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정조 24년) 음 3월21일과 22일 서울은 수능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일을 방불케하는 시험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21일에는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인 경과(慶試·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치르는 과거) 초시가, 22일에는 춘당대에서 인일제(人日製·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특별과거)가 잇달아 열렸다. 


■21만1000명 중 단 10~12명만 뽑혔다. 

“21일의 경과(초시)는 3곳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총 응시자는 11만1838명에 달했고, 시권(답안지)를 바친 자는 모두 3만8614명이었다. 과거 역사상 관광인(觀光人)이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다. ~인일제는 바로 경과의 다음날에 실시했는데, 과거응시자는 모두 10만 3579명이었고, 시권을 바친 자는 3만 2884명이었다…”(<정조실록> <홍재전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기록된 1800년 3월21~22일의 특별과거.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했다. 이릍간 치른 시험에 무려 21만명이 응시했다. 

문헌에 기록된 이틀간의 응시자수는 21만5417명에 이른다. 이중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생만 해도 7만1498명에 이르렀다. 이 뿐이 아니다. 이것은 문과 응시생만의 통계이다. 따로 뽑은 무과 응시생은 3만5891명에 달했다. 문·무과를 합하면 28만6915명이다.

궁금증이 든다. 정조는 왜 이틀 연속으로 각 차마다 10만명이 넘는 시험을 치렀을까. 

원래 정조가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맞이 기획한 특별과거는 경과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10만명이 넘는 응시자가 경과에 지원하자 ‘한번 더’의 시험을 치렀는데, 그것이 바로 인일제였다. 인일제는 원래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보인 특별 과거였다. 

원래 인일제에서 상위 3등까지는 곧바로 과거(대과) 합격의 영예를 내렸다.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정조가 치르도록 명령한 1800년 3월22일의 인일제는 성균관 유생 뿐 아니라 ‘경과’ 응시를 위해 상경한 경향 각지의 유생들에게 문호를 한번 더 열어준 추가시험의 성격이 짙다”고 전했다.

조선시대 후기 한 지역에서 열린 19세기 과거시험장 풍경이다. 옹기종기 모여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타락한 과거시험장의 모습이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 가운데 두번째 날인 인일제에서 장원급제한 이는 서울의 유학 김수종과 호서의 유학 이남익 등 단 2사람이었다. 이들에게는 임금 앞에서 최종 평가를 받는 전시에 참여할 자격을 주었다. 두 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증을 받은 셈이다. 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은 그저 최종합격자들을 대상으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이다. 당락과는 관계없다. 인일제에서는 이 두 사람 외에 차점자 100명에게 경과 초시 합격증을 추가로 발급했다. 결국 인일제 급제자 2명은 대과 급제자의 명단에 올랐고, 하루전 치른 경과 초시 합격자 1000명과 인일제 차점자 100명 등 1100명은 다시 본시험을 치렀다. <정조실록>은 “정조는 이때의 경과에서 10명을 급제자로 뽑으라”는 명을 내렸다. 새삼 따져보면 어마어마한 경쟁률이다. 문과만 계산해도 이틀간 21여 만 명이 치른 과거시험에서 단 ‘12명’(익일제 급제자 2명 포함)의 합격자를 냈다. 경쟁률이 얼마인가. 자그만치 1만8000대 1이 아닌가.


■시험의 나라 ‘조선’

그러고보면 조선은 가히 시험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35살 내외였는데, 보통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시험을 치러야 겨우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시험만 5차례 거쳐야 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됐다. 수험생들은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예비시험인 소과의 경우 초시(1400명 선발)를 거쳐 복시를 통과한 200명이 생원(100명)·진사(100명)가 됐다. 생원·진사가 돼야 본시험인 대과(문과)를 치를 수 있었다. 대과 역시 1차시험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했고, 다시 이 240명이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4차례의 시험에서 뽑힌 33명의 과거급제자가 꿈에 그리던 문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자이다. 3년에 한번씩 불과 33명을 뽑는 행정고시라면 어떤가. 당대의 공시생들이 감당할 수 없는 바늘구멍 고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합격자 33명에게는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임금 앞에서 치러야 하는 전시(殿試)이다. 33명을 대상으로 치르는 이 전시는 당락을 가르지는 않는다. 임금이 직접 출제한 시험문제로 임금 앞에서 33명의 등수를 가릴 뿐이다.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순으로 매겼으며 1등 합격자는 당연히 장원급제자로 일컬어졌다. 이 시험을 책문(策文)이라 한다. 종이가 없던 시절 대나무 조각(죽간·策)에 문제를 써서 응시자에게 주면(策問) 응시자가 이에 대한(對) 생각을 적은 대나무(策)을 제출했다. 이것이 요즘 우리가 말하는 대책(對策)이다.

