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풍속도의 계보는 김홍도(1745~)-신윤복(1758~?)로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민들의 일상과 애환을 진솔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한 김홍도와, 양반과 기녀들의 사랑과 일탈을 때로는 애로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그려낸 신윤복의 풍속도가 워낙 빼어났다.

하지만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사이에 또 한사람의 풍속화가가 있다. 김홍도보다는 9살 아래, 신윤복 보다는 4살 위인 긍재 김득신(1754~1822)이다.

김득신의 대표작인 ‘파적도(야묘도추)’.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도망가는 장면을 포착했다. 어미닭은 시뻘건 두 눈을 부릅뜬채 고양이를 향해 달려들고 병아리들은 사방으로 도망친다. 이 모습을 본 주인영감은 돗자리를 짜다말고 곰방대를 후려치며 뛰어들지만 역부족이다. 툇마루에서 그만 고꾸라진다. 주인마님도 떨어지는 영감을 잡으려 맨발로 달려들지만 이미 늦었다. 망건과 돗자리틀이 떨어지고 만다. 그야말로 ‘순간포착 세상의 이런 일이’ 같은 장면이다. 한 편의 짤방이자 한 편의 캡처 영상 같다.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시대 ‘팀킴’
김득신이 누구인가. 얼마전 끝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화제를 뿌린 여자 컬링팀의 별명이 ‘팀 킴’이었다.

멤버 5명 전원이 공교롭게도 김씨였고, 그것도 영미와 영미 친구, 영미 동생, 영미 동생의 친구 등으로 이뤄진 팀이라 붙은 별명이었다. 18~19세기를 풍미한 풍속 화가 김득신은 조선시대 ‘팀킴’의 일원이었다.

김득신의 생애를 기록한 오세창(1864~1953)의 <근역서화징>과 유재건(1793~1880)의 <이향견문록> 등을 보자. 

"김득신은 화원인 김응환의 종가이다. 영조 30년(1754년)에 태어나 69세(1822년)에 죽은 화원인데, 그림에 능하고 특히 인물을 잘그렸다."(<근역서화징>)

"정조 임금이 그의 부채그림을 보고 '김홍도와 더불어 백중하다'고 했다. 당나라 시대 화가인 오도자(680~759)와 동진시대의 화가 고개지(344~406)의 경지에 들어갔다."(<이향견문록>)

김득신이 속한 개성 김씨는 18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서리·역관·의관을 배출한 중인 가문이었다. 김득신의 큰아버지인 김응환은 개성 김씨가 배출한 첫번째 화가였다. 또한 김득신의 두 동생인 김석신과 김양신이 모두 화원이 됐다. 김득신의 세 아들인 건종·수종·하종, 김양신의 아들인 순종·은종 역시 화가가 됐다.

김득신의 손자 가운데 2명도 화가가 됐다. 김득신의 동생인 김석신은 큰아버지 김응환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의 아들인 김화종 역시 화원이 됐고, 또 김화종의 아들 5명 중 4명이 화원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 뿐 아니라 김득신의 개성 김씨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은 가문 중에 화원을 배출한 집안은 인동 장씨, 전주 이씨, 신평 한씨, 곡산 노씨, 개성 이씨, 양천 허씨, 임천 백씨 등 7개 가문에 달한다.

한마디로 김득신의 큰아버지와 동생, 아들, 손자, 김득신 동생의 아들과 손자, 김득신의 외가 등 5대에 걸쳐 20여 명의 화가를 배출한 것이다. 여자 컬링팀을 능가하는 조선시대 화가 ‘팀킴’ 이라 할 수 있다.  

김득신의 ‘대장간(위 그림)’과 김홍도의 ‘대장간’. 주제가 같지만 다른 그림이다. 김득신의 그림을 보면 쇳덩이를 집게로 잡고 있는 대장장이의 시선(아래 확대그림)이 화가를 향해 있다. 사진 찍을 때 사진기사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순간포착의 느낌이 든다.

■정조의 극찬, ‘김홍도와 백중지세다’
그런 쟁쟁한 화가 가문에서 태어난 김득신의 그림은 특출났다.

