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제강점기 고미술 무역상인 '야마나카 상회'를 다룬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이 야마나카 상회를 거쳐 판매된 석조 및 도자 문화재의 도록 사진과 관련 기록을 정리한 논문입니다. 야마나카 상회? 관련 서적을 들춰보니 간송 전형필 선생과 몇차례 맞대결을 벌인 기록이 있었습니다. 논문이 나온 김에 간송과 야마나카 상회가 펼친 문화재 전쟁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간송도 조선에서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당대 글로벌 거대자본이던 야마나카 상회와는 견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간송은 당당히 맞섰습니다. 첫번째 야마나카 상회가 개최한 경매에서 석조물 4점을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첫번째 만남에서는 판정패였습니다. 어떤 이유때문일까요. 하지만 두번째 대면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감상할 수 있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첩을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구입했습니다. 이것도 한편의 드라마 같은 승부였습니다. 이제 1승1패 상황. 간송은 3차전을 벌입니다. 한편의 대서사시 같은 싸움이었습니다. 참기름병으로 쓰이다가 1원에 팔렸고, 이것이 60-600-3000원으로 급등했다가 결국 1만4850원까지 오른 조선백자입니다. 간송은 야마나카 상회와의 불꽃튀기는 경매전 끝에 승리를 거둡니다. 과연 어떤 백자이기에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 대결을 벌였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1회는 '간송 전형필과 야마나카의 문화재전쟁 3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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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야마나카(山中) 상회라는 고미술 무역상이 있었다.

일찍부터 미국 뉴욕(1894년)과 보스턴(1899년)에 진출해서 일본 공예품 시판회를 열어 호평을 얻는다.

이 두 곳에 점포를 얻은 야마나카 상회는 이후 시카고와 런던, 파리는 물론 베이징 등에 지사를 둘만큼 세계적인 골동품 거상으로 급성장한다.

상회를 이끈 이는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1866~1936)이었다. 원래 그의 본명은 아다치 사다지로(安達定次郞)이었다. 13살에 오사카의 고미술상인 야마나카 기치베에(山中吉兵衛)의 가게에서 사환으로 일하다가 그 집안 장녀인 테이(貞)와 결혼했다.

처음엔 참기름병이 되어 나타난 조선백자. 18세기 작품이다. 원래 조선백자의 특징은 단순 절제미로 축약되지만 이 백자는 다양한 색채를 자랑한다. 돋을 무늬로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칠했다.

결혼을 계기로 아예 성을 아다치에서 야마나카로 바꾸고 그 집안의 후계자 자리를 꿰어찼다.

1918년 야마나카 상회의 대표가 된 야마나카 사다지로는 당시로는 독특한 판매방식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즉 팔고자 하는 물품의 해설과 사진을 넣은 도록을 살만한 고객에게 먼저 보냈다.

그런 뒤 특정일에 그 물품들을 상점에 전시하고, 고객들을 특별초대해서 판매했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이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구입한 한국 유물이 7점 있는데, 그 중에는 12세기 고려시대에 제작된 은제 금도금 주자와 받침대도 있다.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이 제품의 당시 가격은 1만 달러였다.

야마나카 상회는 1944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미국에 흩어져 있던 상점은 물론 지사의 재산까지도 동결 몰수됨으로써 해체된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골동품계의 거대자본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대 일본에서는 “야마나카는 일본의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야마토(大和) 민족의 문화적 진출에 발군의 성적을 세운 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야마나카 사다지로는 바로 일본 미술계의 선구자이자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골리앗에 도전장을 내민 다윗이 식민지 조선에 있었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간송 역시 조선에서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세계적인 골동품상인 야마나카 상회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간송은 야나마카와 운명적인 담판과 맞대결을 벌여 국보 문화재를 확보한다.

이충렬의 ‘<간송 전형필>, 김영사, 2010’ 등 관련자료를 중심으로 전형필-야마나카 상회간 3차전의 맞대결 사연을 풀어본다.

