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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속 '사랑' 단어, 90년간 4만3000번이나 사용됐다…국립한글박물관 특별전 집계 노랫말에서 사용된 단어중 최고는 역시 ‘사랑’이었다. 그 다음을 ‘말’과 ‘사람’, ‘눈물’, ‘때’가 이었다.국립한글박물관은 15일부터 10월18일까지 기획특별전()을 열면서 1920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된 노래 2만6000여곡을 대상으로 노랫말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빈도를 조사한 결과 ‘사랑’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목포의 눈물’ 가사지. 가사 중 ‘삼백연 원안풍’의 원래 가사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었다. 300년전 무렵이면 임진왜란(1592~1598년)이 연상된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가사를 바꿨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박물관측이 대중가요 노랫말의 발자취와 노랫말에 담긴 우리말과 글의 묘미를 소개하는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한성우 인하대교수에게 조사를 의뢰해 1920~2010년..
'문체반정' 신호탄 쏜 정조의 책가도가 민간에 유행한 사연…호림박물관 특별전 “경들은 보이는가”(정조), “예, 보입니다”(신료들). 1791년(정조 15년)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재위 1776~1800)는 군왕의 상징그림인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책가도(冊架圖·책거리)’ 병풍을 내건 뒤 신료들에게 “이 그림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정조는 신료들이 “보인다”고 하자 ‘놀리듯’ “경들은 진짜 책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그림”이라고 하며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책가도’ 병풍을 내건 이유를 밝힌다.‘책가도’. ‘책가도’는 서가(書架)와 같은 가구를 중심으로 책은 물론 각종 고동기물(古銅器物)이나 문방구, 화훼 등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는 군주의 상징인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오로지 책만 잔뜩 쌓아놓은 ‘책가도’ 병풍을 내걸었다. 문체반정의 신호탄으..
"오장을 칼로 쪼개는 아픔"…전염병의 참상에 맞선 조선의 분투 “아, 슬프다. 너는 지금 나를 버려두고 돌아갔는가. 오장(五臟)을 칼로 쪼개는 것만 같구나…”. 1625년(인조 3년) 3월 조선의 예학자 정경세(1563~1633)가 두창(천연두)으로 죽은 맏아들 정심(1597~1625)을 기리며 쓴 제문의 첫머리다. 정심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경세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아들이었다. 26살인 1623년 가을부터 1년간 향시와 소과, 대과 등 모두 10차례 시험에서 연속으로 급제한 인재였다. 1774년(영조 50년) 현직관리를 대상으로 실시한 특별시험(등준시·登俊試)의 무과 합격자 18인을 기념하여 제작한 초상화첩(). 이중 김상옥 등 세 사람의 초상화에서 두창(천연두) 흉터가 확인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대과급제후 1년도 안된 1625년(인조 3년) 사람됨이 단아하..
원본은 아니지만 짝퉁도 아닌 '이항복 공신 증명서'…후손들이 모신 까닭 ‘공신교서는 틀림없는데…’. 지난해 11월 경주이씨 백사공파 종가가 기증한 백사 이항복 관련 유물을 검토하던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자들은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에 특히 시선이 머물렀다.‘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백사 이항복이 호성공신 작위를 받은다음 하사받은 초상화다. 후대에 옮겨그린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호성공신 교서가 무엇인가.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정난공신 5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호성공신교서’는 임진왜란 중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발부한 증명서다. 이항복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모..
고려 금속활자, 구텐베르크에 뒤처진 5가지 이유…발명 했지만 혁명 없었다 ‘구텐베르크보다 빠르다고 하지만…’. 필자는 얼마전 (1377년 간행)보다 138년 빠른(1239년) 금속활자본(보물 제758-2호 공인박물관 소장 )이 국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연구성과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구텐베르크가 이룬 것 같은 혁명은 없었다’는 독자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발명은 있었지만 혁명은 없었다’는 뼈아픈 지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고려·조선은 왜 애써 금속활자를 만들어놓고 서양처럼 역사를 뒤바꾼 혁신을 이루지 못했을까. ‘갑인자’를 개발한지(1434년) 2년만에 간행한 . 구텐베르크는 그보다도 18년 늦은 1454년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를 발행했다. ■억지로 우겨 설립한 주자소굳이 이나 까지 들춰볼 필요도 없다. 구텐베르크(1400년 전후~1468년)..
'조선의 표준시' 자격루…484년만에 때빼고 광냈더니 중국 주나라에는 아주 특별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계인(鷄人)’이라는 관리였다( 춘관). ‘계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면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들에게 신중하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 ‘요전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때(時)’는 농사철의 시기를 가리킨다. 예부터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열전·역이기전’)고 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국보 제229호 자격루 오른쪽 수수호 표면에 새겨진 용문양을 펼쳐보인 모습.|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제공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고 사는 백성들에게 절기를 가르쳐주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
세종-문종을 닮으려 했던 고종-순종 …왕세자 집무실 계조당 복원 이야기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궁(순종)은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 1891년(고종 28년) 2월8일 고종은 경복궁 안에 계조당을 고쳐 지은 뜻을 밝혔다. “세종 계해년(1443년)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계조당을 세웠고, 문종이 곧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한마디로 고종은 세자인 순종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인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계조당을 고쳐 지은 것이다. ‘계조(繼照)’는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하여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따라서 ‘계조’은 왕위계승을 뜻한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바로 ‘슬기로운 왕위계승’을 위해 ..
자격루 434년만에 때빼고 광냈더니…용문양에 제작자 이름까지 중국 주나라에는 아주 특별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계인(鷄人)’이라는 관리였다( 춘관). ‘계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면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들에게 신중하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 ‘요전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때(時)’는 농사철의 시기를 가리킨다. 예부터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열전·역이기전’)고 했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고 사는 백성들에게 절기를 가르쳐주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시간을 사람이 일일이 알리다보니 번번이 착오가 생겼다. 농사철에 ‘때’를 잘못 일러주면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인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