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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인민, 그리고 황국신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60년~70년대 ‘국민’(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의 전문이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도덕시간이나, 애국조회 때마다 암송을 해야 그 날 수업이 무사히 넘어갔다. 58년생인 김한종 교수(교원대)의 회고담에서 당대 국민학생들의 당혹감이 절절이 배어나온다.

1970년대 교과서에 실린 국민교육헌장 전문. 당시 국민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의 글자수가 몇자인가'라는 시험까지 봐가야 달달 외워야 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도덕시험은 대체로 좋은 말이 포함된 답안만 고르면 맞는 경우가 많아 가장 쉬었다. 그런데 첫번째 문제를 보는 순간 경악했다. ‘1.국민교육헌장은 몇 자인가.’ ~입으로 웅얼거리며 손가락으로 글자수를 꼽았지만~쉽지 않았다.~오기가 생겨 시험지에 국민교육헌장의 전문을 써내려갔다. ~마침내 답안을 썼다, 392자였다. 그 때 시험이 끝나는 종이 쳤다, ~결국 나(김교수)는 대부분의 문제는 손도 대지 못한채 답안지를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푼 1번 문제까지 틀렸다. 392자가 아니라 393자였던 것이다. 어디서 한 자를 빼먹은 모양이었다.”
 김 교수와 같은 58년 개띠 형들의 눈물겨운 분투 덕이었을까. 기자는 그 덕에 국민교육헌장의 글자수가 393자였음을 알았고, 어린 마음에 죽기살기로 외워 모든 난관을 통과했던 기억이 피어난다.
 국민교육헌장이 무엇이었기에 이렇게 ‘새나라의 어린이들’을 괴롭혔을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생산·건설·수출 같은 것을 제1경제라 했고, 국민의 정신자세를 제2경제라 했다. 박대통령은 투철한 국민정신을 발휘해야 조국근대화와 민족의 중흥을 이룰 수 있다며 대대적인 제2경제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조직했다. 그는 건전한 국민교육의 방향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체성 확립에 토대를 둔 국민교육헌장을 만들 것을 당시 권오병 문교부장관에게 지시했다.(1968년1월18일) 이에따라 40여 명의 학계중진이 6차례의 회의와 5차례의 수정을 거쳐 ‘모든 국민이 지표로 삼아야 할 정신을 담은’ 국민교육헌장을 공포했다.(68년12월5일)
 
 ■국민교육헌장과 교육칙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자유와 권리에 따라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발전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국민교육헌장)
 “신민이 지극한 충과 효로써 억조창생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대대손손 그 아름다움을 다하게 하는 것이 우리 국체(國體)의 정화(精華)이다. 교육의 연원 또한 여기에 있다.~학문을 닦고 기능을 익힘으로써 지능을 계발하고 훌륭한 인격을 성취하며, 공익에 널리 이바지 하고 세상의 의무를 넓히며, 언제나 국헌을 무겁게 여겨 국법을 준수해야 하며, 일단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에는 의용(義勇)을 다하며 공을 위해 봉사함으로써~.”(일본의 ‘교육칙어’)
 그러니까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이 일본이 1890년 반포한 ‘교육칙어’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둘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일본의 교육칙어는 당시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반포된 일제 신민들의 수신·도덕교육의 기본규범이다. 일제는 반포된 교육칙어의 사본을 천황의 초상화와 함께 전국의 모든 학교에 게시했고, 의례 때마다 낭독됐다. 1960년~70년대의 우리 국민학교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교육칙어가 패망 후인 1948년 폐지됐는데,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한국에서 그것의 아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하나 차이점은 효를 강조한 교육칙어와 달리, 국민교육헌장은 ‘반공’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의 국민교육헌장 초안과 최종안의 내용을 비교해보자.
 “반드시 이 땅 위에 통일조국의 빛나는 앞날이 올 것이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은 나아가 인류의 이상실현에 이바지 할 것이다.~”(초안)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새역사를 창조하자.”(최종안)
 초안에 있던 ‘자유와 평화, 정의를 사랑하는 민족’은 사라지고,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민족’이 심의과정에서 추가된 것이다.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1968년 전쟁 일보 직전으로 치닫던 당대의 시대상황이 반공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을 것이다.  