비록 책문이 당락을 결정하지 않지만 합격자의 등수는 향후 관직생활에서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 즉 갑과 1등인 장원급제자는 곧바로 종 6품에 제수됐다. 종 9품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 다른 급제자보다 적어도 7년 이상 앞서 나가는 셈이 된다. 게다가 장원급제자 및 갑과 합격자는 이조·병조·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핵심권력기관인 이른바 청요직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자세히 진술하라. 내가 직접 볼 것이다”

따라서 책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지치 않은 시험이었다. 책문은 이처럼 과거의 마지막 관문인 전시에서도 출제됐지만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출제됐다. 또 관리들이 매달 치러야 했던 월과(月課)의 주제로도 활용됐다. 예컨대 중흥군주인 정조는 자신이 직접 양성하는 초계문신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책문을 실시했다.

소과시험 당일 아침 과거시험장 앞에서 모의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담은 김홍도의 그림이다. 김홍도의 평생도에 포함된 작품이다. 문장이 능숙한 자를 거벽, 글씨에 능숙한 자를 사수라 이르며, 자리와 우산 등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이라 하며, 수종 중에 천한 자를 노유라 한다., 노유 중에 맨 앞자리를 맡는 자를 선접이라 한다. |성균관대박물관의 제37회 기획전 ‘시험형 인간’(9월14~12월28일) 도록에서

책문은 주로 왕조가 당면한 현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고 대답하는 글이다. 요즘의 논술시험에 비견된다. 하지만 최종독자가 다름아닌 임금이며, 그 임금이 직접 채점하는 것이니만큼 책문의 무게를 논술시험과 비교할 수 없다. 임금이 기존 정치의 타성을 벗으려고 막 새출발하는 젊은 피의 톡톡 튀는 정책대안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형식은 자못 비장하다. 책문은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王若曰)”면서 긴 글로 출제의도와 글제를 발표한다. 그러면서 “자세히 진술하라. 내가 친히 볼 것이다(其悉陣之 予將親覽焉)”라 했다. 그러면 응답자들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라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하면서 답안지를 시작한다. 마지막에는 “다시 한번 보잘 것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하고 두렵지만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드린다”면서 “신이 삼가(臣謹對) 대답합니다”라고 마무리 짓는다. 

 상투적인 표현과 형식이 난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책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관직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피의 개성과 능력, 정치적인 포부가 넘쳐흐른다. 임금을 향한 갖가지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기어코 할 말은 다 한다. 


정조는 1796년(정조 20년) 11월18일 초계문신들에게 참으로 기막힌 책문을 냈다. 이름하여 ‘담배(남령초)의 이로움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논술고사와는 비교할 수 없다 

책문의 내용을 보면 주로 정치·사회·군사·국제 등 복잡하고 시급한 정치현안의 문제를 다룬다. 대책은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명종의 질문(1542년 증광문과)에 “진리를 탐구하고 소인을 가려애야 한다”(노진·1518~1578)의 대책과,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이냐”는 세종의 책문(1447년 문과중시)에 “역사 사례에서 배우라”(성삼문·1418~1456), “언로를 열어 직언을 들으셔야 한다”(신숙주·1417~1475), “깃털처럼 보잘것 없는 의견도 들어야 한다”(이석형·1415~1477) 등이 대표적이다. 

‘인재를 어찌 구할 것인가’(세종),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느냐’(중종), ‘위기에 빠진 이 나라를 주게하려면 어찌 하느냐’(광해군), ‘정벌이냐 화친이냐’(선조) 등이 조선조 임금들이 낸 질문이다.

그러나 책문의 독자가 임금인 이상 임금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어찌되겠는가. 임금이 제 아무리 “기탄없이 자네의 포부를 펼쳐보이라” 해도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표현과 형식의 글을 제출하거나 때로는 임금과 임금 측근의 인사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면 횡액을 당하기도 했다.


