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응하」,「요동백 김응하」

강원도 철원 대외리 5초소를 지나면 이른바 민통선 이북지역(민북지역)이다. 그러나 민북지역 잡지않게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논길을 따라 2킬로미터 쯤 달리면 동송읍 하갈리에 닿는다.

제법 그럴듯한 산소가 마주 보고 있다.

 김응하 장군의 묘는 빈묘다. 요동전투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명황제는 파병군 장수로서 장렬하게 전사한 장군에게 요동백의 작위를 내렸다. 

 

형제의 무덤이다. 하나는 김응해 장군의 산소이고, 다른 하나는 김응하(金應河) 장군의 무덤이다.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이 딱 맞다. 형(김응하 장군·1580~1619년)은 요동파병군을 이끌고 후금군과 접전을 벌인 뒤 전사했고, 동생(김응해ㆍ金應海 장군·1588~1666년)은 병자호란 때 청군과 결사항전을 펼쳤으니 말이다.


 

하기야 고려 장군 김방경(金方慶ㆍ1212~1300년)의 12대손이니 그 무장의 피가 어디 갈까.

 

김응하 장군의 산소는 아버지 산소보다 위쪽에 모셔져 있다. 그 연유가 전설같다.


 

즉 (장군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지금 이 자리(장군의 묘 자리)에 아버님을 모시려 했다는 것. 그런데 어떤 스님이 그곳은 빈장의 자리(빈 산소)이니 모시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는 것. 덧붙여 바로 그 밑에 아버지 산소를 모시면 자손 중에 장군이 나온다고 했다는 것.

 

그 전설같은 이야기가 꼭 맞았다. 

 

훗날 아들 김응하는 장군이 되었고, 요동 땅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이곳에 빈 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김응하 장군 덕택에 가문이 조선 대대로 빛났으리까 말이다. 조정은 해마다 1년에 두번씩이나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출사의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명나라 황제는 김응하 장군에게 '요동백(遼東伯)'이라는 관직을 추증했다.

 

김응하 장군은 조선 역사상 몇안되는 '충무공' 중 한사람이다.

 

조선역사상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이는 9명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순신(1545~1598년) 장군을 비롯해 조영무(趙英武ㆍ?~1414)·이준(李浚·1441~1479)·남이(南怡·1441~1468)·김시민(金時敏·1554~1592)·이수일(李守一·1554~1632)·김응하·정충신(鄭忠信·1576~1636)·구인후(1578~1658년) 등이다.

 

이순신과 김응하 장군 외에도 조영무는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남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정충신, 역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왕족 이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이괄의 난을 진압한 이수일,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싸운 구인회 등이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충무공' 시호는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리며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낸 무장들을 일컫는다.

 

 

한국전쟁 통에 벌집이 된 비석

-이길 수 없었던 파병군
 
그렇다면 김응하 장군은 무슨 공로로 '충무공' 시호를 받았을까.

 

바야흐로 조선이 임진왜란을 치르던 때 만주 벌판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한낱 오랑캐로 치부되던 여진족 일파인 누르하치가 고개를 쳐든 것이다.

 

만주 전역을 석권한 누르하치는 1589년쯤 왕을 칭했고, 1616년에는 명나라에 조공을 중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1618년 명나라는 대대적인 후금정벌을 계획하고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직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후금의 위세를 온 몸으로 느낀 광해군은 썩 내키지 않았다.

 

광해군은 첩자를 통한 정보전을 바탕으로 기미책(羈靡策·견제는 하면서도 관계는 끊지 않는 외교)을 펴면서 자구책을 꾀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조선의 피폐한 경제력, 나약한 군사력, 상존하는 일본의 침략 위협에 두렵고, 출병요구에 황제의 칙서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출병 요청을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란 때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망하게 된 것을 구해준 은혜)을 갚아야 한다는 명의 협박과 조정 신료들의 아우성에 광해군은 끝내 굴복하고 만다.

 

광해군은 요동파병군 도원수에 강홍립(姜弘立ㆍ1560~1627년), 부원수에 김경서(金景瑞ㆍ 1564~1624년) 그리고 조방장(助防將)에 김응하(선천군수)를 각각 임명했다.

 

그러면서 1만3000명의 원군을 파견한다. 그러나「이길 수 없는 전쟁」임을 뻔히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또 하나의 궁여지책을 세웠던 것 같다.

 

강홍립에게 "관형향배(觀形向背·정세를 살펴보고 행동하라)하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원군은 그야말로 느림보 행군을 펼친다. 1618년 7월 모인 파병군은 무려 7개월이 지난 이듬해 2월, 느릿느릿 압록강을 건넌다. 명나라군의 군사력은 정말 엉망이었다.
 