오죽하면 중흥 군주인 정조가 “김홍도와 김득신은 백중지세”라 평했겠는가. 백중(伯仲)은 형(伯)과 아우(仲)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득신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실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선배 김홍도는 물론이고, 후배 신윤복에게도 한참 뒤쳐진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걸출한 풍속화가 단원과 혜원 사이에 ‘낀 세대’ 풍속화가라 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상당수의 그림이 김홍도의 소재와 주제와 비슷하기 때문에 ‘김홍도의 아류’라는 평을 듣기 일쑤다. 아닌게 아니라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누구의 그림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흡사하다. 

이 중 김득신의 ‘대장간’은 김홍도의 ‘대장간’과 거의 비슷한 선묘이다. 원형 구도로 둘러 앉아 일하는 모습인데, 왼쪽 사람이 앉아있는 장면하며 화로와 대장간 물건들의 배치나 오른쪽 사람의 자세, 망치질 하는 사람의 표정 등이 다르지 않다.

김득신의 ‘타작도’도 등장인물이나 소재의 설정 면에서 김홍도의 ‘타작도’를 닮았다. 김득신이 30살 무렵에 그린 ‘놀란 물새’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 중의 ‘놀란 물새’를 참고한 것 같다. 말발굽 소리에 놀라 날라가는 물새와 그것에 놀라는 나귀, 그 나귀에 놀라는 일행의 모습을 그렸다. 이밖에도 ‘점심’, ‘자리짜기’, ‘주막’ 등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김득신의 투전도,  안경 속에 비치는 사람의 눈길과 두 손으로 골패를 감추는 사람, 허리춤에 차고 있는 돈주머니 등 노름방의 긴박감을 전했다. 특히 맨 오른쪽 인물은 초상화 기법으로 얼굴을 입체적으로 그렸다.  

■파적도를 보고 김득신을 평가하라
하지만 주제와 소재가 비슷하다고 해서 김득신을 ‘김홍도의 아류’라 폄훼할 수 없다. 특히 저 ‘파적도(야묘도추)’ 그림을 본다면 절대 그런 소리 할 수 없다.

‘적막을 깨는 소동’이라는 뜻의 ‘파적(破寂)’이라는 제목이 좋은지,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훔친다’는 뜻의 ‘야묘도추(野猫盜雛)’가 좋은 지는 감상자의 취향일 터다.

그러나 필자는 왠지 운치가 있는 것 같은 ‘파적도’를 선호한다.

‘파적도’는 한마디로 말해 ‘낀세대 화가’ 김득신이 그린 조선 최고의 ‘짤방’이라 할 수 있다. 미술사가인 고 오주석의 감상평을 옮겨본다.

“이게 웬 소동이냐. 시골집의 고요와 평화를 깨는 일대사건이 벌어진다. 검정 도둑고양이가 노란 병아리를 잽싸게 채서 달아나고…, 깜짝 놀란 어미 닭은 눈에 시뻘겋게 독이 올라 날개를 파닥거리며 죽을 각오로 덤벼들고 나머지 병아리들은 혼비백산 흩어진다.”

이 장면의 백미는 어미닭의 핏발선 눈이다. 고양이보다 약한 존재지만 제 자식을 구하려 날갯죽지를 한껏 펴고 부리를 크게 벌린채 달려들고 있다. 절정의 모성애가 아닌가. 도망가는 병아리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다른 방향으로 냅다 뛰고 있다. 화면구성의 묘미를 살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는 대목이다.

김득신의 ‘양반과 상민’, 길가다가 양반을 만난 상민이 90도 이상의 각도로 절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대 뿌리깊은 신분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그림이다. 어쩌면 과공비례의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신분사회를 향한 ‘주먹감자’의 의미를 던진 것은 아닐까.

■19세기 캡처 영상
갑작스런 소동에 툇마루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던 주인영감은 또 어떤가.

암탉의 비명소리에 벌떡 일어나 긴 담뱃대를 내뻗어 후려치지만 역부족이다.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굳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인지 그대로 고꾸라진다. 탕건이 벗겨지고, 돗자리틀과 재료가 땅바닥에 나뒹군다. 이 모습을 본 주인마님 역시 깜짝 놀랐다.

병아리도 병이라지만 속절없이 넘어지는 주인 영감을 붙잡으려고 맨발 바람에 뛰쳐나가보지만 역시 역불급이다.(보기에 따라서는 병아리를 채가는 고양이를 붙들어오라고 남편을 밀치는 장면이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농담이다.)