혜원 신윤복의 '월야밀회'. 우리나라 최초의 키스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몰래 지켜보는 여인의 시선이 남다르다. 간송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가 갖고있던 혜원의 풍속도첩을 2만5000원에 구입했다. |간송미술관 소장  

■판정패로 끝난 1차전 어웨이 경기
간송이 야마나카 상회와 1차전을 벌인 것은 1933년이었다. 간송은 혜화문 밖에 개인박물관을 세울 계획이었다.

1938년 건립된 최초의 사립박물관(미술관)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이다.

이 박물관의 정원을 장식할 석조물을 찾았던 간송은 골동품상이자 경매대리인인 일본인 신보 기조(信保喜三)를 만나 도록 하나를 보여주었다.

1933년 11월 2~5일 사이 일본 오사카 야마나카 석조진열소에서 열릴 예정인 석조물 야외 경매 도록이었다.   

“신보 선생, 이번 경매에서 이 4점은 반드시 낙찰받아야 합니다. 선생께서 대리경매 좀 해줄 수 있습니까.”

간송이 체크한 석조물은 통일신라 3층 석탑과 고려 3층 석탑. 석조사자탑, 조선 석등이었다.

야마나카 상회가 어떻게 조선의 석조물들을 대거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 조선의 석조물은 고려자기에 버금가는 인기반출품목이었다.

혜원 신윤복의 '이부탐춘'. 소복을 입은 여인이 여자종과 함께 개의 교미장면을 지켜보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정원을 꾸미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조선총독부가 1911년 개인간의 석조물 매매를 금하는 문건을 각 지방에 내려보냈을까.

문건의 내용은 “조선 각지의 석조물들은 일반 백성의 사유물이 아니므로 사적으로 팔거나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근래 각 지방 폐사 유적과 기타 황폐되어 버려진 곳에 있는 고비·석탑·석불 등 기타 석재에 조각된 건설물을 매매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는 자가 있다.…이것은 원래부터 백성의 사유물이 아니다. 지방 백성이 간교한 자의 유혹에 빠져 매매계약 하거나…하는 자가 없도록 엄중한 감시를….”

그러나 이 문건은 법령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자체가 묵인하면 반출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야마나카 상회가 어떻게 이런 석조물들을 대거 입수해서 경매로 되팔게 되었는 지는 알 수 없다.

간송은 신보에게 경매를 부탁하면서 “값은 얼마든 상관없으니 4점 모두 확보하기만 하라”고 했다.

드디어 오사카 경매가 시작됐다. ‘불국사 전래’라는 확실한 출토지가 있는 통일신라 3층석탑을 둘러싼 경합이 특히 치열했다.

각축 끝에 간송의 대리인인 신보가 부른 6000원에 낙찰됐다. 신보는 이어 고려 3층 석탑(3700원)과 석조 사자(2500원), 조선 석등(550원) 등 간송이 점찍은 4점을 모두 확보했다. 물건 값만 1만2750원이었는데, 당시 시세로 서울의 기와집 13채값이었다. 

그러나 이 첫번째 대결은 간송의 패배로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면 기와집 6채 값을 주고 사들인 통일신라 3층 석탑이 훗날 고려시대 석탑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불국사 전래’라는 출토 경위도 확실치 않아 인정받지 못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8호 지정으로 만족해야 했다. 간송은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바가지를 뒤집어쓴게 아니냐”는 말에 “처음이니 그럴 수있지”라고 웃어넘겼다는 후문이다.  

고려 3층석탑. 야마나카 상회가 주최한 경매에서 한옥 6채 값인 6000원에 구입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석탑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그쳤다.|간송미술관

■혜원의 풍속도를 놓고 벌인 맞대결의 승자는?
이렇게 야마나카와 일종의 상견계를 치른 간송은 딱 1년 뒤 눈터지는 심리전을 벌여 국보 중의 국보를 확보한다.

이것이 바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인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135호)이다. 간송과 야마나카 사이에 벌어진 1-1 심리전의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1934년 간송은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이라는 책에 실린 흑백도판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훗날 ‘주유청강(舟遊淸江)’과 ‘상춘야흥(賞春野興)’이라는 이름이 붙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2점이었다.