 -두 장의 카드 쥔 광해군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 힘쓰라."(<광해군일기> '1619년 2월3일조')

 

애초부터 패할 전쟁이라는 것을 안 광해군은 강홍립에게는 '패하지 않을 방도만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광해군은 나중에는 '재조지은' 운운하면서 파병을 강요한 신료들을 질타했다.

 

급기야 3월4일 조선 조정에는 조·명 연합군이 선허(深河·사르후) 전투에서 후금군에 궤멸 당했다는 비보가 들린다.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김)응하는 혼자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적은 감히 다가갈 수 없어 (응하의)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 했는데도 활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랑캐들조차 (김응하의 분전에)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일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 불렀습니다."(<광해군일기> '1619년 3월12일조')

파병군이 건넜던 랴오둥 선허. 조선군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였다.|이승수씨 제공

그런데 김응하의 결사항전과 달리 총사령관(도원수) 강홍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복하고 만다.

 

학계에서는 이런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현명한 실리외교와 묶어 설명하고 있다.

 

즉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은 '관형향배의 책략'에 따라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알린 뒤 항복했다는 것이다.

 

후금과 조선과의 관계가 더 악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됐지만 누르하치와 전장을 누볐고, 꾸준히 광해군에게 후금의 사정을 밀서로 알렸다.

 

그렇다면 파병군 장수인 김응하 장군의 장렬한 전사는 한낱 '개죽음'인가, 절대 '괜한 죽음'이 아니었다.

김응하 장군의 죽음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등거리 외교를 편 광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히든카드'였다.

 

즉 광해군은 두 장의 카드를 쥔 셈이며,「한 장(강홍립의 투항)」을 대후금 실리외교의 밑천으로, 다른「한 장(김응하의 전사)」을 대명 명분외교의 재산으로 각각 쓴 것이다.

 

 -명나라로부터「요동백」을 추증 받은 김응하 장군

선허전역이 끝난 지 딱 1년 뒤인 1620년 3월4일. 월사 이정구(1564~1635년)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김응하 장군의 사당을 지나다가 이런 시를 남겼다. 이정구의 회고담이 생생하다.

 

"압록강을 건너려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돌이켜보니 김응하 장군 및 2만의 관군이 전사한 날(3월4일)이니 그 분들의 넋이 비바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겠지. 가슴이 울컥하여 노래 세 수를 지었다."(<월사집)>)


1619년 선허 전역에 파병되어 후금군에 장렬하게 전사한 김응하 장군은 전쟁영웅으로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랴오둥 파병군 총사령관이던 강홍립이 후금군에 투항하자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하게 된다.

 

명나라의 랴오둥 군문(軍門)에서는 항복한 강홍립의 가족을 조선 조정이 어찌 처리하는지를 주목했고,

 

후금과 조선의 결탁을 의심하는 유언비어가 들끓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광해군으로서는 김응하 장군의 결사항전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즉각 김응하 장군 헌창사업에 돌입한다.

 

광해군은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을 비호하며 후금의 눈치를 살피는 한편 명나라의 환심을 사려 서둘러 김응하 장군을 치켜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왕은 1619년 3월19일 '자헌대부 겸 호조판서'로 추증했고, 5월 6일에는 중국 장수가 지나는 길목에 사당을 세울 것을 전교했다. 6월21일에는 이 사당에 충렬(忠烈)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급히 중국 장수가 지나는 길목에 사당을 세우라.(急急立祠于唐將所經處)"고 지시한 것은 고도의 외교술로 평가된다. 다분히 전시용인 것이다.

<연려실기술>은『명나라 신종(재위 1572~1620년)도 김응하를 요동백(遼東伯)으로 봉하고 처자에게 백금을 내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김응하의 충절과 의리는 화이(華夷·중국과 오랑캐)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광해군일기> '1622년 7월14일')고 자평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명나라의 의심을 덜기 위한 광해군의 외교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김응하 장군을 모신 철원 포충사  

-「김응하」신격화 프로젝트

국가차원에서 김응하 장군의 무공을 기리고 추모하는 <충렬록>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선허전역 직후 박희현(1566~?)은 김응하 장군의 전설적인 행적과 무공을 담은 <김장군전>을 썼는데, 충렬록은 바로 이 <김장군전>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된다.

충렬록의 모태가 된 <김장군전>은 그때까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던 심하전역의 전황은 물론 김응하 장군의 영웅적인 삶과 장렬한 최후를 마치 '신화의 인물'로 그리고 있다.


 

당대의 문장가 유몽인(柳夢寅ㆍ1559~1623년)이 "사마천의 솜씨에 견줄 만한 책"이라 극찬했을 정도였다.


이런 <김장군전>을 토대로 간행된 <충렬록>의 편찬과정에는 국왕인 광해군은 물론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총출동했다.