등장 인물과 동물, 그리고 사물이 하나같이 다급하기 짝이 없다. 한 편의 ‘순간 포착’ 스냅사진과 캡처 영상을 본 듯하다. 나자빠지는 주인장, 이것을 염려하는 아내, 잡혀가고 쫓기는 병아리, 새끼를 잃고 벌건 두눈으로 달려드는 어미닭, 우당탕탕 떨어지는 돗자리와 자리틀…. 그 모든 소재와 등장 인·동물이 다 주인공 같다.

여기에 무심한듯 바라보는 듯한 집과 붉은 꽃이 피는 나무 등의 구도도 치밀하기만 하다.

18~19세기 조선의 어느 민가, 한적한 봄날 오후를 찍은 영상을 감상하는 듯 하다. 이 그림을 보고도 긍재 김득신이 단원 김홍도의 아류라 폄훼할 것인가. 

김득신의 타작도. 정장에 갓까지 쓰고 있으면서도 추운지 수건까지 둘러쓰고 앉아있는 감독관의 모습과 더워서 웃통을 벗어버린채 타작하는 농민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닭이 낱알을 주워먹는 데다  놔두는 장면이나 탁발승이 등장하는 장면 등 추수철의 넉넉한 인심을 엿볼 수 있다. 그것도 모르는 강아지가 컹컹 짖어대고 있다.

■화가를 쳐다보는 순간을 포착한 '대장간'
김득신의 ‘대장간’은 김홍도의 ‘대장간’과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그 무엇이 있다. 오히려 김득신의 ‘대장간’이 더 매력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특히 등장 인물의 시선이 흥미롭다. 쇳덩이를 집게로 잡고 있는 대장장이의 시선을 보라. 그림을 그리는 작가 혹은 그림을 감상하는 이를 힐끗 바라보고 있다.

무슨 뜻일까. 사진작가가 저잣거리의 대장간에서 일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그 순간 같다. 셔터 소리에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는 장면을 ‘순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김홍도의 ‘대장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김득신 만의 매력이다. 

‘투전판’도 김득신의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저 방안이라는 느낌만 풍길 뿐 다른 배경은 다 빼고 술상과 요강만 그렸다. 급한 볼일도 요강으로 해결한다는 뜻이다. 안경 속에 비치는 사람의 눈길과, 두 손으로 골패를 감추는 사람,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앞 사람의 두툼한 주머니 등이 노름방의 긴박감을 전해준다.

특히 맨 오른쪽 인물의 얼굴은 초상화의 훈염법(명암을 넣는 기법)처럼 입체적으로 그렸다. 초기 서양화의 기법이다. 김득신은 섬세한 심리묘사를 통해 노름판의 팽팽한 긴장감을 강조하려 했다. 이것은 김홍도와 견줄 수 없는 독창성이다.

김득신 김홍도의 '자리짜기'. 가문의 희망인 아이의 글읽는 소리에 맞춰 부부가 자리를 짜고, 물레를 돌리고 있다. 그런데 김득신은 김홍도와 달리 집안의 정경을 삽입했다. 여기에 문틈을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는 고양이를 배치함으로써 현장감을 더했다.        

■90도 각도로 인사한 상민의 '주먹감자'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가운데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태수의 행차’이다.

술에 취한 태수가 가마 위에 앉아 노상에서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그렸다. 지방관리의 부패상을 비난하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긍재 김득신의 그림 중에 오히려 김홍도를 능가하는 세태비판의 작품이 있다. 바로 ‘양반과 상민’이다. ‘양반과 상민’은 나귀를 타고 수행원을 거느리면서 행차하는 양반과 길가던 상민 부부가 마주치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상민 남편의 모습을 보라. 코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 있다. 반면 양반은 나귀 등에 앉아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상민 부부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김홍도의 ‘태수의 행차’도 당대의 생활상을 고발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김득신의 ‘양반과 상인’처럼 계층간 신분의 차이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고발하지는 못했다. 코가 닿을만큼 예를 갖춘다?

이것은 당대 봉건사회에서 양반과 상인의 신분차이가 엄청났음을 보여주는 한편의 블랙코미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외려 과공비례(過恭非禮)가 아닌가.

