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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②‘석촌동 3호분의 주인공은 근초고왕인가’

최근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에서 한성백제 시대 적석총이 확인됐습니다. 새삼 40여 년 전 ‘야만의 시간’을 되짚어봅니다. 1983년 개발의 광풍 속에서 포클레인 삽날에 백제인골이 찍혀나간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참상을 고발하고, 온몸으로 유적을 지켜낸 소장학자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촌동 고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당연히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도 파괴되었을 겁니다.
더불어 최근의 발굴성과를 토대로 백제의 최전성기인 한성백제 시대를 되짚어보려 합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지금의 송파구, 즉 예전의 광주평원에 둥지를 튼 이유는 무엇일까, 형인 비류는 지금의 인천(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가 실패로 돌아갔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또하나, 한성백제의 도읍지는 과연 어떻게 구성돼 있었을까. 이와함께 당시 백제 임금과 왕족, 귀족이 묻힌 한성백제기의 공동묘지, 즉 ‘석촌동 고분의 어제 오늘’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①편은 ‘포클레인 삽날에 찍힌 석촌동 백제인골, 백제왕릉’, ②편은 ‘석촌동 3호분의 주인공은 근초고왕인가’입니다.|필자 주

 

풍납토성,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 고분을 비롯한 방이동·가락동 고분은 과연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삼국사기> 등 문헌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한가지 기억해 둘 대목이 있다. 고구려를 떠나 남한으로 망명한 온조왕이 도성을 한강 이남으로 정한 뜻이다.


 

“백제 창업주 온조왕이 부아악(삼각산 혹은 북악산)에 올랐다. 적당한 땅을 찾아 도읍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온조왕을 따라 온 10명의 신하가 간했다. ‘강 남쪽의 땅은 북으로 한수(한강)을 띠고 있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이렇게 하늘이 내려준 험준함과 땅의 잇점은 좀처럼 얻기 어려운 지세라….”(<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

 

북으로 강(한강), 남으로 비옥한 들판(광주평원), 동으로 높은 산(남한산), 서로 바다(서해)를 낀 천혜의 장소를 도성으로 삼은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보존된 석촌동 고분. 제2롯데월드를 눈앞에 두고 난개발된 주택가 사이에 외딴 섬처럼 갇혀있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온조는 한강 남쪽에, 비류는 바닷가(인천)에
온조의 형인 비류는 백성을 나눠 미추홀(인천)에서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바닷가인 비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도읍지로서 적당치 않았다.

 

비류는 할 수 없이 동생의 도읍지인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비류를 따랐던 백성들도 모두 온조의 품에 안겼다. 당시 기준으로는 미추홀이 바닷가여서 도읍지로서 부적당하다고 했지만 지금은 어떤가.

 

해양국가로서 발돋움하려면 인천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비류는 시대를 잘못 만난 지도자였는지 모른다.

온조는 한강 이남의 드넓은 평원을 천혜의 도읍으로 정했다. ①풍납토성과 ②몽촌토성에 정궁과 별궁을 조성했고, 방위성인 ③삼성동토성(사성)과 ④아차산성(아단성 혹은 아차성)을 쌓았으며 ⑤석촌동과 ⑥방이동, ⑦가락동에 왕과 왕족, 귀족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주변엔 ⑧미사리 유적과 ⑨이성산성이 보이고, 도성을 품에 안은 형국인 ⑩남한산이 버티고 있다.|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제공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도읍으로 정한 위례성은 어디인가. 한강 남쪽 비옥한 들판 중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풍납토성인가 몽촌토성인가. 관련 기록을 찾아보자.

 

“392년(아신왕 즉위조) 침류왕의 원자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슨 뜻인가. 한성백제기에는 평소 왕이 거주하는 정궁과, 이따끔 사용하는 별궁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성백제의 멸망을 다룬 475년 9월의 기록은 생생하다.

 

“고구려군이 한성의 북성을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으로 옮겨 공격했다. 남성이 위험에 빠지자 개로왕은 도망쳤다. 그러다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에게 붙잡혀…아차성 밑에까지 끌려가…피살됐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토대로 그린 백제 최전성기의 추정 강역도.

