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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낙타를 굶겨죽인 태조 왕건의 숨은 뜻

 얼마전 온라인 상에 우스갯소리가 나돌았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인 이유’를 역사 문제에 어느 학생이 ‘메르스 때문’이라고 답했다는 겁니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별의별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냥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942년(태조 25년) 일어난 ‘낙타 굶겨죽인 사건’, 즉 만부교 사건은 고려 475년 역사 가운데서도 최대 미스터리로 꼽힙니다. 물론 <고려사>에는 ‘고려가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절도로 유배시키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밑에 묶어 굶겨죽인 것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상당수 연구자들은 이 대목에서 고구려·발해의 계승자로서 고토 회복을 염두에 둔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아스럽습니다. 아무렴 태조 왕건이 멸망한 지(926년) 16년이나 지난 발해를 운운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끊었을까요. 그것이 정상적인 외교였을까요. 이 만부교 사건의 대가는 너무도 컸습니다. 고려는 3차례에 걸쳐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태조 왕건이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번 주 팟캐스트의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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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유배시키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밑에 매달아 굶어죽게 했다.”(<고려사절요>)
 942년(태조 25년) 고려 475년 역사 가운데서도 최대 미스터리로 꼽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고려 창업주 태조 왕건이 거란이 보낸 대규모 사절단을 절도(絶島)로 유폐시킨 것도 모자라 친선 선물인 낙타 50마리까지 만부교 밑에 매달아 굶겨죽인 것이다. 그러면서 태조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달았다.  

1994년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해 중국측이 임대해준 판다 밍밍과 리리 부부. 1998년 외환위기 때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발해 때문에?
 “거란이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냈다가 갑자기 옛날의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다. 그 무도함이 심하구나. 그러니 화친을 맺을 수 없다. 이웃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려사> 태조 25년)
 이를 두고 후대의 상당수 연구자들은 고구려·발해의 계승자로서 고토 회복을 염두에 둔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것이 통설이요. 만약 시험문제가 나오면 써야 할 모범답안이리라.
 그렇게 해석될만한 구석이 많다. 먼저 당대의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무렵 동북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고려가 통일왕조로서 등장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5대10국 시대라는 혼란기에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후당을 멸하고 중원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이로써 동북아는 고려와 후진, 거란이라는 세 개의 큰 축으로 재편됐다. 동북방에서 해동성국을 구가했던 발해는 거란의 침공에 이미 10년 전인 926년 멸망한 뒤였다.

 

 ■거란을 증오한 왕건
 이 상황에서 고려-후진-거란 간 펼친 외교전은 치열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중원의 후진과 교섭을 적극 추진,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거란을 견제하려 했다. 거란은 후진에 접근하는 고려를 몇차례 사신을 파견했다. 발해 멸망 이전엔 922년 낙타와 모전(毛氈·융단)을 고려에 보냈던 거란은 937년과 939년에도 사신을 파견했다. 아마도 고려가 발해 유민 및 부흥세력과의 연대를 할까봐 그것을 견제한 외교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의 접근에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비밀리에 후진에게 거란 협공을 제의한다.
 중국측 자료인 <자치통감>을 보라.
 “945년 왕건이 호승(胡僧) 말라를 통해 후진의 고조(석경당)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발해와 고려는 혼인한 사이입니다. 발해왕이 거란에 사로잡혀 있으니 청컨대 후진 조정과 함께 거란을 공격해서 그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후진의 고조는 응답하지 않았다.”(<자치통감> ‘후진 제왕’조)
 <자치통감>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증오하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실제 태조 왕건은 만부교사건을 일으킨 지 1년 뒤인 943년 유명한 훈요 10조를 남기는데 특히 거란을 겨냥한 조목을 2개나 포함시켰다.
 “거란은 금수(禽獸)의 나라다. 풍속도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다, 부디 의관제도를 본받지 마라.(4조) 강하고 악한 나라(거란)을 이웃하고 있는데 편안할 때도 늘 경계하라.(9조)”
 그렇다면 후진 측에 거란협공을 제안한 일이나,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나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는 있다. 즉 태조 왕건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을 폈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통할 수 있다.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 그는 태조 왕건의 만부교 사건을 두고 '후대 임금들이 잘 해석해서 본받아야 할 사건'이라 해석했다.