‘주유청강’은 양반들이 기생들과 한강에서 뱃놀이 하는 모습을 그렸다.

 ‘상춘야흥’은 진달래 꽃 화사한 봄날, 당상관(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고관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야외에 나와 봄놀이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의 원 소장자는 개인이 아니라 도미타(富田) 상회였다. 도미타 상회는 일본인인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가 남대문 옆 조선은행 뒤편에 차린 서화골동품상이었다.

그 도미타가 ‘주유청강’과 ‘상춘야흥’을 비롯, 30점의 혜원 풍속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더 알아보니 그림의 소유권은 이미 야마나카 상회로 넘어가 있었다. 도미타가 사망하자 유족들이 야마나카 상회로 유품들을 일괄로 판매했다는 것이었다.

“야마나카라면 작년에 석조물을 경매한 상점 아닌가요? 한번 알아봅시다.”

송은 경매 대리인인 신보를 찾아가 “저 혜원의 그림만큼은 반드시 확보해보자”고 했다.

거의 한달이 지난 뒤 신보가 간송을 찾아와 혜원 풍속도의 그림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간송 전형필 선생. 야마나카 상회와의 경쟁에서 한치의 양보없이 맞대결을 벌여 국보급문화재를 다수 확보했다.

“혜원의 풍속화첩이 오사카 야마나카 상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을 너무 비싸게 불러요.”

화첩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던 간송이 신보에게 물었다.

“가격은 얼마를 부릅디까?”   

“그게 말입니다. 모두 30점인데 5만원을 불러요.”

“5만원? 5만원이라고?”

간송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귀한 작품이기로서니 5만원이면 너무 비싸지 않은가. 기와집 50채 가격이라니….

“포기합시다. 너무 비싸요.”(간송)

“인연이 없다고 생각해죠. 제가 야나마카 상회에 포기한다고 연락하겠습니다.”(신보)

얼마 후 그렇게 마음을 접은 간송에게 신보가 다시 찾아왔다.

“야마나카 상회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가격 조정 해보자고 합니다.”(신보)

가격조정? 그렇다면 흥정하자는 얘기가 아닌가. 앞 뒤 가릴 것 없었다. 간송은 신보와 함께 오사카로 달려갔다.

세계적인 골동품 무역상이었던 야마나카 상회의 주인 야마나카 사다지로.

■숨죽이며 넘겨본 혜원 풍속화첩
간송 앞에 야마나카 상회의 대표인 야마나카 사다지로가 나타났다. 두 사람 간 신경전이 벌어졌다.

간송은 일단 혜원의 풍속도 30점을 확인했다. 흥분을 애써 가라앉혔다.

과연 대단한 풍속도였다. 이토록 당대 양반사회를 풍자한 풍속도가 어디 있는가.

한량과 기녀들의 일탈한 사랑을 은밀하면서 애로틱하게 표현했다.

남녀의 야밤 자유연애를 그린 ‘월하정인’과, 첫 키스신의 장면인 ‘월야밀회’ 등이 그렇다. ‘단오풍정’은 조선 최초의 누드화로 꼽힌다.

무엇보다 혜원의 풍속도에는 여성(기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여인들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이토록 잘 표현한 작품이 어디 있는가.

혜원은 담 안에 갇혀있던 여성들을 울타리 밖으로 해방시켰다. 소복을 입은 과부가 여종과 함께 짝짓기 하는 개 한 쌍을 바라보는 그림을 보라.

반면 남성들은 ‘찌질이’로 표현됐다.

여자종의 손목을 잡아끄는 젊은 선비를 그린 ‘소년전홍’과, 성매매 현장을 표현한 ‘삼추가연’, 질탕한 스킨십을 그린 ‘청금상련’, 선비의 눈빛이 음흉한 ‘정변야화’ 등….

실소를 자아내는 그림 중에는 ‘당신의 마부가 되겠다’면서 기생이 탄 말을 모는 양반과, 기생의 담배불을 붙여주는 남자, 그리고 황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진짜 마부를 그린 ‘연소답청’이 압권이다.

