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근초고왕의 한성백제, 그 최후의 순간

475년 9월이었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한 백제가 한성시대를 마감합니다. 그런데 그 최후의 순간은 너무도 비참합니다. 임금인 개로왕은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간 배신자에게 잡혀 아차성까지 끌려온 뒤 목이 잘립니다. 개로왕은 사로잡히기 전 아들인 문주(왕)에게 “너는 후일을 도모하라”는 당부를 남깁니다. 이로써 중국사서에 따르면 중국 요서지방에까지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왜왕에게 칠지도까지 하사하는 등 국력을 떨쳤던 한성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립니다. 그후 1400년 이상 한성백제는 잊혀진 왕국이 됩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역사의 편린이 얼핏 드러났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강고한 식민사관의 영향력 아래 한성백제의 왕성이 ‘그럴리 없다’는 이유로 폄훼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70여년이 흘러 재조명 받기 까지 한성백제는 여전히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1996년말 극적인 반전이 벌어져 현현한 한성백제의 역사가 지금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땅 밑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전성기 한성 백제 493년의 대서사시를 느껴보기 바랍니다. 저곳에서  전쟁과 냉전이 오가고, 스파이가 암약했으며, 간계와 반간계, 배신과 복수, 그리고 치열한 외교전까지 어우러진 숨막히는 동족상잔의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백제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 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풍납토성 모형, 풍납토성은 한강을 북쪽에 두고 드넓은 광주 평원에 조성했다. 한성백제 전성기를 이끌었던 중심지였다.

을축년 대홍수로 잠을 깬 한성백제

1925년 여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가 한강변을 휩쓸었다. 한강이 범람했고, 강변에 접해있는 풍납토성의 서북쪽 장벽이 쓸려나가면서 토성 내부의 일부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이 무렵 토성 남단 모래 중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2점의 청동제 초두(술을 데워 잔에 따는 일종의 제사용기)를 비롯하여 금제귀고리 등을 구입해 소장했다.

 

일본인 아유카이 후사노신(鮎房貝之進)도 토성 안에 살던 어느 노파에게 자감색의 유리옥 십 수 개를 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유카이는 이들 백제시기 유물을 증거로 풍납토성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했다.

 

일제는 이 토성을 ‘풍납리 토성’으로 불렀고 광복 후에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풍납토성의 사적 지정 범위는 일제시대 지정된 범위 그대로였다. 즉 잔존하고 있는 토성 벽만 지정하고 그 외는 지정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성벽 내부는 난개발 주거지로 변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지정 보호받아온 범위가 성벽 그 자체에 지나지 않아 한마디로 속은 버리고 껍데기만 지정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건국 이후 사비시대인 부여에서 660년 멸망할 때까지 678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운데 한성백제 약 500년은 잊은 채 겨우 200여 년간 버틴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시대만을 명실상부한 백제로 알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수십된 것으로 알려진 청동초두. 제사용기라 할 수 있다.  

위례성을 둘러싼 여러 학설과 몽촌토성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북한산 혹은 북악산)에 올라 살만한 곳을 내려다보았다. 10명의 신하가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서로는 대해로 막혀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삼국사기> '백제본기')


이 잃어버린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 하남위례성이 어디냐를 두고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충청도 직산과 경기 광주의 고읍(古邑) 궁촌(宮村)·춘궁리 일대, 그리고 하남 교산리 일대도 주목거리였다.

 

그러나 이런 후보지들은 아직까지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수수께끼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일뿐

1964년 김원룡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고고학과 발굴단이 풍납토성에서 야외실습용 시굴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토성의 북벽 가까운 곳에 8곳의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초기백제 토기 편들이 나왔다.

 

김원룡은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후 1세기부터 한성백제가 사용한 중요한 성이라고 발표했다.


“풍납동 토성은 초축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위례성과 동시에 백제초기에 축조한 모양이며 286년(책계왕대)에 대대적으로 수리된 것은 틀림없다. 백제 건국집단의 한강유역 진출은 최소 서기 3세기까지는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김원룡은 ‘삼국사기’의 초기백제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고대 사학계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묵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고대 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 한강변에 풍납토성을 쌓을 만한 힘이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한성백제 유구들.

한성백제가 명실 공히 강력한 왕국으로 변모해 고구려·신라와 맞설 수 있었던 시기는 3세기 후반대인 고이왕 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바로 일제 강점기 때부터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랬으니 작은 시굴 구덩이에서 나온 백제유물을 인정할 리 만무했다.

 

그 기존학설이란 국사학의 태두 두계 이병도가 1933년 “풍납토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사성(蛇城)”이라고 비정(比正)한 것을 뜻한다.

