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년(인조 1년) 반정 이후 새 임금(인조)의 즉위를 중국 조정에 고하고 귀국한 홍익한(1586~1637)은 매우 의미심장한 명나라 소식을 전한다.

“글쎄, 중국 명나라에서 지금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제(희종)이라 합니다.”(<조천항해록>)

지금 명나라의 권력서열을 따지면 ‘넘버 1’은 환관 위충현, ‘넘버 2’는 황제의 유모(객씨)이며, 만백성의 어버이여야 할 황제는 ‘넘버 3’라는 이야기가 퍼졌다는 것이다.

황제는 1620년 부왕인 광종이 즉위 29일만에 급서하자 16살의 나이에 아무런 준비없이 황위에 올랐다. 목공일에 빠져 모든 정사를 환관 위충현과 유모 객씨에게 넘겼다.

청나라 시대 환관. 황제의 측근에서 종종 실권을 휘둘렀다. 

그 같은 위충현과 객씨의 국정농단 소식이 사신단을 통해 조선에까지 퍼진 것이다. 과연 그랬다.

어릴적부터 황제를 키웠던 유모 객씨는 마흔이 넘도록 미모와 재기를 잃지 않았다.

황제의 유모인 객씨는 18살이나 어린 황제에게 성(性)을 눈뜨게 했다.

황제는 즉위 1년만인 1622년 황후를 얻었다.

조정대신들이 '이제 객씨를 출궁시키라'고 고하자 우여곡졀 끝에 내보냈다.

그러나 황제는 객씨를 잊지못했다. 황제는 출궁한 객씨를 그리워하며 음식도 먹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황제는 결국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으니 객씨는 때때로 입궁해서 짐의 시중을 들라"는 명을 내렸다.(<명사>)

객씨가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황제는 감싸기만 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다. 객씨가 황제에 만족하지 않고 환관 위충현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것이다. 둘은 결국 사통하게 된다. 위충현은 스스로 거세한 뒤 환관이 된 자다.

환관이 어째서 객씨와 사통하는 사이가 되었을까. 비방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아이의 뇌를 씹어먹고 잃었던 남성의 능력을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황제 역시 두 사람의 사통을 공공연히 허용했다. 밤만 되면 특별히 위충현과 객씨의 합방을 명했다.

심지어 두 남녀는 황제의 면전에서 희롱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황제 앞에서도 마음껏 스킨십을 하면서 즐긴 것이다.

두 남녀는 황제가 나무에서 떨어져 옷이 찢어지고 얼굴에서 피가 났는데도 개의치 않고 희희낙락했다.

자연 위충현에게 파리떼가 꼬였다. 너도나도 위충현에게 뇌물을 갖다바치고 아양을 떨었다.

위충현의 공덕을 기리는 사대부만 해도 40만명이 넘었다.

심지어 국자감 학생 육만령이라는 자는 위충현을 ‘살아있는 공자’라 치켜세우면서 “살아있는 위충현의 사당, 즉 생사당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자와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앙하는 것도 그런데 생사당까지 모셔야 한다고 거품을 문 것이다.

어쨌든 생사당에 설치된 위충현의 나무상은 침향(열대지방에서 나는 향나무)으로 만들었고, 그의 눈ㆍ귀ㆍ입ㆍ코ㆍ손ㆍ발이 산 사람과 똑 같았다. 뱃속의 창자와 폐는 모두 금옥과 주보(珠寶)로 만들었다.

‘넘버 1’ 위충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을 호위하는 환관 3000명을 두어 궁중에서 훈련시켰다. 심지어는 황제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위충현이 외출할 때 연도의 백성들은 ‘구천세(九千歲)!’  ‘구천세!’ ‘구천세’ 삼창을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구천구백세!’의 구호까지 나왔다.(<명사> ‘열전·위충현전’)

황제에게는 ‘만세’를, 제후에게는 ‘천세’를 연호하는 법이다. 그런데 위충현에게는 황제와 거의 맞먹는 ‘구천세’ 혹은 ‘구천구백세’까지 연호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위충현의 권력은 마치 아침이슬 같았다. ‘넘버 3’ 황제(희종)가 재위 7년(1621~1627)만에 병사하자 위충현도 급전직하했다.

황위를 이은 의종은 10가지 죄상을 고하며 권력농단의 죄를 범한 위충현을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시켰다. 위충현이 군졸을 동원해서 가로막자 황제가 크게 노해 체포명령을 내렸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황제는 그의 몸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죽이는 천참만륙의 극형을 내렸다.

그렇다면 '넘버 2' 객씨는 어찌 되었을까. 보호막이던 황제가 죽자 궁밖으로 쫓겨났고, 훗날 체포되었다. 결국 궁녀를 처벌하는 빨래방에 갇혀 맞아죽고 말았다.

위충현, 객씨와 맞먹는 권력농단자가 있었으니 바로 유근(1451~1510)이었다.

유근이 모시던 황제(명나라 무종)은 한마디로 웃기는 인물이었다. 정사는 유근 등에게 맡기고 밤낮으로 음주가무에 빠졌으며, 매일 밤 궐밖의 사창가로 놀러다녔다.

심지어 활쏘기에 능한 환관들을 집결시킨 뒤 하루종일 전쟁놀이를 벌였다. 함성을 지르면서 쫓고 쫓기는 환관들의 전쟁놀이에 북경 시내가 떠들썩했다.

유근은 다른 환관 7명과 한 패를 이뤄, 황제의 타락을 부추겼다. 유근을 포함한 8명의 환관을 팔호(八虎)라 한다. 이들은 황제의 결제를 멋대로 뜯어고쳐 노신들을 쫓아냈다.

심지어 찌는 듯한 무더위에 조정백관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하루종일 ‘엎드려뻗쳐’ 시켰다. 단체기합을 준 것이다. 모든 업무는 뇌물 액수로 결정했다.

뇌물을 받은 유근이 종잇조각에 “어떤 관직을 준다”고 기입하면 병부(국방부)가 그대로 발령냈다. 그러나 유근의 말로 역시 비참했다. 유근은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그야말로 뼈만 남기고 살점을 발라내는 극형을 받은 것이다. 그가 축적한 황금은 무로 24만 덩이(5만7800냥)이었다.

한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측근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당연했다. 백성을 든든한 빽으로 삼아야 하지만, 군주의 뒷배만 믿고 호가호위한 자들이 아닌가. 방패막이(군주)가 사라지자 그들의 권세는 한낱 아침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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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