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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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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코스프레'가 하고팠던 고종은···110년 만의 계조당 복원 이야기 “1443년(세종 25년) 5월12일 왕세자(문종)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집을 건춘문 안에 짓고, 이름을 계조당(繼照堂)’이라 했다.”()세종대왕 치세(재위 1418~1450)의 말년(1455~1450)에 왕세자(문종·재위 1450~1452년)가 임금 대신 정사를 맡았다. 이름하여 ‘대리청정’이다. ‘앉아있는 종합병원’이라 일컬을 정도로 각종 병마와 싸우면서 훈민정음 창제(1443년) 및 반포(1446년)에 몰두하기 위한 세종의 깊은 뜻이었다. 신하들이 지속적으로 세종의 대리청정 계획에 “아니되옵니다”라 반대했지만 그 뜻을 꺾지 못했다. 복원될 계조당. 계조당은 세종 연간에 왕세자(문종)의 대리청정 때 신하들을 조회하고 정사를 펼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그후 고종도 왕세자인 순종을 염두에 두고 ‘..
'신라는 내 동생'…한반도 남부에서 현현한 고구려비의 정체 중원 고구려비를 말할 때 절대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예성동호회’라는 향토연구회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 중요한 국보(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예성동호회는 고려 광종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기려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도 확인했다. 예성동호회는 1978년 당시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와 장준식 현 충청대 교수 등이 만들었다. ■ 예성동호회의 개가 향토답사회 모임이 찾아낸 중원고구려비문 독해내용. 고구려가 신라를 형제국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당시에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기와를 주우러 다녔고, 모임의 이름도 없었다. 그러나 답사팀은 어느 식당의 디딤돌에서 연꽃무늬를 ..
어보 잃어버린 매국노 아들의 한마디..."돈 안되는 어보 때문에 골프놀이 못해?" ‘W B. Tom’. 조선의 자주외교 의지를 실현하려고 고종(재위 1863~1907)의 지시로 만든 조선의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 뒷면에 새겨진 미국인 이름이다. 이 이름은 나라와 왕실의 상징이라는 국새에 찍힌 ‘수치의 낙인’이라 할 수 있다. 국권을 지키지 못한채 일제강점기에 전리품으로 일본 궁내청으로 ‘납치’되었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 와중에 어이없게 불법반출된 국새, 그 오욕의 역사가 바로 ‘W. B Tom’ 이름에 담겨있다. 그나마 이 ‘대군주보’ 국새를 구입하여 소장한 재미교포의 기증으로 상처 난 모습 그대로나마 환수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재미교포 이대수씨가 기증한 조선의 국새 ‘대군주보’. 미국인인 듯한 W B. Tom의 서명이 선명하다. 고종이 1882년 조..
왕조실록이 센가, 승정원일기가 최고인가…난형난제의 경쟁 (이 기사는 문화유산채널에서 다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비교 영상을 첨부하면서 다시 올린 것입니다.) “(영조)임금이 어용(御容·임금의 초상화) 2폭을 내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나의 40살 때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임금이 우의정(조현명) 및 예조판서(이종성)와 상의해서 어용의 봉안처를 정했다.”영조 20년(1744년) 8월20일 의 기사이다. 영조가 40살 때 제작한 자신의 초상화 2폭의 봉안처를 정했다는 다소 무미건조한 내용이다. 이번에는 같은 날짜 를 보자. 만 50살이 된 영조가 10년 전인 40살 때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가져와 신하들과 품평회를 열었다. “백낙천의 시에 ‘나이 많은 형이 어린 아우를 마주 대하듯 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이 맞습니다.”(조현명) “10년 사이에 이..