1968년12월5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국민교육헌장'을 서포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한스 소년과 이스라엘 청년
 기자는 김한종 교수가 펴낸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책과 함께)을 읽으면서 잠시 추억여행을 떠났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60~70년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국민학교 시절 교실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코흘리개였던 기자를 떠올리면서…. 특히 어릴 적 그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갖가지 상황들의 배경설명은 기자와 같은 50대 이상의 추억여행을 한결 풍성하게 해준다. 과연 그랬다,
 국민교육헌장의 반포에 따라 민족주체성과 ‘국적있는 교육’이 강조됐다. 국민윤리라는 과목이 ‘반공·도덕’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3차교육과정(1973년)의 목표는 국민교육헌장 이념의 구현이었다.
 5·16쿠데타와 제3공화국 수립을 ‘민족적 의거’에 포함시키고, 죽어가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쳤다는 이승복 어린이, 1·21사태로 희생된 최규식, 적의 수류탄에 몸을 던져 산화한 이인호 등이 ‘빛을 남긴 조상’으로 추앙됐다. 이순신 장군은 영웅의 범주를 벗어난 ‘성웅(聖雄)’, 즉 ‘성스러운 영웅’으로 평가됐고, 그의 ‘충무정신’은 국민교육헌장 이념의 한 영역으로 별도 분류됐다.
 거란·몽골과 싸운 고려인들의 독립자존의 정신과 꺾이지 않는 기세는 ‘무인의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삼별초의 대몽항쟁 역시 고려무인의 전통적인 기백을 드러낸 것이라 평가했다. 5·16쿠데타와 군사정권의 정당성과 장점을 고려 무인의 역사에서 그 전통을 찾고자 한 것이다. 또 1973년 공주 우금치에 세워진 동학혁명군 위령탑 비문에는 ‘5·16혁명 이래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유신과업의 한 돌을 보내게 된만큼…’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즉 5·16군사쿠데타와 10월유신을 ‘동학혁명’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1970년대 문교부가 펴낸 <대외항쟁사> 교재에서)    
 갖가지 외국의 사례도 ‘본보기’였다. 성냥개비를 절약하려고 열 사람이 모여야만 담뱃불을 붙여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독일은 단골모델이었다. 우리도 독일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나무를 심고(그룬투비), 낙농업을 일궈(달가스), 자원이 부족한 덴마크를 선진국으로 이끈 사람들도 본보기가 됐다. 뚝에 난 구멍을 밤새도록 손으로 막아 결국 조국 네덜란드를 구했다는 한스 소년의 이야기 역시 그랬다. 당시 한국의 어린이들은 미국 동화의 주인공이었던 한스 브링스 소년을 실존인물로 철석같이 믿었다. ‘나도 한스 소년처럼 조국을 구하는 어린이가 되겠다’고 다짐할만큼….
 아랍 제국을 물리치고 독립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국민정신도 강조됐다. 미국 유학 중 전쟁소식(1967년 3차 중동전쟁)을 듣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귀국했다는 이스라엘 청년과, 다른 나라로 도피했다는 아랍청년을 비교하면서…. 특히 사회경제공동체인 키부츠와 집단농촌마을인 모샤브는 강지만 강한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토대로 강조됐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랍보다 훨씬 강한 전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무시됐다. 이 모든 사례는 지금도 기자와 같은 세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들이다. 지금도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할만큼….
 그만큼 어릴 적 교육은 평생의 기억을 좌지우지할만큼 중요한 것이다. 

일제시대 때 교과서에 수록된 일제의 교육칙어. 국민교육헌장과 내용이 흡사하다.