또 기생집에서 술에 취해 난투극을 벌이는 ‘유곽쟁웅(기방난투)’도 당대 양반사회의 일면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야마나카 상회가 1934년 됴코에서 개최한 지나조선고미술전관에서 전시된 도자기류. 이중 12번(백자 주병)은 아카보시 고로라는 유명한 한국도자기 수집가가 구입해 1965년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이같은 목록을 통해 이런 저런 이유로 야마나카 상회를 통해 반출되고 판매된 한국문화재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주홍규의 논문 ‘야마나카 상회와 일본으로 유출된 한국문화재’에서

혜원의 그림은 시대의 금기를 깨는 대담한 도전이었다. 간송으로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될 기화(奇貨)였다.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와집 25채값을 주고 얻은 통쾌한 승리
세계적인 골동품상인 야마나카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멀리까지 오셨으니 4만원까지 내려드리죠. 그 이하는 안됩니다.”

간송의 표정을 읽은 신보가 고개를 내저었다.

“2만원 이상은 안됩니다.”

야마나카는 요지부동, 4만원을 고수했다. 간송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인연이 없나 보네요. 섭섭하지만 제가 직접 그림을 보았으니 눈이 호강한 것으로 만족하렵니다. 이번 여행이 헛되지는 않았습니다.”

간송이 작별인사를 고하고 떠나려 하자 야마나카가 여운을 남겼다.

“(간송) 선생. 제가 장삿속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닌데…. 작년 석조물 경매 때 선생의 기개를 봤는데…. 이 화첩은 선생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야마나카의 말이 간송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흥정이 시작됐다.

야마나카는 “만원씩 양보하자”고 했다. “3만원으로 하되, 1만원이 부담된다면 어음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제가 판단한 금전적인 가치가 있는데, 그걸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그러나 1만원 어음발행은 외상이라는 얘기다. 6개월짜리 어음이든, 1년짜리 어음이든 결국 갚아야 할 돈이다. 간송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전 외상으로는 싫습니다. 자. 2만5000원에 합시다. 현금으로 지불하겠습니다.”

이번엔 야마나카가 결정해야 할 차례였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68살의 골동품상이 28살의 젊은 조선인 수장가의 손을 ‘쿨’하게 잡았다.

“내가 양보하겠소. 전 선생, 축하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도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혜원의 풍속도 30점이 조선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한가지 팁. 간송이 지불한 2만5000원은 당시 서울의 8칸짜리 고급 한옥집 25채 가격이다. 지금 기준이라면 어떨까. 한채 10억원짜리 아파트라면 250억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아닌가.

■참기름병의 홀연한 등장
간송과 야마나카 상회는 2년 뒤인 1936년 또다시 불꽃튀기는 접전을 벌인다. 이번 접전은 그야말로 한편의 서사시 같다.

드라마의 시작은 1920년대초까지 올라간다.

1920년대 초 어느 날 광주리를 이고 참기름을 팔던 행상이 서울 황금정(을지로 1가)에 사는 단골 일본인 여성을 찾았다.

“시골에서 방금 짜온 참기름이라 고소해요. 4원에 사세요.”

그런데 일본인 여성의 눈에 기름을 넣은 병이 밟혔다.

참기름병으로 사용됐던 조선백자. 붉은 색, 검은 색, 푸른 색 안료로 장식한 18세기 전반의 작품이다,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 만든 백자이다.

“기름병도 참 예쁘네요. 저 병도 주세요.”

“이거! 좋은 병인데…. 그럼 1원 더 얹어주세요.”

일본 여성은 군말없이 참기름을 가득 담은 병을 구입했다. 기름 장수가 돌아가자 일본 여성은 남편에게 달려갔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남편은 골동품상(무라노·野村)이었다. 남편 무라노는 아내의 안목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에도 대단한 백자였다. 조선백자의 특징은 단순·절제미로 축약할 수 있다. 문양은 아름답지만 다양한 색채의 사용은 절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참기름을 담은 이 병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병 하나에 붉은 색 진사(辰砂)와 검은 색 철사(鐵砂), 푸른 색 청화(靑華) 등 3가지 안료를 함께 장식했으니 말이다.