백제에 남성과 북성 등 두 개의 성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바로 한성백제의 북성을 풍납토성, 남성을 몽촌토성이라고 비정한다.

 

두 성의 거리는 약 700m 정도인데, 최근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연결하는 백제 도로가 발견됐다.

 

성의 규모로 보나, 출토유물과 유구로 보나 임금이 평소 거주하던 정궁(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별궁(남성)은 몽촌토성이라는 것이다.


 

풍납토성은 종교, 정치, 경제, 대외교류의 중심지이며, 귀족과 상인, 각국 사신이 드나들던 도시였고, 몽촌토성은 왕과 왕족의 사적인 거처, 혹은 비상시 피신처 등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성을 지키는 좌우 날개성은
그러면 “286년(책계왕 원년)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해서 아단성과 사성(蛇城)을 수리했다.”는 기사는 뭔가.

 

먼저 아단성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아단성은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 군에게 끌려와 비참한 죽임을 당한 아차성을 일컫는다.

아차성은 해발 327m 용마봉을 최고봉으로 하는 아차산 능선의 남쪽 끝자락에 있다. 아차성에서 볼 때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풍납토성은 강건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손가락을 펴면 닿을 듯 매우 가깝게 여겨진다. 아차성은 한성백제 시기에는 도읍을 방위하는 최후의 보루였을 가능성이 짙다.

<삼국사기>가 말하는 사성은 어디인가. 예전에 두계 이병도는 풍납토성을 사성이라 비정한 바 있다.

 

뱀 사(蛇)자를 쓰는 사성은 원래 ‘배암들이’였는데, 그것이 ‘바람들이’로 변하고 한자표기로 풍납(風納)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풍납토성을 사성으로 여기는 학자들은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해석해보면 사성은 아차성과 함께 왕궁(풍납토성·몽촌토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방어성이다.

 

아차성은 도성의 동쪽인 한강 건너 아차산에 있다면, 사성은 도성의 서쪽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고보면 삼성동 토성일 가능성이 짙다.

최근 몽촌토성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도로. 이 도로는 풍납토성 방향으로 나 있다. 학자들은 백제가 정궁(풍납토성)과 별궁(몽촌토성)을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문화재청 제공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삼성리 토성은 광주군 언주면에 있는데 북으로 한강에 임하고 한강을 사이에 두고 뚝섬 방향으로 내려다보는 산성”이라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경기고 자리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라는 것이 유력한 견해다.

물론 현 청담 배수지 공원과 봉은중학교 언저리를 지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경기고와 청담 배수지 공원 사이를 아우르는 곳을 꼽기도 한다.      
 
■한성백제 왕·왕족·귀족의 공동묘지
그렇다면 왕릉은 어디인가.

고대의 도성은 ‘산 자의 공간’인 궁실 및 성벽(풍납토성 및 몽촌토성), 강(한강)과 산(남한산·검단산)이 ‘죽은 자의 공간’인 무덤과 공존한다.

 

석촌동을 비롯한 방이동·가락동 고분군이 그렇다. 무덤의 규모가 큰 적석총의 주인은 아무래도 왕이나 왕족, 혹은 귀족일 가능성이 짙다.


특히 석촌동 고분군은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풍납토성에서 동남쪽으로 약 3㎞, 몽촌토성에서는 약 2.3㎞ 정도 떨어져 있다.

한성백제 말기인 475년(개로왕 21년)의 기록을 보면 왕릉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가 보낸 간첩인 승려 도림은 지금의 이창호 9단 같은 바둑의 신이었다. 바둑을 좋아했던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실력에 흠뻑 빠졌다. ‘때가 됐다’고 여긴 도림은 개로왕을 다음과 같이 유혹한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입니다. 하늘이 베푼 요새이고…. 그러나 성곽인 수리되지 않았고, 궁실도 고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이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으니….”

도림은 개로왕을 꾀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킴으로써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키려 한 것이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에 ‘혹’ 한다.

