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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간신과 혼군은 영원한 콤비다

얼마 전 여권에서 간신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한번 간신은 영원한 간신이니, 비루한 간신이니, 입안의 혀처럼 구는 간신이니하는 사나운 말이 나왔습니다. 이왕 간신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간신에 담긴 모든 사연을 한번 담아보겠습니다. 살펴보니 간신이라는 낱말과 세트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혼군(암군) 혹은 폭군입니다. 간신과 혼군(암군, 폭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고려사>를 쓴 편찬자들은 간신열전을 집필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간신이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현명한 임금이 있으면 간신들이 술수를 부릴 수 없었다. 한때 개원지치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당 현종은 명재상 한휴의 존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휴 때문에 백성은 살찌고, 나는 두 다리 뻗고 잠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자명합니다. 만약 지도자가 지금 이 순간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국사를 걱정한다면 주변에 간신이 득실거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기환의 팟캐스트 83회 주제는 간신과 혼군은 영원한 콤비입니다.

 

김종서·정인지·이선제 등이 편찬한 <고려사>를 읽으면 특이한 ‘열전’이 하나 눈에 띈다. ‘간신열전’이다. 그런데 ‘간신열전’의 서문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세상에 간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世未嘗無姦臣也) 다만 현명한 임금이 그들을 적절히 부림으로써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어나갔기 때문에 멋대로 술수를 부릴 수 없었다.(惟人主明 以照之而馭之 得其道 故不得騁其術). 만약 임금이 한번 간신의 술수에 빠지면 나라는 거의 패망에 이르렀다.”
즉 ‘간신’이라는 존재는 그 어느 때나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 그러나 아무리 간신이 똬리를 틀어도 군주만 똑똑하면 절대 술수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간신과 혼군(폭군)은 몸과 그림자,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떼래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두 얼굴의 사나이 당 현종
‘두 얼굴의 사나이’인 당나라 현종의 예에서 살펴보자.
흔히 당 현종(재위 712∼756)의 초기치세를 ‘개원지치(開元之治·713~741)’라 한다. 한휴·요숭·송경·장열·장구령 같은 명재상들을 등용,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그 가운데 재상 한휴(672~739)와의 일화가 인구에 회자된다. 현종은 한휴의 등쌀에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는 감놔라배놔라 하는 것이 귀찮았다.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좀 늦겠다 싶으면 전전긍긍했다.
“아! 저 놈의 한휴가 알면 어쩌지.”
한휴가 하도 “폐하 뭐하십니까. 황제가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하고 윽박지르기 일쑤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보다못한 측근이 현종에게 한마디 고했다.
“도대체 한휴가 재상이 되고서 폐하께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사옵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시면서 왜 내치지 않으십니까.”

<고려사> '간신열전' 서문. 간신열전을 쓰는 이유를 밝혀놓았다. 세상에 간신이 없었던 적은 없지만 현군이 있다면 간신의 발호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종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닐세. 나는 말랐지만 백성들은 살찌지 않았는가. 모든 일을 내 뜻대로 할 때는 걱정이 태산 같았네. 밤에 자리에 누워 천하를 생각하면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지. 그런데 한휴가 재상이 되자 내 앞에서 솔직하고 딱 부러지게 바른 소리를 하지 않는가. 그것 때문에 내가 비쩍 마르지만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간신들이 주위에 가득하면 임금은 밤잠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현종은 알았던 것이다.(<구당서> ‘한휴전’ 등)

