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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고양이집사’ 숙종의 퍼스트캣 ‘김손’ 스토리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스스로 ‘집사’라 낮추고, 고양이를 ‘주인님’이라 한단다. 한없이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스스로를 주인과 동격이거나 아니면 자기 집을 관리하는 집사 취급한다고 해서 일컫는 말이다.
가히 ‘지금은 냥이의 전성시대’인 듯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키우는 고양이 ‘찡찡이’는 유기묘에서 일약 ‘퍼스트캣’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찡찡이’가 첫번째 퍼스트캣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340여년전 조선조 숙종(재위 1674~1720)에게 퍼스트캣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김손(金孫) 혹은 ‘김묘(金猫)’였다.

이하곤의 <두타초> ‘서궁묘사’에 등장하는 숙종과 김손 이야기. 숙종이 죽자 고양이 김손이 빈전을 우러러 통곡했으며 수십일간 곡기를 끊고는 결국 굶어죽었다는 내용이다.

 

■“수 틀리면 쿨하게 주인 곁을 떠나는 고양이” 성호사설의 고양이론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만물문’조에 ‘김묘(손)’ 이야기를 전한다.
 <성호사설>은 우선 중국 송나라 태종(재위 976~997)이 키운 도화견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당시 지방에서 공물로 바친 도화견이라는 개를 어탑(御榻·황제 임금의 의자)에서 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 태종이 병석에 눕자 그 도화견도 밥을 먹지 않았고, 태종이 죽을 때에는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면서 파리해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훗날 개가 죽자 송태종의 무덤인 희릉 곁에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당대 사대부들은 모두 도화견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성호사설>은 이 대목부터 숙종의 ‘퍼스트 캣’인 김묘(김손)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숙종대왕도 일찍이 김묘(金猫) 한마리를 길렀다.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고양이 역시 밥을 먹지 않고 죽으므로, 명릉(明陵) 곁에 묻어주었다.”
<성호사설>은 애완으로 키우기 힘든 고양이의 성정을 알기쉽게 설명한다. ‘고양이=주인님, 키우는 사람=집사’의 관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대저 ‘개와 말도 주인을 생각한다’는 말은 옛적부터 있다. 고양이의 성질이 매우 사납다. 여러 해를 길들여 친하게 만들었다 해도, 하루 아침만 제 비위에 틀리면 갑자기 주인도 아는 체하지 않고 가버린다.”
까칠한 성격으로 사람을 집사처럼 부리다가 수 틀리면 언제 보았냐는 듯 ‘쿨’하게 떠나버리는 고양이라는 것이다.

 

■숙종 승하 후 단식투쟁 끝에 죽은 ‘퍼스트 캣’ 김손이
그런데 숙종의 퍼스트캣인 김손(묘)은 기특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이다. 숙종 연간의 인물인 김시민(1681~1747)의 시문집(<동포집>)에는 숙종의 퍼스트캣인 김(묘)를 읊은 시(김묘가)가 나와 있다.
“궁중에 황금색 고양이 있었으니 임금께서 사랑하여 이름 내려주셨네. 김묘야 하고 부르면 곧 달려오니 사람 하는 말귀를 알아듣는 듯했네. 김묘만 가까이서 선왕 모시고 밥 먹었네.…차가운 밤에는 몸을 말고 용상 곁에서 잠들었네. 비빈들도 감히 고양이를 길들이지 못하는데…임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며 고양이만 사랑하셨네.”