■세조가 답안지를 집어던진 이유

심지어 답안지의 서체 문제로 합격이 취소된 사례도 있다. 즉 1482년(성종 13년)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4등으로 급제한 신종호의 답안지가 해서인 휘갈겨 쓴 초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불합격 처리됐다. 일부 응시자들은 천편일률적인 유교적 문장 대신 톡톡 튀는 표현을 써서 채점관의 눈에 들려고 애썼다. 예컨대 1468년(세조 14년) 세조는 문과에서 최종합격한 5명의 대책 중 최호원(1431~?)의 답안을 읽고는 “이 대책을 누가 뽑았느냐”고 화를 벌컥 내면서 땅에 던져버렸다. 최호원이 대책에 결코 인용해서는 안될 ‘음양서(천문·역수·복서)’ 내용을 가미했기 때문이었다. 또 채점관의 눈에 들기 위해 즐겨 인용한 고전은 <장자>였다.

정조의 책문에 대해 초계문신 이면승은 “담배가 인삼이나 술, 음식보다 월등한 공덕을 지녀 득만 있고, 실은 없다”면서 정조의 출제의도에 ‘깔맞춤 모범답안’을 제출했다. 정조의 ‘남령초’ 책문에 이면승이 제출한 대책은 이면승의 <감은편>에 실여있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1600년(선조 33년) 선조가 과거합격자 33명의 등수를 매기기 위해 치른 전시 답안지를 보고는 이함이라는 인물의 합격을 취소하고 과거응시 일시 정지라는 철퇴를 내렸다. <장자>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왜 과거답안에 <장자> 인용을 금기시했을까.

<장자>는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도 세상을 풍자화는 우언 화법으로 유명하다. 과거 답안 중 가장 긴 장르(1000여자)인 책문에서 채점자의 주목을 끌려면 착상의 기발함이 요구됐다. 천편일률적인 유교경전보다는 낯설고 참신한 문장, 즉 <장자>의 어법이 변별력을 끌어내는데는 적격이었다. “장자의 우언은 허구의 이야기를 빙자해서 자신의 감정을 비유했다”(사마천의 <사기>)고 하지 않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대책은 시대의 폐단이나 임금의 실책을 지적하면서도 이른바 ‘역린’을 건드리면 안되었다. 그런 면에서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도 문득 임금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장자의 어법은 책문작성에 애용됐다.  

 문체반정을 선포한 정조는 책문에 자주 등장하는 패관소품의 표현을 맹비판했다.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성균관 유생 이옥(1760~1815)은 물론 문신인 남공철(1760~1840)의 책문이 패관소품, 즉 민간 야사와 소설류의 필치를 사용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정조는 특히 세손 시절의 스승인 남유용(1698~1763)의 아들인 남공철에게 배신감을 느낀 것 같다. “이옥이야 일개 유생이라 그렇다 치자. 그러나 남공철이 누구의 아들인가. 과인은 스승인 남유용의 문체를 존경했는데 그 아들이라는 작자가…”라 하면서 남공철의 직함(지제교)을 떼버렸다.


■시험답안지가 일으킨 필화 

내용이 필화를 일으킨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예컨대 1534년(중종 29년) 시행된 과거 시험의 책문 글제는 ‘예양(禮讓)을 높이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에 나세찬(1498~1551)은 “조정은 길을 함께 하는 자끼리 붕당을 만들어 배척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어떻게 잘 다스려지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지금 조정의 인심은 몇억만으로 갈라졌는지 모른다. 한직에서 원망을 품고 있는 자들이 뒷날 분란의 불씨가 된다”는 대책을 올렸다. 그러나 당대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김안로(1481~1537)는 이 대책문이 자신을 겨냥한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문제삼았다.

나세찬은 이 사건으로 40여일이나 갇혀있으면서 총 6차례나 고문을 곁들인 심문을 당했다. 나세찬은 “전혀 숨은 의도가 없었다”고 호소했지만 곤장 100대에 원지 부처되는 것으로 일단 봉합됐다. 중종은 “그래도 글 짓다가 생긴 일로 죄를 줄 수 없다”고 목숨만은 살렸다. 나세찬 사건은 김안로가 죽은 1537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김안로다.