■“이 배에는 폐하를 향한 일편단심이 들어있사옵니다.”
그런데 741년 연호를 ‘개원’에서 ‘천보(天寶)’로 바꾸고 난 후, 즉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달라진다.
서서히 총기를 잃어간 것이다. 역사는 현종 말년의 어지러운 치세를 ‘천보난치(天寶亂治)’라 일컫는다. 현종은 도교에 빠져 국고를 탕진했고, 며느리이자 35살이나 연하인 양귀비를 총애하면서 정사를 사실상 포기했다. 결정적인 실착은 이임보와 양국충, 안록산 같은 간신들을 총애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종이 안록산의 뚱뚱한 배를 보고 주고 받았다는 농담이 지금도 회자된다.
“대체 그대 뱃속엔 대체 무엇이 들었소?”
안록산의 대답이 걸작이다.
“예, 폐하를 위한 일편단심이 가득차 있을 따름이옵니다.(唯赤心耳)” 
“그래? 하하하.”
이 오글거리는 아부에 넋이 나간 현종은 안록산을 당나라의 ‘대들보’라 일컫고, 양귀비에게 ‘양아들로 삼으라’고 명했다.
결과는 비참했다. 755년 안록산이 이끄는 15만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장안으로 진격했다. 현종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채 줄행랑 쳤다. 줄행랑 도중에 어느 백발노인이 처량한 신세가 된 현종의 수레난간을 부여잡고 혀를 끌끌 찼다.
“예전에 어진 이들이 재상일 때는 폐하가 바른 말을 다 받아들였기에 천하가 태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에 현명한 신하는 없고, 간신 아첨배들만 득실거립니다. 폐하는 황궁 밖의 일을 들을 수 없습니다.”
현종은 피눈물을 흘리며 “내가 어리석었다”고 장탄식했지만 그것은 버스 지나간 다음에 손흔드는 격이었다.(<당서> ‘안록산전’) 

 

■아첨과 직언의 차이
그랬다. 현종이라는 ‘사람’은 처음이나 끝이나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개원지치의 현종에게는 충(양)신이, 천보난치의 현종에게는 간(난)신이 꼬였다는 것이 다르다.
무슨 말인가. 임금이 현명하냐 어리석냐에 따라 충신이 간신이 되고, 간신이 충신이 된다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간신이 꼬이느냐. 충신이 꼬이느냐는 다 지도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북제-수-당나라 등 3개 왕조에서 벼슬을 한 배구(557~627)라는 인물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겠다. 배구는 북제가 망하자 수나라에서 벼슬했다. 수양제에 아첨해서 신임을 받고는 우문술(宇文述·?~616) 등 5명과 국정을 농단했다. 그러던 배구는 618년 우문술의 반란이 실패한 뒤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런데 수나라에서는 간신이었던 배구가 당나라에 가서는 180도 달라졌다. 배구는 당 태종에게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라”는 등 충언을 서슴치 않았다. 달라진 배구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이 한결 같아야지 말야. 왕조가 바뀌고, 임금이 달라졌다고 그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나.”
사람들의 평판도 일리는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충신이라면 어리석고 포악한 군주 앞에서도 ‘죽을 각오’로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아야 했으니까…. 그러나 <당서> ‘배구열전’을 쓴 역사가의 평가는 흥미롭다.
“군주가 직언을 싫어하면 충성이 아첨으로 변한다. 군주가 직언을 즐거워하면 아첨이 충성으로 변한다. 임금은 형체이고 신하는 그림자다. 형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뜻인가. 모든 허물은 평소 직언을 좋아하지 않은 수 양제 탓이지, 배구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황제는 마음껏 즐기세요
북제(550~577)의 간신 화사개(524~571)를 보라. 황제(무성제·재위 561~565)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 좋다는게 뭡니까. 마음껏 쾌락을 즐기세요. 나랏일은 대신들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황제는 정사를 화사개에게 맡기고는 음탕한 짓거리에 푹 빠졌다. 나라는 곧 멸망했다.(<북제서> ‘화사개전’ 등)
송나라 휘종 때 왕조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간신 가문인 채경(1047~1126)부자는 황제의 귀에 속삭였다.
“인생이란 사해가 내 집이요. 태평을 즐겨야 하거늘 세월이 얼마나 남았다고 고생을 한단 말입니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휘종은 방대한 토목공사에 빠졌고, 기이한 물건을 깡그리 모았으며, 가무와 여색, 심지어는 개사육과 승마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결국 휘종은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남았다. <송사> ‘휘종기’가 밝힌 송나라 멸망의 원인은 이거다.
“휘종이 나라를 잃은 까닭은 한가지다. 정직한 인물을 배척하고 간신 아첨배를 가까이 했다. 채경이 간사한 재주로 황제의 사치스럽고, 음탕한 뜻을 부채질했다.”