김손(김묘) 이야기를 전한 김시민의 <동포집>

그런데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김묘의 행동이 달라졌다.
“고양이가 궁궐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른 것 알고 문에 들어서자마자 슬퍼하며 위축됐네…밥에 이미 마음 없거늘 고기인들 먹으랴. 금묘가 달려가 빈전을 향해 우러르며 통곡했네. 통곡소리 너무 서글퍼 차마 들을 수 없으니 보는 사람 사람마나 눈물 절로 떨구었네.”
김시민은 이어 “김묘는 이후 20일동안 곡만 하다가 결국 죽었는데, 피골이 상접하고 털이 다 거칠어져서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김묘는 결국 비단으로 머리 감싸주고 선왕(숙종)의 능과 지척인 길 옆에 묻어주었다.…인(仁)을 마음에 품고…죽음으로 주인에게 보답했다.”
김시민은 “충신이 털 난 짐승에게서 나왔는데, 모두 숙종 임금의 덕이 짐승에게 미친 덕분”이라며 “사람들은 이 고양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말세 사람들아. 이 고양이보고 부끄러운 줄 알거라. 은혜를 저버리면 곧 난신적자가 되느니….”
역시 동시대의 시문집인 이하곤(1677~1724)의 <두타초>에도 이 김손(김묘) 이야기가 나온다. 이하곤은 숙종이 사랑한 고양이를 궁인들은 김손(金孫)이라 불렀다고 했다.
“대행대왕(승하한 숙종을 지칭)이 고양이를 무척 아껴서 궁중에서 십수년간 길렀다. 궁인들은 고양이를 김손(金孫)이라 했다. 항상 머리는 늘어뜨려 숙여 엎드려 있다가 임금이 먹이를 던져주면 그제서야 먹었다. 숙종 임금이 승하하자 고양이가 돌연 곡을 하면서 뛰어다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궁인이 김손에게 고기와 생선을 주었는데도 먹지 않았다.
“결국 수십일이 지난 뒤 김손이는 굶어죽었다. 그러자 혜순대비(숙종의 3번째 계비인 인원왕후·1687~1757)가 명릉(숙종릉) 곁에 묻어주도록 지시했다.”(<두타초> ‘서궁묘사’)
이하곤은 이 김손(김묘)의 이야기를 쓰면서 김시민과 마찬가지로 “숙종의 인과 덕이 지극하여 금수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찬양했다. 이 김손에게는 또하나 출생의 비밀이 전해진다.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이 궁중에서 굶어죽게된 고양이를 발견해서 먹이를 주어 살려냈는데, 이 살아난 고양이가 김손의 어미인 김덕(金德)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김손은 어미 김덕의 은혜를 갚은 고양이였던 것이다.

김손(김묘) 이야기를 전한 이익의 <성호사설>. 이익은 송나타 태종의 애묘인 도화견의 고사를 전하면서 “고양이는 아무리 잘 길들여놔도 수 틀리면 돌아보지도 않고 주인을 버린다”고 고양이의 도도하고 까칠한 성정을 제대로 표현했다.   

숙종은 바로 김손의 어미인 김덕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매사묘·埋死猫’)를 지었다.
그러고보면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숙종의 제1계비), 인원왕후 김씨(제2계비)의 무덤이 있는 명릉(서오릉 중 하나)에는 무덤 하나가 더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원왕후가 숙종의 퍼스트캣인 금묘를 명릉 곁에 묻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를 김묘원이나 김손원이라 일컬어도 좋을 듯 싶다.

 

■성종의 원숭이, 연산군의 개…. 궁궐의 애완동물 
궁궐에서 애완동물을 키웠다는 기록은 각종 문헌에 심심찮게 보인다.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재위 1469~1494)의 동물사랑은 유별났다. 콩 400석에 해당되는 흑마포 60필 가격으로 낙타를 수입해서 키우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되기도 했다. 
성종의 동물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성종은 역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골매 기르는 것을 고집했다. 심지어는 원숭이를 기를 흙집과 옷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사복시(왕이 사용하는 수레와 말의 사육을 맡은 관청)의 보고를 가납했다가 신하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성종은 “그럼 원숭이가 얼어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애닯아 했다.
아버지를 닮았을까. 성종의 아들 연산군도 애완동물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궁궐 안에 매와 개(犬)를 모아 태창(太倉·관리의 녹봉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쌀을 풀어 사육토록 했다.
이 때문에 매가 대궐 안 동산에서 떼지어 날고, 사냥개가 궁궐 뜰에 무리를 지어 짖는 일이 발생했다.
이밖에도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1574~1609)이 “개와 닭, 오리, 앵무새 키우기를 좋아했다”(<대동야승>) 기록도 있다.

 

■사도세자의 개
또 아버지(영조)에 명령에 따라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1735~1762)는 궁중에서 개를 키운 것 같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개그림 중에는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림의 주인공은 개는 긴 주둥이와 몸통 및 얼굴에 난 얼룩, 몸을 덮은 복실복실한 털, 날렵한 몸매와 다리, 긴 꼬리 등으로 미뤄볼 때 토종 조선개는 아닌 것 같다.