높이 42.3㎝, 아가리 지름 4.1㎝, 밑 지름 13.3㎝인 이 병은 가늘고 긴 목에 풍만한 몸통과 약간 낮은 굽을 하고 있다. 굽은 선을 그은 듯이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아가리는 그대로 끊어내어 날카로운 맛이 있다. 18세기 전반경의 조선백자로 보인다.

백자의 앞뒤 면에는 국화와 난초를 그렸으며, 벌과 나비들이 노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돋을무늬로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칠했다.

“야. 당신 어떻게 이런 병을 살 수가 있지. 이 정도면 몇십원은 족히 받을 수 있을거요.”

이 병은 유약의 질이나 형태의 비례감, 그리고 세련된 문양 표현으로 보아 18세기 전반 왕실의 도자기를 굽던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이 광주 분원의 가마터에 묻혀있던 백자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참기름을 넣어 내다팔았음이 분명하다.

■1원-60원-3000원-?
똘똘한 아내 덕분에 귀한 조선백자를 단돈 1원에 얻은 무라타는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을 받고 넘겼다.
단번에 60배 남는 장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푼돈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이 백자는 스미이 다쓰오(住井辰男)라는 수집가에게 무려 600원에 팔렸으니까….

이 소식을 들은 무라타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도 약과였다. 1932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스미이가 이 백자를 포함한 수장품 180여 점을 경성구락부 경매에 출품했다.

백자는 이때 모리 고이치(森梧一)라는 수집가에게 3000원에 낙찰됐다. 10여 년 만에 1원짜리가 3000원, 즉 3000배나 뛰었던 것이다.

당시 경성의 일본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모리는 주로 조선백자를 수집하고 있었다.

원래 일본인들이 열광한 품목은 조선백자가 아니었다. 고려자기였다.

예컨대 한국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완형의 고려자기만 1000점 이상을 수집할 정도로 고려자기광이었다. 조선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일본인들의 손에는 고려인삼과 함께 고려자기가 들려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내세울만한 재력가가 아니었던 모리는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조선백자에 눈을 돌렸다.

그랬기에 수준높은 백자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다. 틈새를 잘 공략했던 것이다. 그랬던 모리가 1936년 사망하자 유품 200점이 경매에 나왔다. 일단 2~3일간 도록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어 관심있는 수집가들에게 선을 보인 뒤 경매를 진행했다.

■“저런 조선백자는 처음이야!” 
이때 간송의 경매대리인인 신보가 간송을 만난다. 신보의 손에는 도록용 사진 200점이 들려있었다.

유물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전형필은 일단 현재 심사정(1707~1769)과 겸재 정선(1676~1759)의 폭포 그림을 일단 ‘찍어’ 두었다.

그러나 전형필의 시선이 고정된 물건은 따로 있었다. 문제의 조선백자였다.

‘저런 조선백자는 처음이야. 국화와 나비는 따로 양각으로 붙였고, 풀잎은 청화, 국화는 진사와 철사 안료…. 이렇게 양각처리하고 세 가지 색을 입힌 백자는 처음이야.’

전형필과 신보의 눈이 마주쳤다. 이번 경매의 최고 화제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신보 선생, 이 백자의 예상가는 얼마요?”

“6000원인데, 아마도 더 올라갈 것 같습니다.”

1935년 도쿄 우에노에서 개최된 시대민예품석등농전람회에서 소개된 한국의 문화재 실물. 민예품 2500점, 석조물 100점, 양탄자 350점이 전시됐다.|주홍규의 논문에서

전형필은 경매가 열리기 하루전(11월21일) 경성미술구락부 전시장에서 백자를 직접 확인한 뒤 반드시 낙찰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전형필은 다른 때와 달리 직접 경매장에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인 22일 경매가 시작되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평소 직접 경매장에 나서지 않던 전형필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경매장엔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10원 단위로 치고받은 자존심 대결의 끝
전형필측은 심사정과 정선의 작품 두 점을 별 어려움없이 낙찰받았다.

이윽고 오후 경매가 시작되고 문제의 백자가 탁자 위에 올랐다.

순식간에 가격이 올라갔다.

