이죠. 이제 자력으로 1t 이상의 실용위성을 지구 상공 700㎞ 저궤도에 올릴 수 있는 7번째 국가(러시아·미국·유럽·중국·일본·인도)가 되었는데요.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주에 갈 수 있는 우주독립을 실현했다 할까요. 벌써 2030년이면 우리 손으로 만든 발사체와 탐사선을 달에 보내고, 나아가서는 화성까지 탐사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답니다. ■“우주로 나가라”는 홍대용의 설파 명색이 ‘히스토리텔러’인 저는 몇몇 칼럼에 주목했어요. 과거 천문·우주를 향한 가없는 호기심과 관심을 쏟았던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은 원래 우리 조상들은 세계최고의 ..
“50억원 유혹도 ‘만장일치’로 뿌리쳤다”…겸재 정선 화첩의 ‘선한 귀환’ “뭔가를 주려면 기꺼이 줘야 합니다.” 2005년 10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에레미아스 슈뢰더 아빠스(원장)가 (21점)을 기증하며 언급한 담화문 중 한 구절입니다. 슈뢰더 원장의 담화문을 더 볼까요. “우리는 한국인과 한국 역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겸재 정선 화첩’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12명으로 이뤄진 수도원 장로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반환결정은 올바른 것이며,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은 1911년과 1925년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1780~1956) 신부가 가져간 그림첩이었습니다. 화첩은 ‘금강내산전도’와 ‘만폭동도’, ‘구룡폭도’ 등 금강산 그림 3폭과,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가 함흥의 고향집에 심었다는 소나무를 그린 ‘함흥본궁송도’ 등 18폭이 담..
세종대왕이 18왕자를 2열횡대로 세웠다…숨어있던 19남 나타났다 얼마전 ‘인종대왕 태실’과, ‘장조(사도세자)·순조·헌종 태봉도’(3점)가 보물로 지정예고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왕실의 태를 묻은 태실(인종태실)과, 태실의 위치도를 그린 태봉도 3점(장조·순조·헌종)의 문화유산 가치를 평가한 건데요. 태는 태아를 싸고 있는 조직입니다. 산모가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태반과 탯줄’을 가리킵니다. 궁금증이 생기죠. 아무리 왕실 자녀의 태라지만, 어떤 의미가 있기에 국가지정문화재로 대접해준단 말입니까. ■“탯줄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 1570년(선조 3) 2월1일 을 볼까요. “태실을 조성하는 풍습은 신라와 고려 사이에 생겼는데, 예부터 중국에는 없었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595~673)의 태를 높은 산(충북 진천)에 묻었는데, 지금(..
‘경복궁에 포탄 6발 터졌다’…유물 2만점 미국·부산으로 피란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25일이었습니다. 북한군의 공세에 낙동강까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국립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에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1914~2001)이 찾아옵니다. “경주 분관 소장 유물을 소개(疏開·분산 이동)하라는 대통령의 긴급 지령으로 왔습니다.” 북한군이 이미 국립박물관 서울본관은 물론 개성·부여·공주분관까지 접수했거든요. 남은 곳은 경주 분관 뿐이었습니다. 박물관측은 즉시 유물선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으로 피란간 국보급 유물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비롯한 금관총 출토품(1921년) 등 국보급 유물 총 139점이 낙점되었습니다. 선택된 유물들은 대구 한국운행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대구에는 한국은행 소장 금괴(금 1.07t)가 역시..
사찰의 정원석에서 '신라국 김공순' 글자가…"'명필' 김생의 글씨였다" “우리 절에 정원석이 서있는데 거기서 글자가 보입니다. 한번 봐주시면….” 지난 5월20일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는 지인(김은하 전 선덕여중 교사)을 통해 경주 남산사 선오 스님의 전화를 받았다. “사찰 정원석에서 ‘김(金)’ 등의 글씨가 보이는데, 이것이 어떤 명문 비석인지, 어느 시대 것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발품 파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박교수는 마침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전화를 받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일단 선오 스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18년 전 쯤 절의 조경을 위해 나무를 심으려고 땅을 팠을 때 한 2m 밑에서 나온 돌을 정원석으로 썼다”는 것이었다. “근자에 어느 불자님이 천리향이라는 나무를 심으려고 이 정원석을 비켜놓았는데, 그 돌에 ‘김(金)’을 ..
“저기 반짝거리는 물체가…” 두 인부가 찾아낸 0.05mm 금박 화조도 며칠전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가로 3.6㎝, 세로 1.17㎝, 두께 0.04㎜의 금판에 0.05㎜ 이하 선으로 한 쌍의 새(쌍조)와 꽃(團華·둥근 꽃무늬)을 조밀하게 새긴 이른바 ‘금박 화조도’의 출현을 알렸죠. 기사의 일보는 이미 보도되었으니까요. 저는 이 극초정밀 유물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동궁과 월지’가 어떤 유적인지 그 기막힌 스토리를 ‘발굴’해보고자 합니다. ■심상치않은 인부들의 눈썰미 2016년 11월이었습니다. ‘동궁과 월지’와 접한 동쪽지역을 발굴중이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조사를 마무리할 작정이었습니다. 유적과 인접해서 일제강점기에 부설된 동해남부선의 철로(폐선)가 지나고 있는데요. 그 철로 옆에 조성된 배수로에..
‘광화문 현판’에 웬 색깔 논쟁?…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사연 1997년 11월11일, 경복궁 내 경회루 연못을 준설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이 흥미로운 유물 하나를 건져냈습니다. 큰 돌에 눌린채 직사각형 돌판 위에 놓여있던 청동용이었는데요. 몸과 머리가 분리됐고, 발도 일부 절단된 상태여서 그리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청동용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는데요. 혀를 쑥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해학적인 형상의 청동용(龍)이었답니다. 조사단은 무릎을 쳤습니다. ■경회루 연못에서 혀를 내민 청동용이 조선 후기 유학자인 정학순(1805~1890)이 경회루의 건축원리를 기록한 (1865년 제작)를 떠올린 건데요. 즉 는 “경회루 연못의 북쪽(감방·坎方·물의 방향)에 (불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물의 신인 청동용(銅龍) 두마리를 잠겨넣었다”..
도굴꾼은 상상도 못했다…목관 밑 '보물상자'에 담긴 2100년전의 삶 “다호리 일대의 도굴이 말도 못합니다. 심각합니다.” 1988년 1월 국립진주박물관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심상치않은 제보 한 건을 올린다. 급보를 받고 달려간 이는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전 문화재청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다. 과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현장이었다. 도굴꾼의 탐침봉 흔적이 사방팔방에서 확인됐다. 봉분이나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도 아닌 논밭이었는데도 그랬다. 실제 도굴이 자행된 구덩이가 논밭 일대에서만 40~50곳이나 보였다. 구릉 위까지 범위를 넓히면 100곳에 넘을 것으로 판단됐다. 한 곳 한 곳 확인해가던 조사단의 눈에 밟히는 도굴 구덩이가 있었다. 마을을 지나는 도로 남쪽에 붙어있는 논이었다. ■도굴범은 상상도 못했던… 깊이 1m 남짓한 구덩이에 도굴꾼이 채워놓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