라이카종과 비슷한 계열의 사냥개이거나 보로조이 종의 선조에 해당되는 개인 것 같다.
당시 중국을 오가는 사신단을 통해 사냥개나 애완견을 수입한 것이 하나의 트렌드였던 것 같다.
연암 박지원의 <취답운종교기>엔 “중국에서 수입된 대형견 오(獒)가 해마다 사신들을 따라 조선에 들어오지만 다른 개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정병설 서울대 교수의 논문 '군궐의 개, 사도세자의 개'에서)

숙종과 인현왕후(제1계비), 인원왕후(제2계비)가 묻힌 서오릉의 명릉. 기록에 따르면 숙종의 퍼스트캣인 김손은 인원왕후의 명으로 이곳 명릉 주변에 묻혔다.

■“애완동물은 군주의 적입니다”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군주가 동물을 키우는 것 자체를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면서 금기시했다.
무슨 말인가. 이것은 기원전 1046년 중국 주나라를 창업한 무왕과 창업공신 소공 석의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즉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하자 전국의 제후들이 선물을 앞다퉈 보냈다. 그 가운데 서방의 오랑캐인 서려(西黎)가 키가 4척이나 되는 대형견 오(獒)를 바쳤다. 당시 80살을 넘긴 무왕은 이 개를 키우며 여생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재상인 소공 석은 “이 개를 절대 받으면 안된다”면서 그 이유를 밝혔다.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소용되는 물건을 천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넉넉해집니다. 진귀한 새와 짐승은 기르지 마소서. 아홉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
군주가 지나치게 물건이나 동물을 애완하면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의 뜻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조선조 성종이 낙타, 송골매, 원숭이를 애완하자 신하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면서 바로 이 ‘완물상지’를 떠올렸다. 한마디로 “애완동물에 한눈을 팔면 본심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1477년(성종 8년) 사복시가 성종 임금에게 “원숭이가 머물 집과 입힐 옷을 마련해주면 어떠냐”는 소근댔다는 말을 들은 좌부승지 손비장이 서둘러 뛰어와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원숭이에게 사람의 옷을 입히다니오. 한벌의 옷이라면 한 사람의 백성이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성종실록>)
손비장은 더 나아가 “이 일을 사관이 역사책에 쓴다면 성상께서 동물이나 애완하는 임금으로 길이 기록될까 두렵다”고 아우성쳤다.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얘기다.

 