■국민은 황국신민
 이렇듯 모든 교육은 정권의 역사관을 반영하고 홍보하는 도구로 이용됐다. 비단 박정희 정권 뿐만은 아니다. 특히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과 집단의 존재근거를 마련해준다.
 그렇기에 정권을 잡은 쪽은 자신들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국가(사실은 정권)가 필요로 하는 국민들 만드는 데 역사를 한껏 이용했다.  
 일제가 전시총동원령을 내리고, 국민학교령이 공포되면서(1941년) 이름을 얻은 ‘국민학교’의 경우를 보자. ‘국민’은 다름아닌 황국의 도를 충실하게 수행할 ‘황국신민’을 뜻했다. 1943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만들어진 ‘국민과 역사’ 과목의 목표는 “황국의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동아 및 세계의 변천과 황국 진전의 대세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의 국사교과서는 천황을 현신(現神)으로 미화하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합리화했다. 일본은 고대부터 한국을 지배했으며, 한국의 강제병합은 과거역사를 복원한 것일뿐‘이라 강변했다. 또 천황을 위해 옥쇄를 각오하는 황국의 신민을 찬양하는 비중있게 다뤘다.
 “8일~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특별공격대는 전원 20대의 청년용사들이었습니다.~ ‘천황폐하를 위해 아무런 아낌없는 젊은 사쿠라, 산화하여 보람있는 목숨이라면 몸은 설령 이역의 바다에 흩어진다 해도 지키고야 말리라. 야마토 황국을!’ 용사들은 모두~이역의 바다에 산화하였습니다.“(조선총독부 <초등국사> 제6학년용, 1944년 272~273쪽)
 일본은 패망 후 ‘국민학교’라는 이름 대신 예전의 ‘소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우리는 50년이 지나도록 ‘국민’을 버리지 못했다. ‘국민’이라는 말 자체가 나쁜 의미가 아니며, 국민학교를 다른 이름으로 바꿀 경우 혼란이 일어난다는 등의 이유가 거론됐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다일까. 일본도 버렸던 ‘국민학교’를 우리는 왜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국민’이라는 말이 국가, 즉 권력자에 충성하는 신민(臣民)이 아니라 권력자가 받들어야 하는 존재로 포장·미화되어 좋은 의미로 대중에게 다가왔음도 부인할 수 없다. 김한종 교수는 좀더 다른 이유를 찾는다. 이전에 널리 쓰였던 ‘인민’이라는 말이 공산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인민’ 대신 ‘국민’이라는 말을 거부감없이 썼다는 것이다. ‘국민학교’가 지닌 역사적인 의미는 망각한채….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1996년 우여곡절 끝에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하지만 김한종 교수는 ‘국민학교’의 만만찮은 그림자를 여전히 주목하고 있다. ‘국민학교’는 사라졌지만 ‘국민’이라는 말은 지금도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걸핏하면 ‘국민’을 되뇌이는 권력자들의 마음 속에 ‘국민학교’의 ‘국민’, 즉 ‘신민’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역사교육도 마찬가지 아닌가. 혹 예전 국민학교가 길러내고자 했던 ‘국민의 인간상’을 여전히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방 이후 진단학회가 서둘러 펴낸 국사교본.