 

이 백제본기 기록은 “AD 286년 백제 9대 책계왕이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풍납리 지명은 원래 ‘배암(蛇)들이 마을’이 ‘바람들이’로 말이 바뀌었고 이 ‘바람들이’ 지명이 한자로 표기되면 풍(風)은 ‘바람’, 납(納)은 ‘들이’이기 때문에 풍납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병도의 주장은 광복 후에도 어느 누구의 반대의견 없이 통용되어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

결국 김원룡은 풍납토성을 이병도의 주장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댜. 

 

이병도의 주장처럼 방어용성이기는 하지만 평시에는 많은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반민반군적인 읍성(半民半軍的 邑城)’이라고 얼버무린 것이다.


이것은 국사학자 이병도와의 싸움에서 고고학자 김원룡이 패배한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뿌리깊게 내린 학설을 정면 부인하는 새로운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던 것이다.

대신 80년대 중반부터 풍납토성 인근의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하남위례성)로 각광을 받았다.

 

이곳에서 지상건물터, 움집인 수혈 주거터, 저장시설, 방어시설로 보이는 목책 흔적뿐 아니라 백제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수습됐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몽촌토성이 기원후 3세기 중반에서 백제가 패망한 47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존속한 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성과는 백제가 한강변에서 3세기 후반(고이왕대)에 들어서야 국가의 기반을 잡았다는 기존 국사학설과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었다.


잠깐 잠깐 고개를 쳐들었던 풍납토성은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사적으로 지정된 토성 벽 일부만 제외된 채 성벽의 안팎은 도시화되면서 날로 파괴되어 가고 있었고 1990년대 들어와 경제성장에 따른 주택 재개발이 풍납토성 내부에도 불어 닥쳤다.

 

보상문제 때문에 분쟁이 일어 일부 주민들이 유적을 밀어버리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기적처럼 부활한 한성백제

잃어버린 한성백제의 한(恨)은 그다지도 깊었나 보다.

 

1996년 말, 겨울방학을 이용해 학생들과 함께 토성의 정밀실측을 하던 이형구(당시 선문대 교수)가 다시 백제의 혼을 일으켰다.


이형구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방호벽을 치고 기초 터파기 공사가 한창인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한다.

 

그는 공사현장 지하 벽면에 백제토기 편들이 금맥이 터지듯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지하 4m 이상이나 팠는데도…. 기존 주택건물은 파봐야 2m 정도였기에 깊숙이 박혀 있던 백제유물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대규모 재개발이 지하 깊숙이 묻힌 백제를 깨운 것이다.

 

1997년 새해벽두부터 난리가 났다. 언론의 엄청난 관심 속에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대박물관·한신대 박물관 등이 참여하는 공동 긴급구제발굴이 이뤄졌다.

 

곧 유구와 유물이 공개되었다. 조사의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하 2.5~4m에 걸쳐 유물포함층과 기원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3중의 환호(環壕)유구를 비롯해,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 폐기된 유구, 토기 가마 흔적 등이 밝혀진 것이다.

 

또 한번의 낭보가 인근 경당연립 신축부지에서 날아왔다.

 

한신대 박물관 발굴 결과 불과 1,000여 평의 조사면적에서 한성백제 유물·유구가 터져 나왔다.

 

집자리와 제사 관련 대형 건물터를 비롯하여 전돌·와당·초대형 항아리·중국제 도자기·중국동전인 오수전·‘대부(大夫)’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 파편 등 500상자 분량이 넘었다. 

 

말머리 뼈와 대부명 토기 등은 국가 주도의 제사행위가 있었음을 암시해주며 중국제 토기류는 활발한 대외교섭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성벽의 축조방법과 규모는 어떨까. 이것도 초미의 관심거리였다.

 

풍납토성벽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연인원 450만명이 동원된 대역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

애초에 발굴단은 '높이는 6~7m, 폭은 약 10여m 정도'로 예상했다.

 

그건 오판이었다. 끝도 없는 판축 토루와 성벽을 보호하는 강돌·깬돌이 열 지어 있고 성벽의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수직목과 식물유기체들.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폭 43m 이상에 현존 높이 11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다. 추정 최대높이는 15m에 달했다.


후학들의 연구결과 풍납토성은 기원전후부터 쌓기 시작해서 늦어도 3세기 전후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왕권에 준하는 강력한 절대 권력이 없이는 둘레 3.5㎞에 이르는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백제는 한성백제시대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국가였음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으로 조심스럽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해온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인원 400만 명이 쌓은 성

그렇다면 이 성을 쌓는 데 들인 공력은 어떠했을까.