■고양이에게 은혜베풀고, 사람에게는 철퇴 가하고…
다시 김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시민이나 이하원처럼 숙종과 김손의 이야기는 금수(고양이)에게까지 미친 군주(숙종)의 덕을 찬양하는 소재로 활용됐다. 물론 한낱 미물인 고양이 마저도 군주를 향한 가없는 충성심과 의리를 발휘하는데 하물려 인간인 당신들은 뭐냐고 지적하는 데도 즐겨 인용됐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전 사도세자 개그림’. 사도세자는 어릴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사도세자가 궁중에서 키운 것으로 추정되는 개들은 조선의 토종개가 아니라 라이카종 게통의 사냥개이거나 보로조이 종의 선조로 해당되는 개로 추정된다. 어미 개가 달려드는 강아지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인데, 매양 야단만 치는 아버지(영조)의 사랑을 받고 싶은 사도세자의 심정을 표현한 그림이라는 해석도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 즉위 직후인 1725년(영조 1년) 11월9일 <승정원일기>에 바로 이 숙종과 김손 이야기가 등장한다.
경종 재위 시절인 1721년 연잉군(훗날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소론의 영수 유봉휘(1659~1727)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올 때 바로 이 ‘숙종과 고양이’의 일화가 인용됐다.
“숙종대왕은 고양이에게 김손(金孫)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은혜가 금수에 미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을 모함하고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죄를 저지르는 자에게는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비록 친애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일찍이 용서하고 관대하게 봐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역적을 비호하는 자도 역적이다’라고 하여 훗날의 폐단을 막으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고양이까지 사랑했던 숙종이지만 임금을 모함하고,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역적죄를 저지른 자는, 아무리 임금이 평소 총애했던 자라도 관용없이 처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왕(경종)때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반대한 저 자(유봉휘)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유봉휘는 영조의 후원세력인 노론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실각한 뒤 유배지에서 죽고말았다. 한마디로 유봉휘는 고양이 김손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숙종의 이중인격
그런데 필자는 고양이를 어여삐 여겨 김손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인과 신하들을 ‘피의 숙청’으로 처단한 숙종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 
숙종(재위 1674~1720)이 누구인가. 아들 영조(1724~1776·52년 재위)에 이어 조선왕조를 통틀어 2번째인 46년간이나 임금의 자리에 있었던 장기집권자였다. 특히 당쟁의 와중에서 ‘환국(換局)’, 즉 ‘국면전환용 카드’를 적절하게 사용해서 각 정파들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철권을 휘두른 ‘정치의 달인’이라는 평도 듣는다.
그러나 숙종에게 그런 거창한 평가만 내릴 수는 없다. 기록을 뜯어보면 숙종은 그저 변덕스러울 뿐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철권통치자이자 못된 남편이었다. 못된 남편 때문에 세 부인인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 희빈 장씨가 피비린내나는 암투를 벌였고, 서인과 남인들은 세번의 환국으로 쫓겨나거나 떼죽음을 당했다.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숙종과 퍼스트캣인 ‘김손’ 이야기. 정적을 탄핵하는데 이 이야기가 인용되었다. 고양이보다 못한 역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남인정권을 붕괴시킨 경신환국(1680년),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을 다시 중용한 기사환국(1689년), 그리고 또다시 남인을 퇴출시키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1694년)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인의 후원을 받은 인현왕후가 기사환국에서 쫓겨났다가 5년만에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었다. 반면 남인의 후원을 받은 희빈 장씨는 기사환국으로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가 갑술환국으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변덕이 죽끓듯한 숙종의 성정
숙종의 성정은 원래 둘쭉날쭉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며느리인 인현왕후에게 아들(숙종)의 성품을 표현한 대목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주상(숙종)은 평소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의 화가 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그러니까 아들의 변덕이 평소에도 죽 끓듯하다는 것이다. 이런 성정은 인현왕후를 쫓아낼 때(1689년)과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이고 죽일 때(1701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인현왕후를 쫓아낼 때는 그때가 인현왕후의 생일(1689년 5월2일)임에도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그 결과 인현왕후는 “미처 가마도 꾸미지 못해 보통의 가마에 흰 명주보로 가마 위를 덮어 들어갔는데, 이미 왕후(인현왕후)가 걸어나왔다”(<인현왕후전>)고 했다. <인현왕후>의 필자는 “조선왕조에 이런 무례한 일이 없다”고 개탄했다. 참으로 각박한 남편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가마도 당도하지 않았는데 일국의 중전을 버선발로 내보낸 것이다.
못된 남편의 극악무도한 행위는 12년 뒤인 1701년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여 죽일 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5년 만인 1694년 남편의 변덕으로 중전의 자리에서 졸지에 희빈으로 떨어진 장씨의 분노 역시 극에 달했다.
희빈은 결국 신당을 차려놓고 밤낮으로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무고사건을 일으킨 혐의가 발각돼 사약을 받았다.
희빈 장씨가 사약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숙종은 “이 약을 상으로 알고 받으라”면서 장씨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들이부었다. “빨리 먹이라!”면서….

<인현왕후전>의 필자마저 “조금도 측은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면서 숙종의 비정함을 꼬집었다.
그렇다면 희빈 장씨의 악행을 고발했고, 아들 연잉군(훗날 영조)을 낳은 숙빈 최씨는 어떠했을까.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가 잇달아 죽었으므로 차기 왕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앞으로는 후궁이 절대로 왕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는 법을 만들었다.(<숙종실록> 1701년)
숙빈 최씨가 왕후가 될 길을 원천봉쇄해버린 것이다. 끝까지 비정한 남편이 아닌가.
이렇듯 숙종은 인현왕후, 희빈 장씨, 숙빈 최씨 등 세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은 못된 남편이었던 것이다.

 

■고양이는 사랑하고, 부인의 가슴엔 못을 박고… 
희빈 장씨가 죽으면서 했다는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하께서 정치를 밝히지 않으니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곱씹어보면 정치의 달인 소리를 듣는 숙종이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돌려가며 괴롭혔고 죽였다. 한낱 미물이라는 고양이를 사랑한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부인과 신하들을 아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은혜가 금수인 고양이 김손에게 미치도록 했지만 임금을 모함하고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죄를 저지르는 자에게는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결코 자랑이 아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