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춤바람’에 빠진 올림픽 선수단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lkh@kyunghyang.com


 

“그들(한국선수단)은~ 연습이 없을 땐 ‘딴스(댄스)’를 하고~ 모사(毛絲)를 사러 저잣거리로 나간다. 그들이 조용할 땐 밥을 먹을 때뿐….” 


런던올림픽이 한창이던 1948년 8월13일 UP조선통신발로 해괴한 기사가 타전된다. 한국선수들이 영국 소녀들과 댄스를 즐기는 등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었다. 선수단은 “합심(단합)이 없으니 죽일 놈, 살릴 놈 소리를 듣는 것”(경향신문 1948년 8월20일자)이라는 욕을 먹었다.


“집 안에서 새는 박아지, 들에서도 샌다는 격언도 있거니와 바로 우리 선수단을 두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경향신문)

 

대체 무슨 일인가. 사람들은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첫 출전한 선수단에 거국적 성원을 보냈다. 올림픽복권까지 발행해 8만달러의 출전경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잡음이 터져 나왔다. 30대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 온갖 로비를 벌여 대표선수로 발탁됐다. 52명 가운데 30대 선수가 60%에 달했다. 그래도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인 서윤복과 최윤칠 등이 버틴 마라톤은 확실한 금후보였다. 하지만 믿었던 마라톤은 악몽의 레이스가 됐다. 38㎞까지 선두를 달리던 최윤칠이 탈진한 것이다. 결국 기권했다. 서윤복은 27위로 처졌다. 사람들은 ‘라듸오통’을 집어 던졌고,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맞았다. 과연, 선수단 내 알력이 있었다. 


“선수가 코치의 명령에 불복종했다. 초반 레이스부터 우리끼리 폭주(暴走) 함으로써 외국선수에게 어부의 리(利)를 주었다.”(경향신문 8월19일자)


역도의 남수일은 피부 도포제로 구입한 공업용 살리실산 용액을 술(양주)로 잘못 알고 마시는 바람에 경기를 망쳤다. 4위에 그쳤다. 역시 살리실산 용액을 벌컥벌컥 들이켠 민재호 아나운서는 밤새도록 비명을 질렀다. 그 때문에 한국선수들 모두 밤잠을 설쳤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한국축구는 스웨덴에 0-12로 대패했다. 민재호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죽는다”고 자해했다. “내 추태 때문이야. 내가 민족반역자야!”


동메달을 딴 복싱의 한수안은 앞당겨진 경기시간을 착각해 식사도 거른 채 부랴부랴 준결승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맞상대인 이탈리아의 반디낼리가 3번이나 파울을 범했지만, 주심은 실격처리하지 않았다. 억울한 판정패. 그렇게 보면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을 괴롭혔던 ‘오심의 시발’이 바로 한수안이었을까. 어떻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