 

심정보(한밭대 교수)는 <통전(通典)>의 수거법(守拒法)에 따라 풍납토성의 축조에 들어간 공역을 계산했는데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①먼저 흙을 운반한 인원=길이 3.5㎞, 기저부 폭 43m, 높이 11m에 대한 토량은 1백39만1천2백50㎡이며 이를 톤으로 환산하면 2백22만6천 톤이다.

 

이를 1.5톤 트럭으로 운반한다면 13만9천1백25대의 분량이 된다. 당시에는 트럭이 없었을 것이고 이를 지게로 져 날랐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운반거리를 100m로 가정하면 운반인원만 62만6천2백40명에 달한다.

그런데 여기서 계산한 토량은 판축이 이뤄진 상태에서의 규모로 계산했다.

 

따라서 판축기법에 의한 압축이 1/3정도라고 한다면 운반인원은 위의 인원에 3배를 곱한 1백88만1천7백20명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②성벽을 축조한 인원=<통전> 수거법은 하루 한사람이 2척(尺)을 축조하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런데 통전이 편찬된 당나라 척수(尺數)는 1척에 28~31.3㎝를 적용하고 있다.

 

유적에서 확인된 큰 항아리.

여기서 1척을 평균 30㎝로 하여 토량을 계산하면 441.5장(丈)이 되며 1사람의 공력이 하루 2척의 흙을 축조한다면 모두 221명이 동원된다.

연인원은 2백57만8천1백86명이 된다.

결국 ①②를 더한 전체 축성 연인원은 4백45만9천9백6명이 된다.

 

<삼국지> '동이전 한조’는 “큰 나라는 만 여 가(萬餘家)”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큰 나라의 전체인구는 5만 명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5만 명 전체가 공역에 참여한다 해도 90일이 걸리는 대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 축조는 그야말로 한성백제가 국운을 건 대역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성백제의 전성기를 이룬 도읍지 한성은 어떻게 붕괴된 것일까.

 

동족상잔의 씨앗

사실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부터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주몽)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다.

 

즉 주몽이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주몽은 졸본부여 임금의 딸과 결혼해서 아들 둘(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 기록을 전하면서 '다른 설'도 함께 언급한다. 

 

주몽이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앞의 설이 진짜라면 비류와 온조 역시 주몽의 친아들이지만 뒤의 설이 진짜라면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친아들은 아니다. 

 

만약 드라마를 위해 뒤의 설을 따른다면 어떨까. 

 

뒤의 설에 따르면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못한 것이 있었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주몽은 북부여 시절 예(禮)씨라는 여인과 혼인했는데, 주몽이 탈출할 당시 부인 예씨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유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들이 찾아오자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니….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비류와 온조는 땅을 쳤다.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 대왕의 건국을 도왔는데…. 아아! 이제 나라가 유리에 속했으니 우린 혹(贅·군더더기) 같은 존재가 됐구나.”(<삼국사기>)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소서노)와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한다.(기원전 18년) 


백제 개로왕은 남성인 몽촌토성에서 사로잡혀 아차산성 밑에까지 끌려와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개로왕을 죽인 이들은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걸루와 만년이었다.

■실패로 끝난 백제의 외교전
해묵은 앙금은 369년 본격적인 확전의 양상으로 치닫는다.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명을 끌고 백제의 민가를 약탈했다. 백제왕(근초고왕)이 반격을 가해 고구려군 5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371년엔 백제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승리의 주역은 백제의 ‘이중간첩’이었던 사기(斯紀)였다.


사기는 백제에 있을 때 왕의 말발굽을 다치게 해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고국원왕이 이끄는 고구려 대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했을 때였다. 사기가 극비리에 백제진영을 찾아와 고구려군의 허실을 고했다.


“고구려군의 군사가 많다고 하지만 가짜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로지 붉은 깃발의 부대 뿐입니다.”(<삼국사기> ‘근구수왕조’)     


사기의 정보로 천군만마를 얻은 백제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결국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이번에는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만 수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백제침공에 나선다.


백제는 결국 남녀 생구(生口)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고 항복했다.

 

백제왕은 설상가상, “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노라”고 다짐한 뒤 58성 700촌을 내주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광개토대왕비문>) 

 

■스파이전에 녹아난 백제
권토중래를 노리던 백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는다. 초반에 비해 국력에 고구려에 비해 떨어지게 된 백제는 북위를 상대로 처절한 외교전을 벌인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 황제에게 보낸 장문의 외교문서를 보자.


“백제와 고구려의 근원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승냥이와 이리(시랑·豺狼)’, 그리고 ‘큰 뱀(장사·長蛇)’이 길을 막고. ‘추악한 무리(추류·醜流)’가 성해지고, ‘애송이(소수·小竪)’가….”