결국 나세찬은 예문관 응교시절인 1538년(중종 33년) 문무 현직 관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탁영시에서 장원급제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아닐 수 없다. 

1611년 광해군의 책문에 임숙영은 “전하가 나라의 진짜 우환과 조정의 병폐에 대해서는 문제를 내지 않았다”면서 “왜 마땅히 내야할 문제를 내지 않는 것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 자의 임금이 된 자는 너무 괴롭지 않은가’

책문이 필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광해군대의 인물인 임숙영(1576~1623)이었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년) 3월 실시한 별시의 전시에 ‘지금 나라의 기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냐’는 제목의 시험을 냈다.

그런데 당시 36살의 나이에 급제한 임숙영의 대책이 파문을 일으켰다. 임숙영은 먼저 “전하가 나라의 진짜 우환과 조정의 병폐에 대해서는 문제를 내지 않았다”면서 “왜 마땅히 내야할 문제를 내지 않는 것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임금이 하루라도 자기 역할을 생각하지 않으면 덕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밖에서는 외척을 빙자해 위세를 떨치고 안에서는 왕비나 후궁의 세력을 끼고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임숙영의 칼날은 척족의 횡포와 함께 임금의 생모인 공빈 김씨에게 왕후의 존호를 올리려 한 이이첨(1560~1623)을 겨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책문의 주제를 하나로 좁히자면 “나라의 병폐는 왕 당신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광해군은 임숙영을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명한다. 이것이 삭과파동이다. 광해군은 “임숙영의 답안을 보니 주제에 벗어나 오로지 임금을 능멸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으니 너무 무례하다”고 비판했다. 광해군의 덧붙인 한마디가 재미있다.

“임숙영의 임금된 자(광해군)가 너무도 괴롭지 않겠는가.”  

이에 삼사(홍문과·사헌부·사간원)는 물론 재야에서도 임숙영 삭과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가 빗발친다. 영의정인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 등도 삭과의 부당성을 논변하고 나섰다. 결국 광해군은 “두 정승의 청을 받아들여 과인의 명을 접는다”고 뜻을 굽혔다.

그러나 광해군은 “주제에 벗어난 답안의 폐단이 적지 않다”면서 “게다가 응시자가 출제자의 문제와 상관없는 답안을 미리 지어오는 폐단을 키워서는 안되니 다음부터는 결코 뽑지 말아야 한다”고 밝힌다.(<광해군일기>)

이명한의 <백주집>. 광해군의 ‘나이듬의 서글픔에 대해 논하라’는 책문에 이명한은 ‘사람은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세월은 사람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답안지를 냈다. 

■엉뚱한 곳에 옮겨붙은 불똥 

가만 보면 광해군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출제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대책을 미리 생각했다가 짓는 행위 또한 정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임숙영 삭과파동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1612년(광해군 4년)당대의 시인인 권필(1569~1612)이 이 무렵 지은 ‘궁류(宮柳)’라는 시가 또 필화를 일으켰다. 

“궁궐 버들은 파릇파릇하고 꾀꼬리 이리저리 나는데(宮柳靑靑鶯亂飛) 온 성안의 벼슬아치 봄빛에 재롱부리는구나.(滿城冠蓋媚春輝) 조정에는 태평의 즐거움을 함께 축하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위태로운 말이 포의에서 나오게 했는고.(誰使危言出布衣)”

시의 제목인 궁류(宮柳)는 광해군의 부인인 유씨(1576~1623)와 처남인 유희분(1564~1623)·유희발(1568~1623) 형제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파릇파릇하다’는 ‘권세가 극성스럽다’는 뜻이고, ‘봄빛’은 ‘광해군’을 일컬으며, ‘재롱 떤다’는 ‘화려한 관을 쓴 벼슬아치들이 온통 권세에 아첨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권필은 이덕형·이항복 등 재상들의 청원으로 죽음만은 면하고 유배형의 처결을 받았다. 그러나 몸이 원체 허약했던 권필은 매우 혹독한 곤장을 맞아 들것에 실려 도성문을 나간 뒤 장독(杖毒)이 퍼져 죽고 말았다.


