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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삼전도비문' 누가 썼나…"오랑캐 아부" 비난 너무 억울 지난 1월 30일 저는 매우 유서깊은 곳을 다녀왔는데요. 아주 좋은 곳은 아니구요. 바로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현장의 유물 중 하나인 삼전도비를 다녀왔습니다. 다녀오고 나니까 1월 30일이더라구요. 그 날이 1637년 1월30일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사건이 있던 날이잖아요. 물론 당시엔 음력이었으니까 양력으로 따지면 1637년 2월24일로 환산되더군요.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음력 1월30일로 기억되니까 뭐 겸사겸사해서 답사한거라구 저는 생각했습니다. ■수난당한 삼전도비 비문을 보면 맨 윗부분에 ‘대청황제공덕비’라는 글자가 보이는데요. 비석 앞뒷면에 만주어와 몽골어, 한자어 등으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과정과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는 데요. 세부 글자는 잘 보이지 않더군요. 비석 옆에는 다소..
'비운의 인종'이 ‘절친’ 신하에 그려준 ‘묵죽도’ 목판엔 어떤 뜻이…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 조화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 비운의 왕 인종(1515~1545·재위 1544~1545)이 절친이자 스승인 신하에게 ‘정표’로 내린 ‘묵죽도’ 목판이 도난 15년만에 회수됐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서울 경찰청 지능수사대는 공조수사를 통해 2006년 2월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모셨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서원)으로 등재된 필암서원(전남 장성)에서 도난된 ‘하서 유묵 묵죽도판’(전남 유형문화재 216호) 3점을 회수했다고 1일 밝혔다. ■도난문화재 34점 회수 사범단속반은 이 과정에서 1980년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창 선운사 소장 ‘석씨원류’ 1점(전북 유형문화재 14호)과 2008년 도난된 충북 보은 선병국 가옥(국가민속문..
정조는 백발백중의 활쏘기 명수였다…워커홀릭의 반전매력 “한 발은 쏘지 않는게 군자의 도리니라.”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왕실의 군사적 노력과 군사의례를 소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3월1일까지 열린다는데요. 저도 다녀왔습니다. 흔히 조선을 ‘문치의 나라’여서 ‘문약’에 빠졌다고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조선은 무치도 겸했다, 뭐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특별전이라는데요. ■신궁의 솜씨를 자랑한 정조 전 전시품 중 특히 눈에 띄는 유물 한 점을 소개하려 합니다. ‘고풍(古風)’이라는 유물인데요.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가 1792년(정조 16년) 12월 16일 활쏘기를 한 뒤 그 기념으로 함께 참가한 검교제학 오재순(1727~1792)에게 상을 내린 공식문서입니다. 그런데 고풍을 보면 정조의 활쏘기 성적이 나와있는데요. 점수가..
"해치는 '서울의 상징' 자격없다"…"물짐승 아닌 하마비일뿐" ‘아니 해치가 언제부터, 왜 서울의 상징이 되었을까. 그리고 원래 해태가 아니었나.’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보이는 ‘해치 캐릭터’를 보고 늘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게 바로 ‘서울의 상징동물이 해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추진 중인 광화문 역사광장 조성계획에 ‘광화문 앞 월대와 해치상의 제자리 찾기’ 사업이 포함되어 지난해 11월부터 본격 공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가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게 됐다. 광화문 앞 양옆에 서있는 해치상. 1870년(고종 4년) 10월 9일자를 보면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했으며,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복궁 중건 때 해치상을 세움으로써 대궐의 안팎을 구별했고, 이곳에 이르러..
조미조약 1조가 뭔데…배신과 조롱으로 끝난 고종의 미국 짝사랑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조약에 서명한 이들은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1822~1895)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한 국가간 수교협정이었습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통상조약문. 제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조미수호통상 조약 1조 도장은 신헌에 찍었지만 조약의 교섭권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체결된 조미수호통상 조약의 제1조 또한 흥..
청와대터는 임금 측근들의 충성서약을 받은 회맹터였다 ‘회맹(會盟)의식’이 있었다.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의 산물이었다.천자국인 주나라가 힘을 잃은 뒤부터 시작됐다. 강대한 제후국 군주는 이름 뿐인 주나라왕을 대신하여 천하를 주물렀다. ‘회(會)’는 일정한 의제와 장소, 시간을 정해 다른 제후국 군주들이 모이는 것을 이른다. ‘맹(盟)’은 회맹에 참여한 제후들이 차례로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말한다. 이를 ‘삽혈(삽血)’이라 한다. 국보로 승격되는 ‘보물 제1513호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숙종 때까지 20여차례에 걸쳐 공신이 된 인물들의 후손이 모여 충성서약을 맺은 결과물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입술에 피 바르는 의식회맹을 주도한 제후가 가장 먼저 삽혈했다. 이 제후는 다른 제후들에 의해 패자(覇者)로 추대됐..
불에 타 그을린 임금 초상화는 왜 보물 문화재 되었나 지난해 8월 아주 특이한 문화재 4점이 국가등록문화재 제792호로 등록되었습니다. 조선 임금 4명의 초상화, 즉 어진이었는데요. 등록문화재란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건설·제작·형성된 이른바 근대문화유산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조선 임금의 초상화가 근대유산이라는 것도 그렇고, 또 그렇게 등록문화재가 된 4점의 임금 초상화를 보면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는 것도 그랬습니다. 예를 들자면 태조의 어진은 매서운 눈과 귀만 보이고, 원종(인조의 아버지·추존왕)은 왼쪽 뺨과 귀 부분이 없어졌으며, 순조는 귀밑머리와 귀만 보이고, 순종은 왼쪽 뺨과 코, 눈이 싹 다 날아가습니다. 뭐 이렇게 불에 타버린 어진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문화재로 대접해주었을까요. 1954년 한국전쟁 직후 부..
최치원 초상화 속 '숨은그림'…두 동자승은 누가 왜 지워졌을까 예전엔 마산이었지만 지금은 경남 창원시 합포구로 행정지명이 바뀐 ‘월영대’를 얼마 전에 찾았다. 그곳에는 통일신라말 대문장가인 최치원(857~?)이 ‘월영대’라는 친필 글씨를 대자로 새긴 것으로 유명한 2m가 넘는 각석이 우뚝 서있다. 최치원이 가야산에 입산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머물러 ‘노닐며’ 대를 쌓아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서깊은 곳이다. 최치원의 초상화인 ‘운암영당고운선생 진영’(경남 유형문화재 187호). 의자에 앉아 화면 왼쪽을 응시하고 있는 전신상의 최치원을 그렸다. 2009년 국립진주박물관의 X선 촬영결과 이 영정의 제작시기·장소를 알리는 화기(畵記)와 함께 두 동자승의 모습이 나타났다. |최현욱·곽홍인·신용비의 논문에서■고려·조선문인의 순례성지 ‘아득히 푸른 물결 위에 우뚝 솟은 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