개로왕의 표현 중에 ‘시랑’과 ‘장사’, ‘추류’, ‘소수’ 등은 모두 고구려를 욕하는 표현들이다.

 

저주와 증오로 점철돼있다.

 

하기야 고구려도 백제를 ‘백잔(百殘·백제의 잔적)’이라 폄훼하고 있으니….

 

개로왕이 올린 외교문서는 요컨대 “고구려를 멸망시킬 절호의 시기”라며 “백제와 북위가 손잡을 때”라고 동맹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위는 끝내 백제의 동맹제의를 거부하고 만다. 고구려의 힘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로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북위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개로왕이 원망하여 조공을 중단하였다.”    


한성백제인의 숨결이 담긴 우물.

■배신자의 손에 목숨을 잃은…
고구려의 남침이 이어졌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극비리에 백제를 도모할 첩자를 구했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은밀히 손들고 나섰다.

 

“우승(愚僧)을 어리석다 말고 쓰시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나이다.”
 

장수왕이 기뻐했다. 선대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국 백제를 칠 다시없는 기회가 될 터. 고국원왕이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 때 유시(流矢)를 맞고 전사하지 않았던가.

도림은 371년 백제의 사기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죄를 짓고 백제에 투항했다.

 

백제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매우 좋아했다. 도림은 “왕께 바둑을 한 수 지도할까 한다”며 접근했다.

 

도림을 불러들여 시험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고,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이 마각을 드러냈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씀 해보시오.”

“이 나라(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성곽과 궁실이 수축·수리 되지 않았습니다. 또 선왕의 해골이 들판에 가매장돼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백성들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선왕은 비유왕을 지칭한다.

 

<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이 455년 9월 훙(薨·승하)했다”고만 기록돼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의 <삼국사기> 기사에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변에 의한 살해 가능성이 짙다. ‘흑룡’의 출현은 국가의 불길한 징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개로왕 즉위 후 14년간이나 <삼국사기> 기록이 공백인 것도 모종의 정변이 이어졌음을 반증해준다. 어쨌든 도림의 ‘세치혀’가 개로왕의 마음을 흔들었다.


“알았다. 내 그리 하겠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했다.


“이제 됐습니다.”


장수왕은 뛸 듯이 기뻤다. 장수왕은 백제 침공군을 편성할 때 백제에서 죄를 짓고 망명한 걸루와 만년에게 선봉장을 맡겼다.

 

■‘아무리 군주가 밉다 해도….’
475년 9월,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자 개로왕은 땅이 꺼지도록 후회한다.


“내가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그러면서 아들 문주에게 신신당부한다.


“난 당연히 죽어야겠지만, 너는 죽어서는 안된다. 난리를 피해 왕통을 잇도록 해라.”


문주(왕)가 고개를 떨구며 남쪽(웅진)으로 망명했다. 도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은 북성(풍납토성)을 7일만에 함락시켰다.

 

개로왕은 급히 남성(몽촌토성)으로 피했지만 걸루와 만년 등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붙잡혀 참담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장방형 창고시설.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 등은 도망간 개로왕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세 번 절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은 뒤 죄를 책망했다. 그런 뒤 왕을 아차성 밑에 결박하여 끌고 와 살해했다."

왕을 욕보이고 죽인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인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이들이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이 7일 전쟁을 기록한 뒤 조국을 배신한 걸루와 만년을 비난하는 글을 남겼다.

“오자서가 (초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은 덕(德)이 아니다. 걸루 등이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고 적병을 인도하여 전군(前君)을 결박하여 죽이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도다.”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인 오자서는 초 평왕이 아버지 오사와 형 오상을 죽이자 오나라로 달아나 오왕 합려에게 의탁했다.

 

그런뒤 오자서는  초나라를 쳐서 이미 죽어 묻힌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매질함으로써 그 원수를 갚은 인물이다. 김부식은 걸루와 만년을 오자서에 비유하면서 비난한 것이다.


 

한편의 대서사시 같은 이 전쟁이 끝난 뒤 백제는 남으로 쫓겨 갔고 고구려는 대제국의 기틀을 완성했다.

개로왕으로서는 시조 온조왕이 BC 4년 새 궁궐을 지을 때의 정신을 잊지 않았으면 패망의 길을 걷지 않았을 터이다.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삼국사기) 
 

풍납토성에 서면 1500년 전의 드라마가 보인다. 한성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저곳. 

 

저곳에서  전쟁과 냉전이 오가고, 스파이가 암약했으며, 간계와 반간계, 배신과 복수, 그리고 치열한 외교전까지 어우러진 숨막히는 동족상잔의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으니 말이다.

 

마치 남북한의 열·냉전이 연상된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