■홍익인간을 영어로 번역하면…
 법에 규정된 최고의 교육이념은 바로 ‘홍익인간’이다. 교육기본법 제2조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이라 규정하고 있다.
 삼척동자가 알다시피  ‘홍익인간’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에 나오는 말이다.
 “엣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라는 이가 있었다. 자주 뜻을 천하에 두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아버지(환인)가 아들의 뜻을 알고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만 했다.~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고 가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도 나온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홍익인간과 이화세계(理化世界)하자는 우리 민족의 지칼 바 최고공리임.”    
 돌이켜보면 역사적으로 단군이 각광을 받았던 것은 외침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였다. 예컨대 단군신화를 수록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고려말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 나왔다.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침탈의 위기에 놓여있던 대한제국 말에 세워졌다. 일제 말, 해방 후에도 단군은 위기에 빠진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상징이 됐다.
 해방 후 미군정 시절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제안한 사람은 백낙준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정 시절, 백낙준은 교육이념을 다룬 조선교육심의회 제1분과 위원으로서 ‘사회에 유익한 인간이 갖춰야 할 자질을 갖도록 교육을 하자’는 의미에서 홍익인간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좌익계는 “홍익인간이 신화를 바탕으로 한 봉건적인 관념이며 ‘민주건국’이라는 시대과제에도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서구민주주의 교육을 신봉했던 이들의 시각도 부정적이었다. “홍익인간의 배후에 존재하는 단군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정서를 고취시켜 전체주의나 독재정치를 뒷받침할 우려가 있다”(오천석)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입장도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분위기가 고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백낙준은 ‘홍익인간’을 엉어로 번역하면 ‘Maximum service to humanity’라 하면서,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민주주의 교육이념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홍익인간’ 교육이념은 1945년 12월 20일, 전체회의에서 통과됐다,
 이 개념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다시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지만, 초대 문교장관이었던 안호상의 의지대로 통과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안호상이 당시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일민주의’와 ‘홍익인간’을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일민(一民)’은 문자 그대로 ‘한 백성’을 뜻한다. 그러니까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단일민족은 민족적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라는 것. 물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국책이 정해지면 지상명령으로 알고 복종해야 하며, 그 정신은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과 신라의 화랑정신이라는 것이다.
 당시 안호상 문교장관은 신라의 화랑도를 본땄다면서 학생조직을 군사조직으로 만든 ‘학도호국단’을 설치했다. 나치의 유겐트와 비슷하다는 비판에 안호상은 “유겐트가 아니라 신라 화랑을 본 딴 것이며, 나치 사상이 아니라 단군의 한백성(일민)주의를 따른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유겐트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민조이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고 응수했단다.   
 김한종 교수는 일민주의가 강조한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였는데, 이것은 박정희 정부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부활됐다고 한다. 1960년 4·10혁명으로 폐지된 학도호국단이 1975년 부활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어쨌든 ‘홍익인간’은 한국사회 전반을 흐르고 있던 민족주의의 성향을 반영하듯 폐지되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교육의 최고이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김한종 교수의 말처럼 ‘홍익인간은 정권이 바뀌었지만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국민정신으로 이용’됐던 것이다. 

고 손보기 박사가 소장했던 <삼국유사> 왕력편. 역사적으로 국난에 빠질 때면 민족의식이 매우 고양됐다. 해방이후에도 <삼국유사>에 나온 '홍익인간' 부분이 대표적인 교육이념으로 자리잡았다.

■단군조선의 기원
 우리 역사에서 특히 상고사와 고대사 분야는 교과서로 서술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건국설화(단군신화)’, ‘고조선의 건국기원과 삼국의 건국연대’, ‘시대구분’, ‘인물비판’, ‘남북조’ ‘왕호’  등은 두고두고 논란거리였다. ‘소도’와 ‘솟대’, ‘진대법’과 ‘조적법’, ‘내물왕’과 ‘나물왕’, ‘견훤’과 ‘진훤’, ‘거란’과 ‘글안’ 등 용어의 차이도 만만치 않았다. 1955년 8월 제1차교육과정에서 검정역사교과서 847권이 통과됐다. 그러나 교과서마다 집필자의 특정 견해를 옮기는데 급급했다.
 교육현장에서 혼란이 야기됐지만, 학설을 억지로 ‘통일’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결국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통일’을 지시하면서(1961년 10월)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군사정권의 쾌도난마식 해법이었지만 학설과 용어의 ‘통일’은 쉽지 않았다. 28명의 전문가들이 2년 간 12차례의 회의를 거쳐 국사교과서 내용을 통일했다. ‘통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단군은 민족신화로 취급하되, 교육과정의 정신을 반영,
 2)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고조선에 포함. ‘기자조선’, ‘한씨조선’, ‘개야지조선’, ‘위만조선’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음. ‘기자동래설’, ‘기자’ 운운 하는 서술은 하지 않음. 위만의 민족적 소속을 밝히지 않음.
 3)삼한의 위치에 대해 중학교에서는 마한은 우리나라 남부의 서쪽, 진한은 우리나라 남부의 동쪽(낙동강 하류동부), 변한은 우리나라 남부의 동쪽(낙동강 서부)으로 함. 고등학교에서는 이설(異說)을 함께 서술. 삼한의 부족국가 수는 중·고교 공히 표시 안함.
 4)한사군의 위치는 진번은 ‘자비령 이남~한강 이북’, 현도는 ‘압록강 중부’, 임둔은 ‘한경남도 대부분과 강원 일부), 낙랑은 ’대동강 유역‘의 지역으로 함.
 5)삼국의 건국 관련, 주몽·온조·박혁거세는 부족사회에서 다룸. 사료의 건국연대(기원전 57, 기원전 37, 기원전 18)는 표시하지 않음.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구려-백제-신라 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태조왕(고구려), 고이왕(백제), 내물왕(신라) 때부터, 또는 몇 세기부터라 함.
 6)신라의 삼국통일 연대는 676년으로 함.
 7)고구려의 국내성과 환도성은 별개가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함.
 8)신라의 불교공인연대는 법흥왕 14년으로 함
 9)백제의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을 구분하지 않음. 위례성의 위치는 한강유역으로 함.
 10)근대화 시기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함.
 내용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까닭이 있다. 1963년 공포된 이 때의 통일안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국사교과서 서술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1)의 내용이 2006년판 교과서부터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는 내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베트남전쟁,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