 

“개로왕은 ‘그대의 말이 옳다’고 맞장구 쳤다. 왕은 백성들을 총동원해서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과 누각, 사대를 지었다. 중장하고 화려했다.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가 덧널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의 북쪽에 이르렀다.”

궁실이 풍납토성·몽촌토성이다. 적석총을 쌓는 데 필요한 돌은 욱리하(한강)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또 왕릉 구역은 사성(삼성동)의 동쪽이자 숭산(검단산)의 북쪽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곳이 바로 석촌동 일대이다.

석촌동에서 출도된 가는 귀고리.

■석촌동 3호분의 주인공은
앞서 밝혔듯 일제강점 초기만 해도 최소 89기, 최대 290여기의 고분이 존재했던 곳이다.

 

이곳은 한성백제 왕·귀족들의 공동묘지였을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고분은 석촌동 3호분이다. 이 고분은 동서 50.8m, 남북 48.4m에 이르는 대규모의 기단식 적석총이다.

 

일제 강점기 자료인 <조선고적조사도보>(1917년) 사진을 보면 3호분의 높이가 무덤 앞에 세워진 초가의 높이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복원한 높이(4.5m) 보다 약 1.5m 가량 높은 6m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왕릉이 분명한 석촌동 3호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한성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에게 뜨거운 시선을 돌린다.

 

1984년 3호분 발굴조사에서 금으로 만든 영락(구슬을 꿰어 몸에 달아 장엄하는 기구), 옥연석(연마한 옥), 석추(돌로 만든 송곳)와 함께 청자반구병이 출토됐다. 그런데 이 청자반구병의 연대가 4세기 후엽의 중국 동진 시대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근초고왕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국임을 뽐낸 근초고왕
알다시피 고구려·백제·신라 가운데 맨먼저 전성기를 누린 나라는 바로 백제였다.


 

같은 뿌리(부여)에서 갈라진 고구려와 백제는 죽일듯 으르렁댄다. 틀어진 형제 자매간 싸움, 즉 동족상잔이 더 치열하다고 하지 않은가. 특히 4~6세기 사이 고구려와 백제는 37회의 접전을 펼친다.

 

전쟁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전투는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과 벌인 치양(황해도 배천) 전투였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쳐들어와 민가를 약탈했다. 이 때 백제 근초고왕은 태자(근구수왕)를 시켜 기습전을 벌이도록 했다. 백제군은 고구려군 5000명을 죽이는 등 완승을 거뒀다.”

6세기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의 용모를 그리면서 그 나라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양직공도>. 백제가 요서지방을 경략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의기양양해진 근초고왕은 한강 남쪽의 한성에 돌아와 대대적인 열병식을 벌였다. 군대를 사열할 때 황색깃발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황제의 색깔로 통하는 황색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만천하에 ‘백제국=황제국’임을 뽐낸 것이다.

 

2년 뒤에는 백제의 국세가 더더욱 하늘을 찌른다. 369년의 패배를 되갚으려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반격을 패하(예성강 지류)에서 막아낸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명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겨울을 틈타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다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백제의 위세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는  중국 사서를 봐도 알 수 있다. 바로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을 식민지로 뒀다는 요서 경략설이다.

 

■“백제는 중국 요서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 기록은 당대 믿을만한 중국인 역사가(심약)가 488년 집필한 <송서>와, 6세기 때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의 용모를 묘사한 <양직공도> 등에 일관되게 등장한다.

 

“고려는 요동을 경략했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서 있었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불렀으며…. 백제 전지왕은 북방 오랑캐를 정벌하고….”(<송서>)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니 낙랑(백제)은 요서의 진평현을 차지했다.…보통 2년(521년) 백제왕 여융(무령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며 이르기를 ‘여러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다.”(<양직공도>)

당나라 태종의 명령에 따라 628~636년 사이 편찬된 <양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진나라 때 고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했고, 백제는 역시 요서에 근거를 두니 진평군 땅이다. 백제군이 자치했다. 근구수왕, 전지왕, 비유왕 역시 백성을 파견했다.”