■광해군의 센치한 시험문제

지긋지긋한 삭과 파동에 질린 탓일까. 광해군은 1616년(광해군 8년) 치러진 증광회시에서 낸 책문, 시험문제가 걸작이다.

‘섣달 그믐밤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광해문의 책문을 한번 보라.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우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센티멘탈리스트로서의 광해군이 아닌가. 무엇보다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현안을 예상문제로 뽑아 잔뜩 외우고 공부했을 수험생이라면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혹시 ‘임숙영 삭과파동’을 떠올린 광해군이 수험생들에게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글제를 내린 것은 아닐까. 주제와 상관없이 임금에게 직언을 해대는 젊은 급제자들이 딴소리 하지 못하도록 의표를 찌른 것은 아닐까. 

임금의 글제를 받아든 급제자들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으리라. 그러나 광해군의 쉽지만 대답하기 까다로운 이 글제에 제대로 대답한 이가 있었다.

학봉 김성일의 <학봉속집>에 나오는 퇴계 이황의 일화. 퇴계도 과거에서 3번이나 낙방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퇴계는 “24세 때 연이어 세 차례나 낙방하였어도 낙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퇴계는 “때때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까닭에 욕을 당한다고 생각해서 잠간 과거 급제와 낙방에 관심을 가졌다”면서 “과거가 사람을 동요하게 하는 것이 몹시 두려워할만하니 그대들은 경게하라“고 했다. 과거에 세번 낙방한 퇴계는 훗날 조선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 됐다.

바로 당대의 시인이자 문인인 이명한(1595~1645)이다. 이명한은 당대 한문 사대가의 한사람인 아버지 이정구(1564~1635), 아들 이일상(1612~1666)과 함께 ‘대제학 3대’를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명한은 광해군의 문제에 일단 “뜬구름 같은 인생이 어찌 이리도 쉽게 늙는다는 말이냐”고 광해군의 심중에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나 이명한은 “인생이란 부싯돌의 불처럼 짧고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인생이 무상함을 지적한다. 이명한은 “유독 섣달 그믐날 밤을 지새우는 이유는 지나가는 세월이 안타까워서…”라 한다.

“밤이 새도록 자지 않는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흥에겨워서가 아닙니다. 묵은 해의 남은 빛이 아쉬워서 아침까지 앉아있는 것이요, 날이 밝아오면 더 늙는 것이 슬퍼서 술에 취해 근심을 잊는 것입니다.”


■‘세월은 사람이 지나감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명한의 한마디 결론은 촌철살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이명한은 광해군이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을 논하라’고 하자 “세월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것”이라는 답안을 제출했다.(然則人能傷歲 歲不傷人)”(<백주집> ‘잡저’)

답안지의 말미엔 “죽을 때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칭송받을 일을 하지 못함을 성인은 싫어했다”면서 “일평생 학문에 힘써 밤 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 곳에 모으자”고 했다.

“그렇게 사색하고 공부하게 되면 늙는 것도 모른채 때가 되면 순순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럴 경우 무슨 유감이 남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대책을 만 21살 파릇파릇한 청년 이명한이 제출했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꿰뚫은 성인군자 같은 답안지가 아닌가.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도 불세출의 답안을 제출한 이명한의 책문은 1등이 아니라 2등의 성적을 얻었다. 그렇다면 장원급제한 답안지는 과연 어떠했단 말인가. 

조선 중기 과거급제자의 명단. 과거급제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과거는 보통 5살 때부터 시작했다. 과거급제의 평균나이는 대략 35살 안팎이었다. 30년을 줄기차게 공부해야 성공할 수 있었다.  

■정조의 황당한 책문, “조선을 골초의 나라로 만들 방안을 모색해보라”

광해군이 ‘한 해가 저물어감의 서글픔’을 글제로 냈다면, 정조는 해괴한 책문을 제시했다.

정조는 37살 이하의 젊은 문신 중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서 따로 관리한 이른바 초계문신 제도를 두었다. 정조는 수시로 초계문신들에게 책문을 내려 성적을 가렸다. 그런 정조가 1796년(정조 20년) 11월18일 낸 책문이 지금 기준으로는 요절복통이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요컨대 ‘조선을 골초의 나라로 만들 대책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정조는 아예 실사구시의 예로 담배를 고 있다. 