김응하 장군을 천거한 영의정 박승종(1562~1623년)을 비롯해 대북파의 수장 이이첨(1560~1623년)과 서인을 대표하는 이정구(1564~1635년) 등이 고루 참여하고 있다. 만시(挽詩·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를 지은 이가 90명이었으니 "글 좀 쓴다"는 당대의 문인들이 모두 가담한 것이다.

이 충렬록의 편찬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았다. 우선 외교적인 측면. 광해군은 이 책을 단순히 편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훈련도감에서 간행하여 국내뿐 아니라 중국 유입을 적극 유도했다.

 

"(충렬록의 간행은) 장군의 절의를 알릴 뿐 아니라 밀교(密敎·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후금과의 전쟁에서 형세를 봐가며 판단하라고 밀명을 내린 것을 뜻함)의 흔적을 가리기 위한 것"(<청야만집>)이라는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의 장수도 후금과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의 죽음을 온 나라가 추모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려 한 것이다. 이처럼 김응하 헌창사업은 군주를 비롯해 신료들의 정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시킨 가운데 이뤄졌다.

 

김응하 장군에 대한 추모 열기는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이후에도 사그러들지 않는다. 아니 더욱 고양되는 기현상을 빚는다. 이는 주도권을 잡은 서인의 지향과 일치했던 까닭이다.

도리어 장군과 관련된 일화는 신화로 승격된다.


18세기까지 사대부 문집에 실린 주요 작품만 해도 조경(1586~1669)의 <증영의정김장군신도비명>, 송시열(1607~1689)의 <조증요동백김장군묘비>, 홍세태(1653~1725)의 <김장군전>, 이재(1657~1730년)의<김장군응하전> 등 다수이다.


<동야휘집>과 <역대유편>, <연려실기술> 등 각종 야사ㆍ야담집에도 김장군의 이야기가 꾸준히 전승되고 있다.

"김장군이 세가 다하여 오래된 버드나무 구멍에 숨었는데 한 오랑캐 병사(후금군)가 (장군을) 죽였다. 오랑캐 추장은 '이런 충의의 인물을 죽이다니…'하면서 도리어 죽인 자를 처형했다."(<역대유편>)


"적병이 뒤에서 창을 던지니 목숨이 끊어졌지만 오히려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기가 발발(勃勃)하니 적이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하였다. 오랑캐의 추장이 시신을 묻으려 했는데 공의 시체만은 썩지도 않은 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연려실기술>)

 

-『한 번 죽음으로 나라의 체통을 세웠다』
장군에 대한 헌창사업은 정조대 후반이 되어서야 대명의리론의 학문적인 정리작업과 함께 마무리 된다.

1798년 간행된 <중간 충렬록>이 그것이다. 이 책에는 선허전역(1619년) 이후 조정이 시행한 김응하 추모사업이 편년식으로 기술됐다. 여기에 실린 민종현(1745~1798년)의 서문이 눈에 띈다.


"동방에서 대의는 배신(陪臣·제후의 신하가 천자를 상대하여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으로서 황조(皇朝)를 위해 죽은 것보다 더 성대한 것은 없었다. 배신사절(陪臣死節)의 의리가 김응하로부터 비롯됐으며 김 장군은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세웠다."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장군이 한마디로 명나라 황제를 위해 죽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광해군 시대에는 외교적인 실리와 각 정파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크게 이름을 떨쳤던 김응하 장군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성리학적인 명분론과 정권유지 차원에서 더욱 헌창된 것이다.

 

물론 김응하 장군의 대단한 무공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군인으로서 임무가 주어졌을 때 결사항전의 자세로 싸웠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장군의 업적은 정치권력에 의해 너무 신격화됐다.

 

작전권도 앗기고 보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패전이 불문가지였던 상황인데도 전쟁터에 나서야 했던 장군의 인간적인 고뇌 같은 것이 제대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죽음을 예견한 장수의 인간적인 측면 같은 것….

 

무릇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상황에 맞게 바뀐다. 천하의 혼군(昏君), 그리고 배신자로 낙인찍힌 광해군과 강홍립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 들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게 단적인 예다.

 

실리외교의 전형처럼 말이다.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때 그토록 영웅으로 추앙받던 김응하 장군에 대한 평가는 줄어든 감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태의 눈금으로 이리저리 평가되는 것이다. 김응하 장군이 무슨 후대의 평가를 잘 받으려고 이역만리 먼 곳 선허에서 무모한 죽음을 택했겠는가.

그는 명령을 받은 군인으로서 조선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광해군은 양손에 카드를 들고 명과 후금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등거리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나라를 위해 죽은 장군의 넋이 고귀한 가치를 갖는 이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