물론 엄연한 사료의 존재를 두고 와전됐다니느니, 혹은 잘못 기록됐다느니, 혹은 틀린 대목이 많다느니 하면서 고개를 내젓는 학자들이 많다.

 

그것은 학자들의 논쟁에 맡겨야겠지만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최치원(857~?)이 신라 사신의 자격으로 당나라를 방문해서 당나라 문하시중(태사)에게 올린 편지의 내용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나라를 그르친 것도 요동정벌 때문이었습니다.”

 

■심상치않은 최치원의 증언
이 편지는 다름아닌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실려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의 국력이 중국 본토인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 북으로는 연·제·노나라를 괴롭힐 정도였다는 것이다. 전성기 백제가 중국 대륙의 여러 나라를 크게 위협했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백제의 전성기를 연 근초고왕은 고구려 뿐 아니라 가야연맹의 7개 소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침미다례(전남 해안)를 무찔러 비리 등 4읍의 항복을 받아냈다.(<일본서기>)

 

369년 무렵에는 왜왕에 칠지도를 하사했으며, 박사 고흥을 시켜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도록 했다.

 

한성백제의 정궁으로 알려진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 아차산성, 남한산 등을 아우르는 한성백제의 핵심이었다.

물론 석촌동 3호분이 근초고왕의 무덤이라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이 무덤이 근초고왕이나 혹은 근초고왕에 견줄만한 백제 임금의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참고로 근초고왕의 맏아들인 근구수왕(375~384)도 아버지 못지않은 영걸이었다. 369년 치양 전투와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부왕(근초고왕)을 도와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고국원왕을 죽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특히 치양 전투에서 패주하던 고구려군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이유가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즉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 구절을 인용한 막고해 장군의 진언을 받아들여 회군했다는 것이다. 진퇴를 아는 현명한 군주였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석촌동 3호분의 주인이 근구수왕이라는 증거도 아직 없다.

 

■한성백제 왕·왕족·귀족의 공동묘지
2015년 5월 석촌동 고분군을 관리하던 이가 1~2호분 사이에 난 조그만한 구멍을 발견했다. 싱크홀인지, 도굴인지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백제고분차도와, 지하철 9호선이 고분군 밑을 관통하고 지나가기에 그냥 둘 수 없었다. 긴급발굴이 시작된 끝에 최근 주목할만한 조사결과가 나왔다.

 

한성백제 시기의 적석 단위가 10여개 이상 연접한 구조의 적석총이 확인된 것이다. 확인된 적석총의 전체 규모만 사방 40m가 넘었다.


 

물론 한 단위의 적석총이 아니었기에 왕릉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석단위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이곳이 왕족의 공동묘지일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고보면 예전의 광주평원, 지금의 송파구 일대는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 그 자체이다.

 

모골이 송연하다. 지금 이 순간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은 제2월드월드 건물과, 그 주변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 틈에 석촌동 고분이 외딴 섬처럼 갇혀있다.

 

건물 숲 사이로 간신히 목숨을 보전한 풍납토성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열정 넘치는 학자의 외로운 투쟁이 없었다면 아마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형구, <서울 백제고분의 보존과 발굴-석촌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동양고고학연구소, 2016
신희권, ‘개로왕대 한성의 도성 경관과 토목공사’, <제8회 쟁점 백제사 집중토론 학술회의-개로왕의 꿈, 대국 백제>, 한성백제박물관, 2016 
정치영·최진석, ‘석촌동고분군 발굴의 최신성과’, <제1회 근초고왕과 석촌동 고분군 국제학술대회>, 한성백제박물관, 2016
임영진, ‘서울 석촌동 고분군의 구성과 변천-1~5호분의 쟁점을 중심으로’, <제1회 근초고왕과 석촌동 고분군 국제학술대회>, 한성백제박물관, 2016
한성백제박물관, <온조, 서울 역사를 열다>, 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 2013
한성백제박물관, <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2013
서점교, ‘백제의 요서진출설 소개 및 고찰’, <군사연구> 제124집,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08
김성한, ‘백제의 요서 영유와 백제군’, <역사학연구> 제50호, 호남사학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