 

■아들까지 삶아 바친 춘추시대 셰프
군주의 총애를 받기위한 간신들의 몸부림은 상상을 초월했다.
예컨대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재위 기원전 685~643) 시대의 간신 역아를 보라. 역아는 임금의 전담 요리사였다. 요즘으로 치면 ‘셰프’라 해야겠다. 그런데 어느 날 환공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네가 안 먹어본 고기가 없는데…. 사람 고기는 먹어보지 못했구나.”
농담으로 뱉은 이 말이 파국을 불렀다. 역아가 자신의 3살 짜리 아들을 죽여 요리를 만들어 바친 것이다. 환공은 역아가 자기 자식보다 임금을 더 아낀다는 생각을 품고 더욱 총애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어찌 됐을까. 사실 환공은 치세 초기엔 명재상인 관중과 포숙아를 등용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춘추5패로까지 운위됐다. 하지만 말년의 신세는 비참했다. 간신 역아와 수조를 기용하는 바람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환공은 결국 구중 깊숙한 곳에 유폐돼 굶어죽는 신세가 됐다.(<사기> ‘제태공세가’)
굳이 중국역사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조선의 대표간신인 임사홍(1445~1506) 역시 제환공 때의 역아를 방불케했다.
어느날 연산군이 임사홍의 둘째아들인 임희재가 쓴 글을 보고 화를 벌컥 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祖舜宗堯自太平)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秦皇何事苦蒼生) 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不知禍起所墻內)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虛築防胡萬里城)”
임희재가 진시황을 비판했지만 실제론 연산군을 빗댄 것이다. 연산군은 임사홍에게 넌지시 말했다.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연려실기술> ‘연산조 고사본말’)
임사홍은 “죽어 마땅하다”고 답했다. 결국 임희재는 처형됐다. 자기 아들을 삶아죽인 역아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송나라 충신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조각된 희대의 간신 진회 부부상.

■“난 귀여울 따름인데…”
이렇게 역사가 증명해주듯 간신이 발호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매한 군주 때문이다. 어리석은 군주는 절대 간신과 충신을 구별하지 못한다.
당나라 덕종(779~805) 시대의 간신 중에 노기(盧杞)라는 인물이 있었다. 성격이 음험하고 시기심이 많아 자기 뜻에 맞지 않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렇지만 덕종은 노기를 무척 귀여워했다. 어느 날 덕종이 이면(李勉)이라는 사람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사람들은 모두 노기가 간사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노기가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귀여울 따름이다. 경은 왜 그러는지 알겠는가.”
그러자 이면은 ‘정말 모르겠냐’는 듯 확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노기의 간사함을 알고 있습니다. 유독 폐하만은 모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간사하다는 증거입니다.(天下皆知其姦邪 獨陛下不知 所以爲姦邪也)”
천하사람들은 이면의 답변을 듣고 손벽을 쳤지만 덕종은 이면을 멀리 했다.(<구당서> ‘이면전’)

 

■간신과 충신 사이….
그렇다. 간신이냐 충신이냐는 구별해야 하는 이는 바로 군주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아첨을 좋아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하고 간쟁을 좋아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을 쓸 때는 반드시 이 점을 살피라고 주문한다.(<목민심서> ‘이전·용인’)
다산은 바른 말을 하는 신하라야 군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윗사람은 반드시 이런 이치를 알아야 한다고 딱잘라 말한 것이다.
성호 이익(1681~1763)도 “바른 말을 하고 극진하게 간언하는 신하야말로 국화(國華·나라의 권위와 위엄)”라고 했다.(<성호사설> ‘인사·직언이국’)
물론 역대로 성군이나 명군이니 하는 군주는 간신과 충신을 구별할 줄 알았다.
예컨대 성군의 대명사인 당 태종이 궁중을 산책하다가 나무 앞에서 “이 나무 정말 좋구나!”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자 우문사급이라는 시종(수행비서)가 얼른 옆으로 다가와 그 나무를 칭찬했다. 이 때 태종이 안색을 바꿨다.
“아니 위징(태종 때의 충신)이 늘 짐에게 아첨배를 멀리 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자가 아첨배인 줄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구나.”(<신당서>)