김득신은 과할 정도의 예를 갖추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오히려 당대 양반사회에 ‘주먹감자’를 날린 것은 아닐까. ‘아이고! 나으리 지나가십니까’하는 정도로….

 

 

 

 

 

 

 

 

 

장기두는 사람들을 그린 김득신의 '송하기승도'와 조영석의 '현이도'. 화원 신분인 김득신은 장기를 두는 주인공으로 승려를 캐스팅했지만 문인화가인 조영석은 선비를 선택했다.

■김득신의 한 가지 더

김홍도의 <행려풍속 8곡병> 중 ‘타작도’와 김득신의 <풍속 8곡병> 중 ‘타작도’ 역시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르다.

우선 눈에 띄는 장면은 감독관의 모습이다. 김홍도의 ‘타작도’에 등장하는 감독관은 보란 듯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곰방대를 물고 술에 취한 듯 졸고 있다.

반면 김득신의 ‘타작도’에 출연한 감독관은 정장에 갓을 쓰고 있으면서도 추워서 수건까지 둘러쓰고 앉아있다. 물론 무노동이다. 그런데 김득신의 ‘타작도’를 보면 한가지 더 있다. 한 쌍의 닭이 곡식을 먹고 있는 데도 그냥 내버려 둔다든가, 탁발승까지 등장시켰다든가 하는 장면들이다. 추수의 풍요가 가져다준 너그러운 인심을 은유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강아지는 컹컹 짓고 있지만…. 

‘자리짜기’ 역시 김홍도와 김득신의 그림은 비슷하다. 당대 서민가정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두 작가가 알려준다. 즉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는데, 그 집안의 유일한 희망인 아이는 책을 읽고 있다. 여기까지는 두 화가의 그림은 흡사하다.

하지만 김득신의 ‘자리짜기’에는 추가표현이 있다. 집안의 정경을 삽입했는데,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고양이를 배치했다. 고양이 등장의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현장감을 높였다.

김득신의 짚신삼기는 선배화가 윤두서의 그림과 주제가 같다.  윤두서의 그림은 산수인물화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김득신의 그림은 현실감이 물씬 풍긴다. 광대뼈가 불거진 주인공의 얼굴에서 힘겨운 삶의 역정을 엿볼 수 있다. 담뱃대를 물고 앉아있는 할아버지와 그 등 뒤에 숨어서 쳐다보는 아들, 그리고 혀를 내밀며 헐떡이는 개의 모습에서 19세기 한여름날 오후의 장면이라는 느낌이 확 온다.    

■김홍도 따라쟁이인가
사실 김득신이 9살 선배인 김홍도와 각별한 사이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781년(정조 5년) 정조 임금의 초상화(어진)와 영조 어진(80세 상)의 모사작업에 두 사람이 함께 참여했다. 이때 김홍도는 2진격인 동참화사(임금의 옷이나 의자, 바닥 화문석을 그리는 화가), 김득신은 3진격인 수종화가(밑그림 담당 화가)로 참여했다.

두 사람은 1790년(정조 14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려고 세운 용주사 후불탱화 조성에도 함께 작업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김홍도는 오히려 김득신의 큰아버지인 김응환과 절친이었다.

김홍도는 자신보다 3살 연상인 김응환(1742~1789)에게 <금강전도>를 그려주었다. 김홍도와 김응환은 1788년(정조 12년) 정조의 명을 받아 영동지방과 금강산을 함께 여행했다. 1년 뒤인 1789년(정조 13년) 두 사람은 일본 지도 제작의 밀명을 받았다. 그러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길에 김응환이 죽고 말았다. 김홍도는 김응환의 장례를 치러주고 혼자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득신은 직접적인 교유는 없었지만 큰아버지의 절친인 김홍도의 영향을 한껏 받았음에 틀림없다.

또 김홍도와 주제 및 소재가 흡사한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막이나 점심, 타작, 대장간, 자리짜기 등은 당대 풍속화의 단골주제가 아니던가. 김득신을 김홍도의 ‘따라쟁이’로 폄훼할 수 없는 것이다.