 

 ■발해와 고려가 혼인을 맺었다고? 금시초문인데?
 그렇지만 태조 왕건의 외교를 곱씹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보인다.
 먼저 후진 고조에게 거란 침공을 제안했다는 것을 들춰보자.
 사실 당시의 후진과 거란의 관계를 감안하면 왕건의 제안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진이 어떤 나라인가. 거란의 군사적 도움을 받고 후당을 멸하고 들어섰지만 거란에게 굴종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약체가 아니던가.
 특히 후진은 만리장성 이남의 16개주를 거란에 내주는 굴욕을 맛봤다. 이렇게 내준 지역을 역사는 ‘연운(燕雲) 16주’라 한다. ‘연운’ 지역은 지금의 베이징(燕)과 다퉁(大同·雲)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던 16개주를 의미한다. 이것은 중국 중원세력에게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그랬던 후진이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란을 협공하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태조 왕건이 협공을 제안했다니 수수께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10년 전에 망한 발해왕을 구하려고 했다? 이를 두고 14세기 고려말의 대학자 이제현(1287~1367)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조 대왕이 삼한을 통일한 뒤 백성을 쉬게 하고 문교를 닦으니 발해의 장군 등 수천 수만이 다투어 귀화했다. 그 발해와 혼인을 맺었다는 기록은 국사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조께서 어찌 석경당(후진 고조)과 거란의 교분을 이간질할 수 없었음을 몰랐겠는가.”
 이제현의 계속된 의문점은 다음과 같다.
 “태조 대왕이 아무렴 사신을 직접 보내지 않고 다른 나라(호승) 승려(밀라)를 보내 신흥국으로서 아직 이룬 것이 없는 후진과 연합해서 발해의 원수를 갚겠다고 했겠는가. 또 그 이유 하나 만으로 한창 강성해지는 거란에 원수를 갚으려 했겠는가.”(<역옹패설>)

 

태조 왕건이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굶겨죽인 만부교를 그린 상상도.