누군가 ‘3000!’ 하자 오사카의 대수집가인 무라카미(村上)가 ‘5000!’을 불렀다. 순식간에 2000이 뛰면서 경쟁이 본격화했다.

6000-7000으로 뛰었을 때 경매사가 장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대로 낙찰이야’는 듯…. 이때 전형필의 대리인인 신보가 ‘8000’을 불렀다.

경매사가 무라카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라카미는 눈을 감았다.

“자! 8000입니다. 더 없습니까. 8000….”

경매사가 세 번 외치는 동안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경매사는 ‘8000 낙찰’을 알리는 경매봉을 쳐야 한다.

경매사가 천천히 ‘8000’을 두번째로 숨을 고르는 순간 ‘9000!’ 소리가 들렸다. 아마나카 상회였다,

그것도 순간. 곧바로 누군가 ‘1만!’을 불렀다. 전형필의 대리인인 신보였다. 그때부터 500원 단위의 싸움이 시작됐다.

‘1만500원!’ ‘1만1000원!’ ‘1만1500원!….’

순식간에 ‘1만4500’이 되었다. 어느새 호가가 10원 단위로 올라갔다. 자존심 싸움으로 바뀌었다.

1만4510, 1만4520, 1만4530…. 신보가 ‘1만4580!’을 불렀다. 그리곤 전형필을 힐끗 바라보았다. 전형필은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더 응찰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야마나카 상회측이 순간 침묵에 빠졌다. 야마나카는 수집가가 아니라 골동품상이었다. 마냥 자존심 싸움을 펼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문을 남기고 팔아야 할 골동품상인데 가격을 잘못 올려놓았다가 손해를 보면 어쩌란 말인가. 야마나카 상회측은 경매사가 ‘1만4580’을 세 번 부를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전형필의 극적인 역전승
전형필과 야마나카 사이에 펼쳐진 조선백자 경매사상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전형필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낙찰받은 조선백자는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라는 긴 이름이 붙었다.

이 백자는 보물(제214호)로 지정됐다가 국보(제294호)로 등급이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전형필이 거대자본 야마나카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액수(1만4580원)은 당시 기와집 15채 가격이었다.

간송 전형필은 야마나카(야마나카 상회)와의 조우에서 국보 2점(혜원 풍속도와 조선백자)을 얻었다.

다만 첫번째 만남에서 가치에 비해 비싼 가격으로 사들인 석조물을 감안하면 어떨까. 간송과 야마나카의 3차례 맞대결 성적은 ‘간송의 2승1패 승리’라 할 수 있다.

■야마나카 상회가 내다판 문화재 목록 
최근 야마나카 상회가 조선의 석물과 도자기들을 반출해서 판매한 도록사진과 관련기록들을 정리한 논문이 나왔다.

주홍규 중원대 강사가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학술지 <한국학논총>에 실은 ‘야마나카 상회와 일본으로 유출된 한국문화재’ 논문이다.

필자는 이 논문이 나온 김에 간송 전형필과 야마나카 상회의 3차례 맞대결 사례를 찾아본 것이다.

주홍규씨의 논문이 밝힌대로 야마나카 상회는 여러차례 전람회를 개최하면서 엄청난 조선 문화재를 서구와 일본에 반출했다.

이 논문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석물과 도자기 등 반출 문화재의 전시도록 사진 100여 점을 소개했다.

이 새로운 자료는 구입 경위가 불투명한 반출문화재의 환수에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일본 등지에 흩어져있는 사설미술관 및 박물관의 석조물 컬렉션과 논문의 반출품 목록과 이미지들을 비교조사를 벌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 순간 간송 전형필의 기개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충렬, <간송 전형필>, 김영사, 2010
주홍규, ‘야마나카 상회와 일본으로 유출된 한국 문화재’, <한국학논총>,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17
정규홍, <우리 문화재 반출사>, 학연문화사, 2012
정수형, ‘보스턴미술관 한국미술품 소장사’, <미술자료> 제84호, 국립중앙박물관, 2014
황수영,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이구열, <한국문화재수난사>, 돌베개,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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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