132년전의 '도자기 외교'…백자와 청자를 주고받은 프랑스 대통령과 고종 임금 백자 꽃병과 청자 대접…. 지금으로부터 132년 전 조선의 고종(재위 1863~1907)과 프랑스의 사디 카르디 대통령(재임 1876~1894년)이 한·프랑스 우호를 위해 주고받은 선물이 바로 백자 꽃병과 청자 대접이다. 양국 정상이 ‘도자기 외교’를 펼친 셈이다.1888년 프랑스 사디 카르노 대통령이 수교 2주년을 맞아 조선의 고종에게 선물한 백자꽃병. 입지름이 53.2㎝, 높이가 62.1㎝의 대형 도자기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1886년(고종 23년) 조선과 수교를 맺은 프랑스가 조선의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빅토르 콜랑 드 플랑시(1863~1922)를 초대 주조공사로 임명한 것이 계기가 됐다. 프랑스 등 유럽사회에서는 당시만 해도 중국 도자에 열광했지만 조선 도자에 대한 관심은 전무했다. 그러나 플랑..
정조의 친여동생 청연군주가 입은 명주저고리 복원됐다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를 아십니까.’ 정조(재위 1776~1800)는 비정한 아버지(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갇혀 비명횡사한 사도세자(1735~1762)와 동갑내기 부인인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아들이다. 그런 정조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 네 살 터울의 여동생이 둘 있었으니 청연군주(1754~1821)와 청선군주(1756~1802)이다.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도 42살이 되어 낳은 아들(사도세자)이 본 손자(정조)와 손녀(청연·청선군주)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정조의 여동생이자 사도세자의 딸인 청연군주가 입은 명주저고리. 국가민속문화재 53호이다.|세종대박물관 소장은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가 72살 때인 1765년(영조 41년) 4월 가뭄 끝에 내린 단..
짝퉁? 창조적 모방?…고구려풍 베낀 신라귀족 귀고리 포항서 발견 단순한 짝퉁인가, 아니면 창조적 모방인가. 5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고구려 기법을 모방한 금귀고리를 제작했고, 이 귀고리를 포항지역 귀족이 달았던 증거가 나왔다.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진입도로 구간을 조사중인 화랑문화재연구원은 최근 포항 흥해읍 대련리 유적에서 황금으로 만든 금제굵은고리귀고리(金製太環耳飾) 1쌍을 비롯하여 금제가는고리귀고리(金製細環耳飾) 2쌍, 은제팔찌 1쌍 등의 장신구류와 다수의 토기를 발굴했다고 밝혔다.포항 대련리에서 확인된 금제 귀고리. 고구려 기법을 모방한 신라산으로 추정된다.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확인된 7기의 무덤 중에서 6기는 모두 도굴되었다. 그러나 가장 규모가 크고. 귀고리 등이 확인된 4호 무덤은 무너진 천장 덮개돌이 부장 유물들을 덮고 있는 바람에 천만다행으로 도굴을 피했다..
"1500년전 마을별 세금 할당량"…경산 소월리 출토 목간의 정체 ‘감말곡 논 7결(?), 둑 위 1결, 구미곡 3결, 둑 아래 40부, 하지시곡 논 2결, 구리곡 ○부, 곡문미진 상급의 밭(上田)….’ 지난해 12월 초 경산 소월리 유적의 구덩이에서 수수께끼와 같은 유물들이 나왔다. 3면을 사람 얼굴 모양으로 뚫은 토기 항아리와 함께 의도적으로 바닥을 제거한 시루가 보였다. 시루와 사람 모양 항아리를 맞춰보니 꼭 들어 맞았다. 관심의 초점이 된 유물들이 더 나왔다. 바로 5~6면에 알쏭달쏭한 글씨를 잔뜩 새겨놓은 목간과 싸리나무 다발과 자귀로 추정되는 목제유물이었다. 목간은 다발 및 자귀 아래에서 나란히 늘어선 형태로 발견됐다.1차 판독과 달리 2차판독에서 E면 판독이 많이 바뀌었다. ‘답중삼결(畓中三結·논 중 3결)’이 ‘답십삼결(畓十三結·논 13결)’로, 판독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