■왜 외교분쟁을 일으켰을까.
 이제현의 의문은 얼핏 보아도 타당성이 있다. 그는 <자치통감> 내용을 믿지 않는 것이다. 발해와 고려가 혼인을 맺었다는 기록도 없으며, 태조 왕건이 신생국에 불과한 후진에게 거란 협공을 제안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 승려에게 그 중차대한 일을 맡겼을 리도 없다는 것이다.   
 또하나 의문점은 바로 만부교 사건이다. 태조 왕건은 왜 쓸데없는 외교분쟁을 일어날 지 뻔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만부교사건을 일으켰을까. 
 만부교 사건의 대가가 너무 컸기에 하는 말이다. 이 사건으로 고려와 거란은 단교하고 만다.
 이후 고려는 3차례에 걸쳐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는다. 멸망한 지(926년) 16년이나 지난 발해를 운운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끊은 것이 과연 정상적인 외교였을까.
 사실 몇차례 지적했듯이 고려 외교의 전통은 찬란했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광해군은 다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고 애쓰는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했다지 않은가. 세상 돌아가는 형세도 모르면서 말로만 ‘숭명배청’이니 ‘재조지은’이니 떠들면서 주야장천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만 섬기려하는 대신들을 ‘한심한 인사들’이라 한 것이다.
 과연 그랬다. 고려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피곤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지만 거란은 물론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다. 오죽했으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이 서희의 ‘세치혀’에 말려 280리나 되는 땅(강동 6주)을 떼주었겠는가.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외교관들은 이후에도 강대국 황제들을 쥐략펴락하면서 어지간히 괴롭혔다. 심지어 세계제국 원나라는 고려의 애간장 외교를 견디다 못해 재침공의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나라에서는 “지금 고려가 원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만약 저들이 험준한 산에 기댄다면 100만 대군을 동원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고려침공 불가론이 나돌았단다. 그런 고려 외교의 뼈대를 세웠다는 태조 왕건이 만부교 사건이라는 외교분쟁을 일으킨 것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어찌 태조대왕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까. 
 사실 고려 당시에도 만부교 사건을 둘러싼 태조의 외교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예컨대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후 충선왕(재위·1308~1313)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이제현에게 묻는다.
 “아니 태조대왕께서는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키우는게 백성들에게 무슨 피해가 간다고 굶겨죽이셨을까. 나라 임금이 그 정도 낙타를 키우지 못하겠나?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싫으면 돌려보냈으면 될 일이 아니었을까.”(충선왕)
 그러자 이제현은 알듯 모를듯한 대답을 한다.
 “글쎄요. 원래 나라를 건국하는 창업주의 소견은 원체 원대하고 깊어서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태조께서 만부교사건을 일으킨 것이 오랑캐(거란)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제현은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를 가한다.
 “태조대왕의 뜻에는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겁니다. 전하(충선왕)께서 묵묵히 생각하시고 힘써 행하셔서 태조대왕의 숨은 뜻을 알아내셔야 합니다. 그것이 임금이 할 일입니다. 어리석은 저는 잘 모릅니다.”(<고려사>)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
 이 대목을 정리한다면 약간 이상해진다. 이제현은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태조 왕건의 뜻이 ‘거란의 간계를 물리치려 한 것인지,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태조대왕의 숨은 뜻을 알아내 정답을 찾는 것이 바로 후대 임금들의 몫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이 진실과 상관없이 배우는 자의 몫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실례가 있다. 1468년(성종 17년) 조선조 성종 때의 일이다.
 애완동물을 유난히 좋아했던 성종 임금이 “중국에서 낙타를 구입해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면서 흑마포 60필을 낙타구입비용으로 책정했다. 그러자 대사헌 이경동이 득달같이 나서 극력 반대한다.
 그러면서 바로 만부교 사건을 인용한다.
 “고려 말 이제현은 ‘태조(왕건)가 거란의 간계를 꺾고, 후세의 사치하는 마음을 막으려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성종)께서는 낙타 한마리 때문에 성스러운 인품에 오점을 남기시겠습니까.”
 이경동은 그러면서 흑마포 값이 얼마나 비씬 것인지를 조목조목 따진다.
 “흑마포 1필값은 정포(正布) 10필 값입니다. 농부의 전세(田貰)에서 나오는 정포는 1필을 콩 10두로 칩니다. 그렇게 따지면 흑마포 60필은 정포 600필이며, 콩으로 치면 6000두이고, 석으로 치면 4백석입니다. 쓸대없는 짐승을 사려고 전세 400석의 콩을 쓰다니요. 그 경비는 어쩝니까.”(<성종실록>)

 

 ■역사의 교훈은 역시 백성 
 이경동은 이 대목에서 역시 백성을 떠올린다. ‘지금 해마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궁핍한데 이 무슨 짓이냐’고 신랄한 충언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성종 임금이 누구인가. 세종 버금가는 성군이라 하지 않은가.
 이경동의 충언을 듣고 있던 성종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
 “그래. 그대의 상소문을 읽으니 매우 기쁘구나. 애초에 내가 낙타를 귀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알았다. 그만두마.”
 이경동은 만부교 사건에서 거란 부분 보다는 사치 부분에 방점을 찍어 성종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인용한 것이다. 사실 지금도 만부교 사건의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현처럼, 이경동처럼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교훈 삼는 지는 역사를 배우는 자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우스갯소리가 나돈다. ‘태조가 거란이 보낸 낙타를 왜 굶겨죽였을까’를 묻는 역사문제에 어느 학생이 ‘메르스 때문’이라 답했다는 것이다. 마냥 웃기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메르스의 교훈을 얻을 수만 있다면 누가 어떤 답을 써낸들 무슨 상관인가. 그 조차 메르스가 던지는 교훈인 것을…. 만부교 사건과 결부시켜 해석한들 안되리라는 법은 없다. 경향신문 논설위원