 김한종 교수는 이밖에 ‘사회과 통합과 국사교육 선택논란’과 ‘포스트모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 ‘식민지 근대화론의 전개과정’, ‘일본·중국과의 역사전쟁’ 등 논쟁 중인 주제를 알기 쉽게 정리해놓았다.
 독자들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역사와 역사교육의 ‘역사’를 읽음으로써 현대사의 우여곡절까지 읽을 수 있다. 그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40대 이상의 독자들은 물론 지금 이 순간의 역사논쟁을 이해하고픈 젊은 세대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저작이다. 필자의 글 가운데 ‘역사교육의 현주소’를 언급한 내용이 특히 눈에 띈다.

김한종 교수가 최근 펴낸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역사교육의 흐름은 물론, 한국현대사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는 교양서로 손색이 없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기 전에는 아이들이 역사책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상급년이 되면 역사를 본격 배운다. 점차 흥미를 잃게 된다. 고등학생이 되면 절정이 이른다. 졸업하면 역사를 의무적으로 배우는 시기가 지난다. 그 때부터 오히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역사를 배울 수록 역사를 싫어하고 배우지 않게 되면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기현상인 것이다.”
 그야말로 딱 맞는 말이 아닌가. 필자는 ‘태정태세문단세~’로 상징되는 암기과목의 한계, 즉 획일적이고 딱딱한 서술, 지나치게 많은 사실의 나열 등 과거 국정교과서의 문제점이라 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교과서라도 집중이수제로 6개월 동안 몰아서 가르쳤다면 어떨까. 아니 궁극적으로 대학입학시험의 과목으로 5지선다형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 어떨까. 시험과목인 이상 역사가 재미있을 리 없지 않은가.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은 1981년 상고사 논쟁을 둘러싼 국회청문회에 출석한 이기백 교수의 발언이다.
 “영토가 넓으면 위대하고 영토가 좁으면 열등하다고 하는 식으로 국사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요,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학생들을 숙명론자, 비관론자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수는 “중국이나 소련의 땅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크니까 우리보다 위대하다는 식으로 결론이 난다면 어찌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고 보면 상고시대에 무슨 민족이 있었고, 무슨 국경이 있었겠는가. 외려 지금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영역을 오가면서 공통의 문화를 이룬 세계인이 아니었을까.
 덧붙여 또 잊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김한종 교수의 언급대로 ‘역사는 당대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라 이어받은 사람들의 역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사는 고구려인의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라는 것이다. 난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역사전쟁에서 반드시 새겨야 할 대목이다. 또 하나, 과연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베트남전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침략전쟁을 정당화·합리화하고 있지는 않는가.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