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청와대 미남석불의 원위치가 경주시 이거사터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1916년 출판한 <신라사적고>에 “이거사에 있던 불상을 총독관저로 옮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도지리 이거사터=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년)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광배(후광)가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

이 자료는 2011년 작고한 이근직 경주대 교수가 일본 덴리대(天理大)에 소장된 책을 복사해서 보관했던 것이다. 이 내용을 고 이근직 교수의 부인인 주진옥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보존관리팀장이 16일 공개했다. 모로가는 총독부 촉탁이던 1921년 금관총 발굴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이거사터 석불좌상 이전 시기로 적시한 때와 청와대 불상이 옮겨진 시점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모로가의 기록은 신빙성을 더해준다. 또한 모로가의 묘사대로 현재의 이거사터에 석탑 기단부와 옥개석 일부가 남아 있다.

이거사는 “성덕왕이 재위 35년 만인 736년에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 ‘성덕왕조’)고 할만큼 유서깊은 절이다.

청와대 미남석불의 원위치가 경주 도지동 이거사터라는 사실을 적시한 모로가 히데오의 기록. |주진옥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보존관리팀장 제공

■총독에게 아부 선물로 건낸 미남석불   

 경주 이거사에 놓여있던 미남석불이 파란만장한 106년 사연의 시발은 106년전인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2년 11월8일 당시 환갑을 맞이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穀·1852~1919)가 경주 토함산에 올랐다.

이유가 있었다. 일제가 한일병합 직전부터 추진중이던 석굴암의 서울 이전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1961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석굴암 해체 후 서울 이전’이라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세운 자는 다름아닌 데라우치였다”고 했다. 

“데라우치가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모두들 데라우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했다. 이리하여 석굴암은 (현장에서) 수리공사를 착공하게 됐다.”

 석굴암 이전계획은 병합 직후까지 추진되다가 지역여론 악화 등의 이유로 무산됐다는 것이다. 데라우치가 토함산에 오른 1912년은 아직 석굴암 이전이라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였다. 

 데라우치는 경주를 방문한 김에 신라유적·유물을 둘러본 뒤 군청, 재판소, 경주지청, 경찰서, 농산물진열장을 순시하면서 관계자들을 접견했다. 그런데 이 사이 데라우치의 눈길을 사로잡는 유물이 하나 있었다. 원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의 절터에 남아 있던 석불좌상이었다. 이 불상은 그 당시 이미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경주 시내 모처로 옮겨진 상태였다는 말도 있고,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데라우치는 잘생긴 석불좌상을 이모저모 살펴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런 데라우치를 고다이라가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청와대로 옮겨진 사연

고다이라는 그 잘생긴 석불좌상을 서울의 총독관저로 옮겨놓았다. 총독관저는 당시 남산 왜성대, 지금의 중구 예장동(옛 안기부 자리)에 있었다. 데라우치는 1916년 일본 본국의 총리대신으로 영전되어 떠났다. 고다이라가 데라우치에게 ‘상납’한 석불좌상 이야기는 그렇게 잊혀졌다. 1934년 3월29일자 매일신보가 그 소식을 전할 때까지는…. 

매일신보는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이 즐풍욕우(櫛風浴雨·거센 비바람) 참아가며 총독관저 대수하(大樹下·큰 나무 밑)에,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경주의 보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이…그만 자취를 감추었다가…이틀 전인 27일(1934년) 왜성대 총독관저에 있다는 말을 듣고…촉탁 가야노기(榧木)가 달려가보니 총독관저 경관 대기소 위 언덕 큰 나무 아래 천연덕스럽게 좌정하고 있으나….”

매일신보는 “미남석불은 시가로 따진다면 적어도 5만원 이상 되지만 지금은 금을 가지고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며 “신라의 유물로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참고자료”라 평가했다. 석불좌상에게 ‘미남석불’의 애칭을 지은 것은 다름아닌 매일신보였던 것이다. 이 미남석불은 1939년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다.

이후 이 석불은 총독관저가 경무대로, 다시 청와대로 바뀌는 동안에도 그 자리를 지켰다. 1974년 1월15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지만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청와대에 있는 미남석불.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였다가 올해 보물로 승격됐다. 모로가의 보고에 따르면 이 불상은  1913년 서울 남산 총독관사인 왜성대로 옮겨졌다. 


■미남석불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 

그러다 1993~1994년 사이 구포역 열차전복,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 등 참사가 잇따르자 석불을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관저 뒤편에 있던 미남석불을 치워버려 각종 사고가 줄을 잇는다’는 것이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자 청와대는 미남석불의 건재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관저를 신축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100m쯤 올라간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던 올해 2월 미남석불을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의 이름으로 보물(제1997호)로 승격하면서 거취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하루빨리 경주로 원위치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지만, 아직 원위치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연구를 더 벌인 뒤에 옮겨도 늦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이 미남석불의 원위치가 어디냐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1934년 청와대 불상과 빼닮았으나 목은 없는 쌍둥이 불좌상이 나온 경주 남산을 지목하기도 했다. 1934년 매일신보에 등장하는 ‘경주 남산에 있던~’의 기사 내용이 인용됐다.

신문기자 출신 미술평론가인 이구열씨는 1973년 펴낸 <한국문화재수난사>(돌배개)에서 “경주 시외인 내동면 도지리의 유덕사터에 남아있던 유물”이라 기록했다. 하지만 이구열씨는 어떤 근거로 유덕사터를 지목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삼국유사> ‘탑상편’을 보면 “신라의 대부이자 각간인 최유덕이 지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그 이름을 유덕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이번 ‘미남석불의 원위치=경주 이거사’라는 신빙성있는 자료가 나오면서 이같은 위치논쟁은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주 도동동(옛 내동면 도지리)에 있는 이거사는 이구열씨가 언급한 유덕사와 같은 절인 것으로 해석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이거사로 일컬어졌다가 고려시대 때 유덕사로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청와대 불상의 원위치가 드러남에 따라 청와대 미남석불의 이전 및 이거사터 정비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조선의 초대총독인 데라우치의 손을 거친 불상의 이전 자체가 전형적인 일제의 잔재이므로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여론이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