김득신은 중국화가 염입덕의 그림을 판각해서 실은 화보를 모티브로 '강변회음도'를 그렸다. 버드나무 가지가 살랑이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으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그러나 김득신은 등장인물들을 조선인으로 바꿔 놓았다. 또한 하늘의 빈공간에 해오라기 비슷한 새들을 그려 화면의 균형을 꾀했다.

■양반과 스님의 장기대결
사실 김득신은 김홍도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다.

김득신의 ‘강변회음도’는 중국 화보에 실린 작품이다. <고씨역대명인화보>에 실린 당나라 화가인 염입덕(596~656)의 그림 판각본을 다뤘다. 강변회음도는 버드나무 가지가 살랑이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술을 마시고 즐기는 모습을 거린 것이다. 그런데 김득신은 등장 인물을 중국식이 아닌 당대 조선인으로 바꿔 표현했다. 또 하늘의 빈공간에는 김득신 특유의 해오라기 비슷한 검은 새를 그려넣어 화면의 균형을 꾀했다.

김득신의 ‘해옹취수도’ 역시 중국의 <당시화보>(1603년)에서 기본 바탕을 찾을 수 있지만 등장인물은 모두 조선식 의복을 갖춘 당대 조선인으로 표현했다. 마냥 따라쟁이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김득신은 또 윤두서(1668~1715)와, 조영석(1686~1761), 김두량(1690~1763) 등 선배 화가들의 채취가 풍기는 작품들도 여러 점 그렸다.

예컨대 김득신의 ‘짚신삼기’는 윤두서의 ‘짚신삼기’와 같은 주제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윤두서의 그림은 산수인물화의 배경이지만 김득신의 그림은 현실감이 물씬 풍기는 배경을 그렸다.

사립문에 호박덩굴이 늘어져 있고 그 사이로 삐죽 보이는 옹기…. 담뱃대를 물고 앉아있는 할아버지와 등 뒤의 손자가 쳐다보는 가운데 광대뼈가 불거진 사내가 짚신을 삼고 있다. 혀를 내밀며 헐떡이는 개가 한여름 무더위를 전해준다.

 

김득신이 30살 무렵에 그린 '놀란 물새'. 이 작품은 역시 김홍도의 33살 작품인 '놀란 물새'와 흡사하다,

또 김득신의 ‘송하기승도’와 조영석의 ‘현이도’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등장인물의 선택이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화원 신분인 김득신은 장기를 두는 사람을 승려로 했고, 소나무 그늘에 모여 돗자리도 없이 땅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문인화가 조영석은 의관을 갖추고 소나무 아래 모여앉아 장기를 두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풍속화로 그렸다.  

득신의 ‘목동우수도’와 김두량의 ‘목동우수도’는 같은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특성은 다르다. 김두량의 작품은 소가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목동의 얼굴, 튀어나온 배 등의 음영처리 등 빼어난 묘사력과 사실성을 발휘한 작품이다. 그러나 김득신의 그림은 오른쪽 하늘의 빈공간에 해오라기를 포치시켜 반대편의 버드나무가 차지하는 무게와 균형을 이뤄 짜임새가 있다.

■김득신의 모방은 탐구정신이었다.
그렇다면 김득신은 어떤 화가였을지는 자명하다. 김홍도를 비롯한 윤두서·조영석·김두량 등을 추종한 따라쟁이 화가였을까.

그 중에서도 롤모델인 김홍도의 사생팬, 혹은 그저 김홍도의 아류였을까. 김득신은 여러 선배들의 화풍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열린 화가였던 것이다. 김득신의 모방은 탐구정신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파적도’에서, ‘대장간’에서, ‘양반과 상민’에서, ‘타작도’에서 김득신의 독창성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김득신의 순간포착 그림은 200년 후인 21세기 지금 세상에 꼭맞는 ‘짤방’이라 할 수 있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오주석,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월간미술, 2009
최지혜, ‘긍재 김득신의 풍속화 연구’, 계명대 석사논문, 2006
김희순, ‘긍재 김득신의 풍속화에 관한 연구’, 영남대 석사논문, 2003
김정은, ‘조선후기 풍속화 연구’, 동국대 석사논문, 2004
박수희, ‘조선후기 개성 김씨 화원 연구,’ <미술사학연구> 제256권 256호, 한국미술사학회, 2007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