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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를 종로거리에 걸라"…세종대왕이 천기를 누설한 이유 “때를 아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밤에는 자격루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려워…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해에 비쳐 각(刻)과 분(分)이 환하고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1434년(세종 16년) 10월2일 기록이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즉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시내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라 할 수 있다.국외소..
일본 장관의 경천사 탑 강탈사건을 폭로한 두 외국인은 누구? 1900년대 초까지 개성에서 약 20㎞ 떨어진 풍덕군 부소산 기슭에 있는 절터에는 특이한 탑 한 기가 서있었습니다. 아(亞)자형 3단 기단을 빼면 10층이어서 경천사 10층 석탑이란 이름이 붙었고, 높이가 13m나 되는 대형탑이었습니다. 옥개석 밑에 새겨진 명문(발원문) 등에 이 탑의 조성자는 1348년(충목왕 4년)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강융(?~1349)과 고용보(?~1362) 그리고 원나라 승상 탈탈(1314~1355) 등입니다. 이들은 고려왕실이 아니라 순전히 원나라 황제(혜종·재위 1330~1370)와 황후(당시 고려 출신인 기씨), 황태자 등의 만수무강을 빌기위해 이 탑을 조성했습니다.오른쪽 사진은 1902년 무렵의 경천사탑 10층석탑. 왼쪽 사진은 겅천사탑 강탈사건을 특종보도한 190..
'돌담장으로 폐쇄한 성문'…통곡하며 헐어야 했던 강화성의 흔적 13세기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몽골군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물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부족을 통합한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이 ‘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처한다’(제4조), ‘물에 손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제14조)는 법을 제정했을 정도였다. 물이 부족한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부족이었기에 당연했다.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도읍을 옮긴 고려가 쌓은 강화 중성의 흔적. 몽골의 압력으로 성을 폐쇄한 뒤 돌담장으로 메워버린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 면에서 고려조정이 몽골군이 침입하자(1231년) 강화섬으로 피란처를 삼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고 할 수 있다(1232년). 고려는 강화섬에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 격인 중..
세계 제패 몽골군은 왜 강화도를 무서워했을까 “비록 작은 나라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있어 군사를 동원한지 20여 년이 되었는 데도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려 태자가 조회했으니 후히 대접하소서. 일단 돌아가면 오지 않을 것이니….” 1259년(고종 46년)이었다. 몽골 조정의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세조)에게 고한다. “제발로 찾아온 고려 태자를 홀대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상황일까. 와 등 고려 측 사료와, 등 몽골측 사료를 통해보자. 펄갯벌로 이뤄진 강화도 갯벌.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과 함께 허리춤까지 빠지는 갯벌 때문에 몽골군은 상륙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 ■쿠빌라이의 반색 고려는 1231년부터 만 28년 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에 지쳐 있었다. 고려는 결국 늙고 병든 왕(고종)을 대신해 태자인 전(원종..
15살 소녀를 묻은 잔인한 순장제도…신라와 가야의 운명 갈랐다 얼마전 경남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의 교동 2지역에서 도굴 없이 노출된 63호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를 온몸에 치장한 무덤 주인공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요. 발굴단에서는 무덤 주인공의 몸쪽에 놓인 장신구의 출토상황과, 은장도 및 굵은 귀고리 등 주로 여성 무덤에서 보이는 유물 등으로 신장과 성별을 추정한 결과 1500년 전에 죽은 신장 155㎝ 가량의 여성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했습니다. 2006년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된 인골(왼쪽 사진)을 과학적으로 복원한 얼굴(오른쪽 사진). 첨단과학으로 복원한 결과 이 인골의 주인공이 16세, 키 152.3㎝, 허리 21.5인치의 여성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16살 소녀 ..
이미 131년전 한글 모음(ㅏㅗ ㅣ ㅜ)을 미국언론에 소개한 외국인 한글학자 “(한자 대신) 한글로 쓰면 선비와 백성, 남자와 여자 누구나 널리 보고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한글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어째 글 내용이 심상치 않다. 꼭 훈민정음 서문의 느낌이 난다. 다음 내용을 보면 더욱 알쏭달쏭해진다.“이런 이유로 필자가 비록 조선말과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어리석은 외국인이지만 부끄러움을 잊고 특별히 한글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풍속을 대강 기록하려 한다.”호머 헐버트는 1889년 에 ‘한국어(Korean language)’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한글에 매료된 헐버트는 “한글의 모음은 하나 빼고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면서 기고문에 직접 ‘ㅏ ㅗ ㅣ ㅜ’를 그려 표현했다.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한글을 자모까..
이토 히로부미의 16번째 죄악…고려청자 '싹 다!'로 조선을 도굴천지로 만든 죄 며칠 전 입맛이 개운치 않은 소식이 하나 떴더라구요.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 본점)에 머릿돌(정초석)이 있는데요. 눈썰미가 있는 분들이라면 본 기억이 나시죠. 그런데 이 머릿돌 글씨가 초대 한국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친필로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지 111주년이 되던 날이었는데요.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에게 상납한 고려자기 중 97점이 1965년 한·일 협정 체결에 따라 반환됐다. 그중 ‘청자 구룡형 주전자’는 보물(제42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알려지지 않은 이토의 죄악그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의 흔적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었던 것도, 그 머릿돌 글씨가 다름아닌 이토였다는 사실을 몰..
러시아공사관 독립문 설계한 러시아 청년…을미사변 새벽에 무엇을 목격했나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1860~1921)이라는 긴 이름의 러시아 건축가가 있다. 한국명으로는 살파정, 살파진, 혹은 살파령으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1860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몰락한 지주가문에서 태어나 1883년(고종 20년) 23살의 나이에 우연한 기회에 조선땅을 밟았다. 그런데 이름을 거론하긴 했지만 사바틴은 개화기 이후 조선을 드나들었던 다른 유력 서양인에 비해 대중적으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사바틴은 한국 건축사에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인물이다.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몇 안되는 목격자인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시해장소 지도. 고종에 의해 시위대 부대장으로 임명된 사바틴은 1895년 10월8일 새벽 경복궁에서 숙직하다가 천인공노할 시해사건을 목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