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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병사의 기생충. 1960~70년대의 기억


기생충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parasite)는 ‘다른 이의 음식상을 빼앗아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됐다.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고 산다는 얌체 습성이 부각되는데다 그 생김새마저 혐오스러우니 ‘기피생물’의 지탄을 받았다.

오죽하면 지금까지도 ‘이 기생충 같은~’이라는 유구한 세월동안 전해내려왔겠는가.

사람 몸속의 회충은 하루에 20만개의 알을 낳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주 가운데 옷도, 잠자리도, 먹을 것도 해결되는 판이니 오로지 ‘생산’에만 전념할 뿐이다.

1963년 10월 9살 짜리 여아에게서 1063마리의 회충이 나왔다는 기사.

그런 탓인지 회충의 몸 대부분이 생식기로 채워져있다. ‘얌통머리 없는’ 미물이 아닐 수 없다.

1931년 5월 12일 신문기사를 보면 흥미롭다.

“기생충 감염은 실로 민족적 문제다.… 조선인의 무활력·무능력한 것이…기생충이 많아서 그런 것임은 결코 과장적이 아닐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 정체의 책임인 기생충 감염을 민족적으로 퇴치하자는 캠페인 기사다.

‘몸을 위해, 나라를 위해’ 회충약을 먹어야 한다는 범국가적인 운동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기생충인 이렇듯 박멸 퇴치되어야 할 '기생충'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옛 신문을 들춰보면 온통 끔찍한 기억들 뿐이다. 1950년대 한국군 환자의 배에서 양동이 하나에 가득 찰 정도의 회충을 빼냈다는 기록이 있다.

1931년 기생충을 민족적으로 퇴치하자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벌어졌다.

1963년 10월에는 경악할만한 사건이 터졌다. 당시 폴 크레인 전주예수병원장이 장폐색증으로 갑자기 죽은 9살 소녀의 배를 열었는데, 무려 1063마리의 회충이 우글거렸다.

소녀의 뱃속에서 나온 회충 사진은 몸서리를 쳐질만큼 징그러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저주의 표현을 담은 기생충 박멸협회까지 생겼다.

1975년 기생충 박멸협회장은 “기생충 퇴치에 힘을 쏟아 국가안보에 이바지하며, 북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하겠다”고까지 다짐할 정도였다. 기생충을 국가안보와 직결된 문제로까지 본 것이다.

1950~6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해마다 검사용 분변을 채취해서 학교에 제출해야 했다. 무슨 개똥을 묻혀 가져가는 바람에 선생님에게 혼꾸멍이 났다는 등의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전해진다.
기생충의 오래된 특징 중 하나는 숙주인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확인된 왕의 미라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몸속에서까지 어김없이 회충알이 검출되었다. 인분으로 ‘키운’ 채소를 먹은 모든 사람은 배속에 기생충 몇마리 쯤은 ‘키웠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대대적인 ‘기생충 박멸’에 나섰다. 그 때문에 서민 교수의 표현대로 ‘기생충 평등주의’가 무너져버렸다.

기생충은 어느덧 ‘가난한 나라의 질병’으로 남게 되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사람의 몸속에서 그나마 섭취한 영양분까지 탈취해버리는 ‘치사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공동경비구역(JSA)를 통해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몸을 수술하다가 수십마리의 기생충이 우글거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27㎝에 이르는 회충에 집도의조차 크게 놀랐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회충은 보통 25~30㎝까지 자라기 때문에 27㎝는 유별한 크기는 아니다. 외과의사도 놀랄만큼 기생충이라곤 보기 힘든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북한군 병사는 인분비료를 쓴 채소를 섭취했을 것이다. 북한군 병사의 몸이 깡말랐다니 이 회충이 병사의 영양분을 빼앗은 탓이리라.

불현듯 1960~70년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해마다 학교제출용 검사용 분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곤혹스러워했던…. 남과 북한의 시간은 따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판문점 경계선은 시간을 뛰어넘는 선일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서민, <기생충열전>, 을유문화사, 2013

박영진, <한국과 일본의 기생충질환 퇴치의 역사>, 서울대석사학위논문, 2016 

정준호, <기생충, 우리들의 영원한 동반자>, 후미니타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