“난 수십년간 책을 읽는 고질병에 시달려 가슴 속이 언제나 꽉 막혀 있었다. 백방으로 약을 썼지만, 담배만한 약이 없었다. 그런데 불기운으로 한담(寒痰)을 공격하자 막힌 가슴이 절로 사라졌다. 연기의 진기가 폐를 적셔 밤잠을 편하게 이룰 수 있었다. 정사의 잘잘못과 복합한 심경을 분명하게 잡아내고, 요점을 찾아낸 것도 담배의 힘이다.”

과장되게 말한다면 정조의 개혁정치와 탕평책, 그리고 문체반정 등 모든 치적이 담배 덕분이라는 것이 아닌가. 

정조는 “이 풀(담배)에 필적할 은덕과 이 풀에 견줄 공훈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한 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담배가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의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러면서 “온 백성이 담배를 피도록 해서 그 효과를 확산시켜 담배를 베풀어 준 천지의 마음에 보답하자”고 역설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임금이 앞장서서 범 국민적인 흡연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정조의 책문에 낸 다산 정약용의 답안지. 유독 점수가 짰던 정조는 다산의 이 시험지에 ‘차상(次上)’의 성적을 내렸다. 원래 ‘차상’이라는 점수는 낙제권이지만 정조의 기준으로는 ‘우’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김영호 교수 소장

■‘담뱃대가 입을 틀어막으니 말실수가 없어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정조가 낸 ‘남령초’ 책문에 답안지를 낸 초계문신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각일기>를 보면 답안지 제출 이야기도, 성적도 포상기록도 적혀있지 않다. 채점관의 직분을 맡아야 할 규장각 최고위직인 두 명의 제학인 정민시와 심환지는 신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무슨일일까. 초계문신 대부분이 ‘조선을 골초의 나라로 만들자’는 이 해괴한 문제에 응답하기를 꺼린 것이 아닐까. 혹시 제출 거부 운동을 벌인 것일까. 그러나 최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딱 두 사람이 제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면승(1766~1835)과 박종순(1762~1808)의 답안이다.

박종순의 경우담뱃대를 구리와 은으로 화려하게 만드는 사치 풍조를 지적한 답안을 써서 제출했다는 사실이 묘지명에 기록됐다. 그뿐이다. 이면승의 답안만이 전문으로 남아있다. 이면승은 초계문신 시절 왕명으로 쓴 시문 만을 모아 <감은편>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중 은과록에 남령초 책문과 답안(대책) 전문을 실어놓았다. 물론 출제자인 정조의 의도에 ‘깔맞춤 모범답안’을 제출했다. 

이면승은 우선 “담배가 인삼이나 술, 음식보다 월등한 공덕을 지녀 득만 있고, 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담뱃대를 물면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 말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는 약간은 억지스러운 논리가 흥미롭다. 이면승은 또한 “담배가 도입된 이래 3면이 바다인 조선에서 병충해와 귀신, 종기가 사라졌다”면서 ‘이용후생의 방법을 통찰한 성상(정조)의 통찰력’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새삼 책문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필자의 뇌리를 끊임없이 맴도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골치아픈 정치 현안이나 무슨 깊이있는 철학을 논하는 문제가 아니다. ‘섣달 그믐밤 나이 들어감의 서글픔에 대해 논하라’는 광해군의 시험문제다. 나라면 어떤 답안지를 낼까. 당대 21살 청년 이명한의 답안에 발뒤꿈치라도 닿을 수 있을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태완, <책문>, 소나무, 2004

박현순, <조선 후기의 과거>, 소명출판, 2014

안대회, <담바고 문화사>, 문학동네, 2015

원창애·박현순·송만오·심승구·이남희·정혜은, <조선 시대 과거 제도 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4

윤재환, ‘논란과 필화를 통해 본 조선 시대의 책문’, <한국한문학연구> 제68호, 한국한문학회, 2017 

최식, ‘책문의 특징과 글쓰기’, <동방한문> 제39권 39호, 동방한문학회, 2009

박재경, ‘책문에 반영된 <장자>의 글쓰기 방식’, <국학연구> 제28권 28호, 한국국학진흥원, 2015

성균관대 박물관, <시험형 인간>, 성균관대박물관 제37회 기획전 도록, 2018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