 

■복지부동하는 자도 간신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군주가 어리석으면 신하는 어두워지고, 군주가 직언을 좋아하면 신하는 충신(양신)이 된다.
<신당서> ‘혹리열전’은 “관리가 가혹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가혹함을 유혹하는 것”이라 했다. 간신은 똬리를 틀고 있다가 어지러운 군주를 만나면 슬슬 본색을 드러낸다. 나쁜 짓을 일삼는 이른바 ‘적극적인 간신’만이 간신은 아니다. 국록만 축내고 군주와 백성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신하 역시 간신이다.
예컨대 <신당서>는 재상자리에 10년 넘게 있으면서 ‘의견도 올리지 않았고, 황제의 뜻도 거스른 적이 없는’ 양재사(?~709)를 ‘간신전’에 포함시켰다. 황제의 안색만 살피며 쩔쩔매는 양재사를 보고 어떤 이가 “왜 그리 굽신대기만 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양재사는 이렇게 답했다.
“정치가 어지러울 때는 곧은 자가 먼저 화를 당한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어찌 내 한 몸을 보전하겠는가.”
역사는 이렇게 그저 제 한 목숨 부지하는데 그친 양재사를 거리낌없이 ‘간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가혹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이 역사의 포폄이다. 

 

■간신 조상이 부끄럽다 
아닌게 아니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간신’이라는 역사의 평가를 받아서는 절대 안된다. 후손이 부끄러워 지기 때문이다.
청나라 건륭제(1736~1795) 연간에 진간천(秦澗泉)이란 인물이 장원급제의 영예를 안았다. 그런 그가 송나라 때 충신 악비의 무덤(악왕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희대의 간신 진회(1090~1555)의 부부상을 보며 참담한 시 한수를 남겼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라는 이름을 부끄러워 했고, 나는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진’이라는 성에 참담해 하는구나.”
희대의 간신 진회는 간신의 반열에 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진회는 역사를 멋대로 바꿔 실록을 날조하려 했고, 문자옥(文字獄·필화사건)을 일으켜 역사가의 직필을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더러운 간신의 이름은 결코 지울 수 없었다. 후세사람들은 진회가 재상이 된 이후의 기록을 ‘간신의 기록’으로 치부했다.(<취진록> ‘후록’)
그 결과 600년 후의 후손조차 간신인 조상의 이름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던 것이다.

 

■나라를 망치는 것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
자고로 간신은 나라를 좀먹는 벌레였다. <송사> ‘유일지전’은 “군자가 여럿 모여도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지만 나라를 망치는 것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고 했다. 간신이 얼마나 암적인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역경>은 “나라를 창업하고 집안을 잇는 데는 소인을 써서는 안된다”고 했다.
<삼국연의> ‘제갈량 매사왕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썩어빠진 관리들이 금수처럼 녹봉만 축내고 있다. 이리와 개같은 무리들이 도를 행한답시고 굴러다니고 노예와 같은 비굴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정치를 주무르고 있다.”

이 대목에서 집권 초기, 즉 성군 시절의 당 현종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내 멋대로 할 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한휴 같은 재상이 있으니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만약 지도자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라면 어떨까. 주변에 간신이 득실거린다는 이야기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김영수 편역, <간신론>, 아이필드, 2003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추수밭, 2009

최용범, 함규진,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김광철, '고려사 간신열전 소재인물에 대한 분석', 마산대 논문집 제3집,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